계곡에서 놀고 맛있는 것도 먹자 해서
비가 예보되어 있었다. 이미 오랜 기간 비가 내렸고, 산행 당일에도 비는 내릴 것이었다. 다만 양이 많진 않을 것이라 해서 산행을 예정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무더위의 한가운데라 어차피 땀을 비 오듯 흘릴 테니까. 물론 안전이 최우선이니 산행 중에도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사실 이 정도의 비라면 문제 될 게 없다. 1,222m에 달하는 높이와 너덜의 경사로도 딱히 문제 될 게 없다. 그럼, 무엇이 문제일까? 그런 건 없다. 뜨거운 우정과 넘치는 에너지로 즐겁게 오르면 그만이다. 우린 IBK 긍지산악회니까.
하남공단중앙지점 나병현 대리는 산, 특히 ‘IBK산’을 잘 안다. 평동공단지점에 있을 때 조계산에도 올랐고, 올해 초에도 무등산에 올랐다. 두 산행의 공통점이라면 빗줄기가 거셌다는 건데, 그럼 혹시 오늘의 이 비도? 어쨌거나, 나병현 대리가 동기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시원한 계곡에서 물놀이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뭐, 산도 타고.”
동기 5명이 전국에서 모였다. 본사 외환사업부 김권우 대리와 화성병점지점 남춘호 대리, 부산역지점 장우석 대리, 인천원당지점 강동일 대리가 흔쾌히 응했다. 신입 때부터 함께 한 인연이고 기수 이름이 ‘IBK긍지’였기에 모임 이름도 자연스레 ‘긍지산악회’가 되었다.
이들은 꼭 산행이 아니어도 반기에 한 번 정도는 모였다. 동기들이 전국에 흩어져 있어 방방곡곡을 돌며 안부를 나누고, 커피도 마시고, 게임도 하며 친목을 다졌다고. 그중에서도 산을 좋아하는 동기들끼리는 한두 달에 한 번씩 만나기도 했단다. 나병현 대리는 지난 1월, 무등산 산행을 시작으로 상반기에만 한라산과 설악산을 올랐다. 남춘호 대리는 첫 산행을 설악산으로 시작했다고. ‘긍지산악회’, 꽤 무시무시하다.
각자의 산행 준비를 능숙하게 마친 후, 간단하게 몸을 풀고 산에 들어섰다. 점점 짙어가는 녹음 속으로, 가볍게 흩뿌리는 빗줄기 속으로.
호남정맥의 마지막 봉우리, 백운산
백운산,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을 마다하는 이가 있을까, 그래서 ‘백운산’만 우리나라에 50개가 넘는다. 섬진강이 바다와 만나는 전라남도 광양의 백운산은 높이나 규모에 있어서 맏형에 속한다. 백두대간 지리산에서 시작된 금남호남정맥이 다시 금강을 향하는 금남정맥과 섬진강을 따라 이어지는 호남정맥으로 나뉜다. 호남정맥은 내장산과 무등산, 조계산을 거쳐 여기 백운산으로 솟구쳤다가 섬진강을 만나 사그라든다.
진틀마을에서 산의 서쪽을 오른다. 진틀마을은 ‘니평(泥坪)’이라고도 불렸다. 마을의 들녘이 진흙이라 그렇다. 산이 높고 험하니 비가 내리면 물이 갑자기 불어나기 마련인데, 그 영향이 마을의 이름과 삶에도 영향을 미친다. 아니나 다를까, 등산로는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데 물소리가 정말 웅장하고 시원하다. ‘신선놀음’의 유혹도 있었지만, 비 오는 날의 계곡은 피하는 게 상책이고, 되도록 서둘러 산행을 마쳐야 하는 까닭에… 어, 다들 어디 갔어? 그새 갔네.
“아, 중간에 굴러떨어지는 줄 알았어요. 정말 힘들었거든요. 동료들 덕분에 이겨냈더니 정상에 서 있네요.”
부산에서 온 장우석 대리뿐 아니라 너나 할 것 없이 힘들었다며 거칠게 숨을 쉬었지만, 산행 내내 이들의 발걸음은 지친 기색이 없었다. 이들은 6월의 설악산 오색을 떠올렸는지도 모르겠다. 혹은 ‘언젠가의 지리산’을 위해 묵묵히 견뎠는지도.
