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가기 위해 돌아보다
며칠 매서운 한파가 옷깃을 여미도록 했는데, 산행 당일이 되자 거짓말처럼 표정을 싹 바꾸고 포근해졌다. 산행 경험이 많지 않아도, 겨울 산행의 부담을 갖지 않아도 되겠다. 대구와 경북의 진산 팔공산을 찾은 건 ‘울산 큰애기들’로, 산업 도시 울산에서 근무하는 IBK인들이 모였다. 사실 진짜 명칭은 ‘울산 큰애기들과 돌쇠’다.
새해의 첫 산행기지만, 실은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에 이루어진 산행이다. 마음이 설레기는 마찬가지. 지나간 해를 돌아보고 다가오는 해를 온몸, 온 마음으로 받아 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번에 오르는 곳은 ‘갓바위’로 이름난 ‘관봉’ 아닌가.
“여기 돌계단이 엄청납니다. 1365개의 계단을 올라야 갓바위를 볼 수 있대요.”
“오르기만 하면 소원이 이뤄진다니, 쉬엄쉬엄 올라봅시다.”
주차장에서 몸을 풀고 관암사까지는 포장도로를 따라 못다 나눈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다. 평소 대화라면 일 이야기지만, 걷는 동안 그간 나누지 못한 이야기, 못 본 새 업그레이드된 이야기가 오간다. 가까워지고 깊어지는 시간이 흐른다.
“팔공산 정상은 비로봉이고, 높이는 1,192m입니다. 이번 산행의 최종 목적지는 비로봉이 아니라, 갓바위가 있는 관봉(853m)입니다. 갓바위까지 안전하고 즐겁게 올라 마음에 담아온 간절한 소원을 잘 빌고 오도록 합시다.”
돌계단은 관암사에서 시작된다. ‘1365계단’이라는 계단 이름은 ‘1년 365일 동안 올라 정성껏 소원을 빌면 하나는 들어주신다’는 뜻으로 지어졌다. 평범한 사람들이 매일 이곳을 찾기는 어려우니, 산에 한 번 오르는 정성으로 한 계단을 오르면 마음이 닿지 않을까.
숫자보다 중요한 건 정성일 테니. 한 걸음, 한 걸음 갓바위를 향해 오른다. 숨이 턱까지 찰 정도가 되면 기가 막히게 쉼터가 나타나곤 하니 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울산 큰애기들’의 바람
그동안 산행 모임의 이름은 없었다. 관봉 산행을 계기로 이름을 짓자는 의견에 맨 처음 나온 이름이 바로 ‘울산 큰애기’였다. 모임에 참여하는 이들의 근무 지역은 울산이고, 울산광역시 중구의 브랜드가 ‘울산큰애기’, 브랜드의 시작에는 1969년 발표된 김상희의 노래 ‘울산 큰 애기’가 있었다. 일제강점기 동명의 신민요가 있을 만큼 널리 쓰이는 표현이기도 한데, ‘큰애기’는 본래 맏며느리를 뜻하며, 미인을 가리키기도 한다.
“지난해를 돌아보면 뭔가에 쫓겨서 지냈던 것 같은데, 운동도 그렇고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어찌 보면 매니저님 덕분이죠.”(정신옥 대리)
“새해에 아이가 고3이에요. 뒷바라지를 잘할 거고요. 제 삶과 일이 중요하니까 열심히 해낼 겁니다. 열심히 웃고 열심히 놀고 열심히 산행할 계획입니다.”(정영미 경비원)
“정효진 대리 부부가 연애할 때부터 지켜봤는데, 좋은 동료들과 함께 산행하니 행복하네요. 개인적으로 힘들었을 때 IBK에서 기회를 주었고, 늘 마음 깊이 감사합니다. 좋은 기회에 인사하고 싶었어요. 2024년 한해도 열심히 해보겠습니다.”(서지향 대리)
“딸아이가 축구를 해요. 이번에 스카우트돼서 울산의 중학교로 옮겼고, 저 역시 울산지점으로 오게 되었는데요. 따뜻하게 맞아준 직원들이 참 고마워요. 아이가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니 대견해요. 올해도 좋은 성과있기를 바랍니다.”(김명진 대리)
좋은 일은 널리, 널리
참고로, 김명진 대리의 딸이 축구선수로 있는 현대청운중학교는 2023 춘계여자축구연맹전 우승을 차지했다. 산을 오르는 속내의 고민과 희망은 다른 듯싶지만 서로 비슷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행운보다는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성장하는 행복을 향하고 있었다. 관봉의 석조여래불 마음에도 그 바람이 전해졌을까.
“아내는 저에게 사랑과 웃음을 주는 에너지원입니다. 육아로 힘들 텐데, 더 아끼고 더 사랑하겠습니다.”(권기산 과장)
“남편은 ‘로토(로또)’예요. 안 맞아도 이렇게 안 맞을 수가(웃음)… 늘 든든하게 지켜주니 고맙죠. 새해에도 그이에게 더 많은 웃음을 주도록 연구하겠습니다.”(정효진 대리)
맞지 않다기엔 부부의 웃음은 시종 유쾌했고, 맞춰 신은 운동화에선 단내가 풍겼다. 혹 정효진 대리의 에너지가 궁금하다면 QR코드를 통해 영상을 확인하길.
매일 맞닥뜨리고
스치는 사람들이
귀한 인연임을 안다면,
깨달음에 가까이 갔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반짝반짝 빛나는
여래불 앞으로 너른 마당바위가 펼쳐져 있었다. 마당 가득 사람들이 모여 갓바위 여래불을 향해 소원을 빌고 있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는 여래불은 약사여래불이 맞다는 설이 있고, 아니라는 주장이 있는데, 그게 대수인가. 고되게 올라 절실하게 비는 마음보다 중요할까(공식적으로 보물 제431호 관봉석 조여래좌상이 있으니, 약사여래는 아니라는 설에 무게가 실린다).
깨달으면 누구나 부처라 했던가. 벗어나고픈 업무와 일상이지만, 그럼에도 하루하루 주어지는 소중한 기회임을 알고, 매일 맞닥뜨리고 스치는 사람들이 귀한 인연임을 안다면, 깨달음에 가까이 갔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끌어당기고 주저앉히는 것만 같던 숱한 돌계단은 어느덧 인자한 여래좌상 앞으로, 하늘에 닿을 듯한 봉우리로, 바람 시원하고 전망 좋은 능선으로 발길을 이끈다.
이른바 ‘푸른 용의 해’가 밝았다. 고구려 고분벽화 강서대묘의 청룡도를 본 적 있는가. 포효하는 입에서는 붉은 기운이 솟구치고, 굽이치는 몸통에서는 도약의 몸짓이 전해진다. 두려움 없이, 망설임 없이 나아가는 청룡의 해를 보내시기를, 저 관봉에서 바랐다.
팔공산 INFO
- 주소경북 영천시 신녕면
- 입산
시간연중무휴 - 코스갓바위 주차장-관암사-갓바위(2.7km)
- 문의팔공산도립공원관리사무소 054-880-8300
- 2024년 1월 1일부터 국립공원으로 승격되었으며, 국립공원공단으로 문의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