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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머물고 싶은 곳이란,
공간력

글 · 서정민 중앙SUNDAY 문화부장

지난 9월 5일과 6일, 양일간 서울 인사동에 있는 복합문화공간 코트에선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프라다가 준비한 전시 ‘프라다 모드-다중과 평행’이 열렸다. 큐레이터 이숙경 씨가 기획한 이번 전시는 ‘서울’을 주제로 영화감독 김지운과 연상호, 그리고 애니메이션 감독 정다희 씨가 각각 영화적 상상력으로 공간을 연출한 자리였다.




이미지 출처 ©프라다



거기,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그날 눈에 띈 것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라고 이름 붙여진 김지운 감독의 공간이었다. 쪽빛 모기장이 둘러진 공간에는 크고 작은 평상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집안 대대로 서울 토박이인 김지운 감독은 “발전 속도가 빠른 만큼 사라지는 소중한 것들도 많은 서울에서 그리운 과거를 하나씩 떠올리다가 유년 시절 집 앞에 놓여 있던 평상에서 생각이 멈췄다”고 했다.
“평상에 얽힌 추억이 참 많죠. 평상은 사랑방이자 동네잔치가 열리는 장이었고 자발적인 커뮤니티 공간이었죠. 이곳에서 사람들은 잠시 쉬거나 꿀맛 같은 낮잠을 자기도 하고, 밥도 먹고, 장기나 바둑 또는 화투를 치기도 하고, 책도 읽고, 공부도 하고, 밤하늘의 별을 세며 매번 달라지는 달의 모양을 올려다봤죠. 어른들은 동네를 지나가다 수시로 평상에 모여 동네 경조사를 의논했고, 음식을 차려 놓고 이웃을 불러 모아 작은 잔치를 벌이기도 했죠. 이 자그마한 평상 위에서 동네 전체가 하나의 견고한 공동체가 되었던 기억이 나요.”
1964년생인 김지운 감독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던 평상은 이번 전시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은 공간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전시를 찾은 관객들의 대부분이 평상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는 MZ세대였다는 점인데, 이들은 자연스럽게 평상에 올라 둥그런 알루미늄 밥상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과자를 먹으며 친구들과 수다 삼매경에 빠졌다. 물론 인증숏 찍기에 열심이었던 이들에게 평상은 ‘과거의 추억’이 아닌 ‘오늘의 즐거움’이었겠지만, 아주 오래 전부터 평상을 중심으로 펼쳐졌던 공간의 풍경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공간의 힘, 경험의 힘, 공간 마케팅

서울대소비트렌드분석센터가 발간한 <트렌드코리아 2023>에는 새해를 움직이는 10가지 트렌드가 제시됐는데, 그중 하나가 ‘공간력’이다. 김난도 교수를 비롯한 저자들은 ‘공간력’을 ‘사람을 모으고 머물게 하는 공간의 힘’으로 정의했다. 핵심은 “작은 개인 블로그부터 거대한 메타버스에 이르기까지 가상공간이 세상을 호령하는 시대지만, 가상의 영토가 넓어질수록 실제 공간의 역할도 중요해진다. 그러니 공간의 힘을 다시 보라”는 것.
코로나19로 팬데믹이 진행되면서 우리의 일상은 비대면 원칙을 중심으로 흘러갔고, 자연스레 ‘공간’이라는 단어의 주 무대 역시 온라인으로 확산됐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온라인 공간이 커질수록 오프라인 공간의 독특한 힘이 발현됐고 중요성 역시 대두됐다. 손으로 직접 터치하며 오감으로 느끼는 경험의 힘이 얼마나 센지 증명된 셈이다.
“상품이 아니라 경험을 팔아라. 최근 마케팅 분야의 큰 화두 중 하나는 ‘경험 마케팅’이다. 특별한 경험을 제공하는 공간은 상품의 가치를 높여주기 때문이다.” 이승윤 디지털 문화심리학자의 책 <공간은 경험이다>의 프롤로그 첫 문장이다. 온라인 유통 확산에 편승하기 위해 오프라인 매장을 대거 철수시켰던 브랜드들이 요즘 ‘공간 마케팅’이라는 새로운 숙제를 푸느라 분주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디지털 시대라는 거대한 흐름을 막을 순 없지만, 주요 소비자층인 MZ세대가 직접 보고 만지고 듣고 맛보고 느끼는 아날로그 문화에서 새로운 즐거움을 발견했으니 기업 입장에선 유니크한 오프라인 공간 만들기 연구에 몰두할 수밖에 없다.
온라인 유통 공룡으로 성장한 무신사는 2023년 10월 27일 서울 성수동 연무장길 중심에 오프라인 스토어 ‘무신사 스탠다드 성수’를 오픈했다. 2021년과 2022년에 각각 오픈한 홍대점과 강남점에 이어 서울에 오픈한 세 번째 오프라인 매장이다. 공간 면적 805.22㎡(약 244평) 규모에 1층은 시즌 포커스 상품 및 우먼즈, 2층에는 맨즈 관련 상품을 갖추고 있는 무신사 스탠다드 성수는 상품을 진열하고 판매하는 것뿐만 아니라 상품별·시즌별 맞춤형 코디 등을 고객들에게 제안하는 큐레이션 서비스를 강화할 계획이라고 했다. 또 인근 로컬 숍들과 협업 프로젝트도 선보인다. 성수동 연무장길을 대표하는 F&B(식음료) 브랜드 7곳과 협업해 무신사 스탠다드 전용 한정판 메뉴를 개발했다.
감도 높은 취향 셀렉트 숍 29CM 역시 온라인 유통으로 성장했지만, 입점 브랜드들과 소비자의 접점을 확대하기 위해 2022년 8월과 9월에 각각 서울과 대구에 오프라인 공간 ‘이구갤러리’를 오픈해 큰 인기를 모으고 있다. 온라인에서 인기 있는 브랜드를 한 개씩 선정해 한 달간 팝업 매장으로 운영하는 게 특징이다. 온라인 유통의 장점을 가장 확실하게 파악해 승승장구하고 있지만, 역시나 스킨십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에 시작된 정책이다.
사실 펜데믹 직전, 대부분의 브랜드들은 온라인 스토어를 오픈하느라 동분서주했다. 불특정 다수의 고객을 더 많이 만날 수 있는 시장이고 ‘혁신적인 브랜드’라는 점을 증명할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다시 오프라인 공간 문화에 공을 쏟고 있다. 공간에 대한 관심이 브랜드로 연결되는 선순환을 만들기 위해서다. 루이 비통, 디올, 구찌 같은 명품 패션 브랜드들과 브라이틀링, IWC 같은 명품 시계 브랜드들이 F&B 사업을 시작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자사가 가진 최상의 가치와 문화를 향유할 수 있도록 브랜드 아카이브를 담아 차별화된 공간을 꾸미고, 그 안에서 먹고 마시며 특별한 경험을 하게 함으로써 미래의 ‘팬덤’을 확보하는 것이다.