설악산은 힘들었다. ‘언젠가 설악산’을 외치던 차, IBK점프업 연수가 잡혀서 일정이 당겨졌다. 김권우 대리와 강동일 대리가 접수에 성공했고, 나병현 대리와 남춘호 대리는 휴가를 냈다. 오색에서 산행을 시작한 게 새벽 3시, 험하고 가파른 길이었지만 부러 웃고 애써 분위기를 북돋우는 등 서로에 기대어 정상에 올랐다. 당연히 하산 후 김권우 대리와 강동일 대리는 곧바로 연수에 참여했다. 무시무시한 산악회라니까.
설악에 비하면 수줍다 할 정도로 온화한 산세의 백운산. 어느새 너덜을 지나 능선에 올랐고, 신선대를 지나쳐 정상을 향했다. 약 500m 거리. 이미 온몸은 비에 흠뻑 젖었지만, 웃음소리는 텅 빈 산에 그치지 않는다.
백운산 상봉은 봉황과 여우와 돼지의 기운을 간직했다고 전해진다. 명예와 지혜, 부의 기운이 있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찾았을까. 어쩌면 사람들이 많이 찾는 산에 좋은 의미를 부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거나 커다란 백운산에는 한라산과 지리산 다음으로 다양하고 많은 식물종이 분포하고 있고, ‘백운산 4대 계곡’에는 여름마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 물장구를 치며 더위를 식히니 무엇을 더 바랄까.
광양 최고의 맛집을 독차지하고서
백운산은 전망 맛집이다. 그러지 않겠는가. 섬진강 건너는 지리산이요, 아래로는 한려수도가 펼쳐지니. 그 빼어난 풍광을 압도한 건 비구름이었다. 산을 타는 사람들은 흔히 ‘곰탕’이라 말하는데, 못해도 3년은 고아낸 듯하다. 정상석 말고는 보이는 게 없다.
돌아서기 전, 간단한 요기를 하기로 한다. 산에서 라면이 진리라면, 그걸 극대화하는 게 점보라면이다. 보온병에 담아온 물을 부으니 목욕탕 같은 용기에 라면이 맛있게 익어갔다. 비 추적추적 내리는 산 정상에서 친구들끼리 부대끼며 라면 드셔보셨는지. 산해진미를 물리는 맛이다.
최근 산행을 물었을 때 지난달의 설악산을 말했듯, 다음 산행을 물었을 때 이들은 ‘후지리산’을 말했다. 아, 뭔가 익숙한데 어색하다. 망지리산은 통영 사량도에 있는데 후지리산은 뭘까?
“후지리산은 후지산과 지리산을 합친 말입니다. 하하. 한라산과 설악산을 올랐으니, 지리산도 당연히 한 번 가야죠. 근데 외국의 산도 경험해보고 싶어서 가까운 일본의 후지산도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아마 가을에 단풍 보러 지리산을 가지 않을까 싶어요.”
그냥 ‘언제 산이나 한번’이 아니다. 산을 좋아하고, 산에 오르는 고된 과정을 즐기고, 그 과정을 함께 하는 이들을 사랑하고, 그들과 함께 산에 올라 경치도 보고 박장대소도 터뜨리는, 모든 순간이 너무나도 소중하다. 시간을 맞추고 일정을 조율해 산에 오르는 이유다. 그저 ‘소박’한 바람이 있다면 퇴직하기 전에 긍지산악회 이름으로 대한민국 100대 명산에 다 오르는 것 정도랄까. 무시무시한 산악회, 맞네. 맞아.
모든 옷과 온몸이 비와 땀에 젖은 건 아무래도 좋다. 등산화 속 양말에 빗물이 고여 자박자박해도 대수롭지 않다. 산이라서 좋았고, 함께여서 행복했으니까.
백운산 INFO
- 주소전라남도 광양시 옥룡면
- 입산
시간상시 개방 - 코스진틀주차장 - 진틀삼거리 - 신선대 - 정상(원점회귀, 약 7.2km)
- 문의광양시 산림소득과 061-797-35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