브랜딩 시대의 오프라인 공간들

“산업시대에는 상품의 속성으로 고객의 마음에 호소했고, 정보 시대에는 이미지로 정체성을 호소했다면, 현재는 체험으로 고객의 마음과 감성에 호소하는 시대죠. 새로운 시대의 브랜딩, 그 중심에 오프라인 공간이 있어요.” 홍익대 김주연 공간디자인 교수의 말이다.
광고·마케팅 전문가인 이근상 케이에스아이디어(KS’IDEA) 대표 역시 “브랜드가 소비자와 관계를 맺는 방법이 예전과 달라졌다”고 했다. “과거에는 브랜드가 TV 광고 등을 통해 ‘나를 좋아해줘’라고 일방적으로 메시지를 보냈다면, 이젠 MZ세대 취향인 쌍방향 소통이 가능해야 살아남죠. 그런 점에서 오프라인 공간은 여러 가지 매력을 가졌어요. 첫째, ‘문화 콘텐츠로 놀이터를 만들었으니 일단 찾아와서 나를 만나볼래?’라고 자연스레 말을 걸면서 소비자의 자발적 방문을 유도할 수 있죠. 둘째, 상품 판매가 목적이 아닌 비상업적인 공간은 브랜드의 철학과 가치, 취향을 공감하기에 유리하죠. 이렇게 맺은 관계는 끈끈한 팬덤으로 오래 이어지니까요. 셋째, 오프라인 공간에서 보낸 ‘인스타그래머블’한 경험은 결국 SNS를 통해 전파되죠. 즉, 오프라인 공간은 디지털적으로 공유하기에 좋은 ‘거리’를 전달하는 매개체가 된 셈이죠.”
시몬스 침대의 ‘그로서리’ 매장, 하이트 진로의 ‘두껍상회’, LG전자의 ‘금성전자오락실’ 역시 자사 상품을 팔지 않는 오프라인 팝업 매장으로 화제를 모았는데, 자사의 아카이브를 전시함으로써 최고의 브랜드임을 증명하고, 한편으로는 뛰어난 상상력을 현실로 구현함으로써 자사의 자부심을 드러낸 것이다.
반클리프 아펠, 프레드, 부쉐론 등 한 피스에 수십억 원 대를 호가하는 하이주얼리 브랜드들이 현재 서울에서 다양한 전시를 여는 것도 맥락은 같다. 100년이 넘는 브랜드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상품 수백 개를 소개하는 이런 아카이브 전시들은 자사의 뛰어난 장인정신과 상상력을 소비자들에게 소개할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이다. 그래서 예전 같으면 무겁게 느껴졌을 공간 분위기도 젊은 친구들이 인증숏 찍기 좋은 놀이터처럼 기획됐다. 입이 떡 벌어지는 가격 때문에 비록 주얼리를 소유할 순 없더라도 자사와 같은 ‘취향’을 소비하도록 하는 데는 문제가 없도록 공간을 기획한 것이다.




다시 평상으로 돌아가서

우리 시대의 ‘평상’은 무엇일까. 그것은 상상력 가득한 오프라인 공간들이다. 때로는 브랜드의 팝업 매장이 될 수 있고, 때로는 ‘억’ 소리 나는 명품 브랜드들의 화려한 전시장이 될 수 있다. 물리적 거리를 확 줄일 수 있는 온라인 공간도 필요하지만, 결국 사람들은 직접 손으로 느끼고 체감하면서 ‘마음의 거리’를 가깝게 하는 데서 더 큰 만족감을 느낀다. 발품 팔아 찾아간 오프라인 매장과 전시장에서 인증숏을 찍으며 즐거워하고, 그 사진들을 SNS에 올려서 대화를 나누고. 그 옛날 평상처럼 오다가다 잠시 쉴 수 있는 공간은 아니지만, 우리 시대 새로운 평상들은 여전히 머물고 싶은 공간을 통해 소통과 즐거움의 힘을 발휘하고 있다.





서정민 중앙일보 주말 신문 '중앙SUNDAY' 문화부장이다. 보고 먹고 마시고 놀기를 좋아하고, 패션과 푸드, 공예, 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의 라이프스타일 기사를 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