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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츠 마이
헬시 플레저

글 · 고현 프리랜스 에디터

2030 세대를 중심으로 즐거움을 추구하며 건강 관리를 하는 헬시 플레저(Healthy Pleasure)가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다. 운동은 물론 명상, 소셜 모임을 하며 건강한 일상을 영위하는데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맛과 건강을 지키는 로우스펙(Low Spec) 푸드에서 발견할 수 있다. 식품 업계에선 글루텐프리, 고단백, 탄단지 메뉴를 비롯해 비건, 할랄 푸드 등 한층 다양해진 로우스펙 푸드 라인업을 선보이며 헬시 플레저 붐업에 일조하는 중이다.




냉동 김밥의 열풍

미국에서 냉동 김밥이 연일 화제다. 한국의 중소 식품기업 올곧이 미국에 500여 개 체인을 둔 식료품 마트, 트레이더스 조(Trader Joe’s)에 납품한 냉동 김밥 250톤 분량이 단 2주 만에 ‘완판’된 것이다. 국내에서 아직 생소한 냉동 김밥이 미국에서 이토록 인기를 끈 비결은 무엇일까? 한국계 틱톡커 세라 안이 올린 냉동 김밥 시식 영상이 인기를 끌며 이른바 ‘KIMBAP’ 붐을 일으킨 것이 그 시작이다. 올곧이 미국의 까다로운 육류 통관을 피하기 위해 유부, 우엉이 들어간 비건 김밥을 수출했는데, 맛과 건강을 사로잡는 간편식으로 각광받게 되었다고. 영하 45도에서 급속 냉동하는 기술을 이용해 김밥 속재료의 수분 손실을 최대한 줄이고 맛을 유지시킨 것도 인기 비결이다. 미국인들은 이제 집에서 전자레인지로 한국산 냉동 김밥을 데워 충만한 한끼 식사를 즐긴다.
냉동 김밥이 K푸드의 대세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건 건강 관리와 먹는 즐거움을 동시에 추구하는 헬시 플레저 트렌드와 무관하지 않다. 이는 국내에서도 감지되고 있다. 지난 가을 시장조사전문기업 엠브레인 트렌드 모니터에 따르면 전국 만 19~69세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2023 로우스펙 식음료’ 관련 U&A 조사를 실시한 결과 식음료 구매 시 로우스펙 푸드를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사람들이 80%에 가깝도록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로우스펙 푸드는 식품이나 음료에서 칼로리, 당, 알코올, 화학 첨가물 등을 낮추면서도 맛은 유지하는 일종의 대체 식품을 일컫는다. 건강 관리와 식사의 즐거움을 놓치지 않는 헬시 플레저를 실천하는 이들에게 로우스펙 푸드는 선택이 아닌 필수로 자리 잡고 있다.







로우스펙 푸드는 진화한다

과거 로우스펙 푸드는 극성스러운 다이어터를 위한 소수의 식단 정도로 취급받았다. 퍽퍽한 닭가슴살과 단백질 음료, 샐러드 도시락 등 그저 살을 빼기 위해 맛은 포기한 채 특정 기간 동안 집중 섭취하는 저칼로리 식단으로 말이다. 인내심을 잃지 않도록 각 개인들은 기존 음식에 가깝도록 아이디어를 짜내 자신만의 레시피를 개발하거나 치팅 데이(식단 조절 중간에 먹고 싶은 음식을 자유롭게 먹는 날)가 오기만을 기다려야만 했다.
그러나 요즘의 로우스펙 푸드는 헬시 플레저 트렌드에 발맞춰 맛과 형태가 기존 음식과 다름없도록 진화하고 있다. CJ, 풀무원, 하림 등 국내 대표 식음료 기업들이 앞다퉈 선보이는 로우스펙 푸드에서 이런 변화가 엿보인다. 선택의 폭이 넓어진 것은 물론이다. CJ제일제당은 세계 48개국에서 판매되는 스팸 브랜드 캔햄 중 처음으로 닭가슴살 스팸을 개발했다. 스팸 고유의 맛은 그대로 살리고 200g 캔으로 1일 영양성분 기준치의 60%를 섭취할 수 있다고. 풀무원은 건강 스낵 브랜드 소야 스낵에서 단백질과 식이섬유 등이 함유된 두부칩 감자, 두부칩 멀티그레인, 나또칩 양파 등을 내놨고, 아이들용 쿠키 제품에는 칼슘을 첨가해 맛과 영양 모두를 끌어올렸다.
하림은 한 끼 식사에 필요한 3대 영양소인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을 균형 있게 구성한 체중조절용 조제식품 ‘하림e닭 탄단지 다이어트 도시락’을 발빠르게 출시했다. SPC가 운영하는 파인 캐주얼 샐러드 브랜드 피그인더가든은 가을을 맞아 무화과, 단호박, 비트 등 제철 과일을 활용한 신메뉴 샐러드를 내놓았다. 이처럼 다채롭게 변모한 로우스펙 푸드는 고른 영양뿐 아니라 테이블 위의 즐거움도 놓치지 않는다.
제로 슈거 음료의 인기도 헬시 플레저 트렌드와 떼어놓고 설명할 수 없다. 설탕을 첨가하지 않은 제로 콜라와 제로 사이다 등 제로 청량 음료의 인기를 넘어 주류 업계의 변화도 감지된다. 저도수 소주가 대세로 떠오르더니 롯데칠성음료가 선보인 제로 슈거 소주인 ‘새로’는 출시 1년만에 ‘참이슬’과 ‘처음처럼’이 양분한 소주 업계 지형도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맥주 브랜드 또한 알코올 함량이 1% 미만인 논알코올 맥주를 출시하며 헬시 플레저 트렌드에 일조하고 있다. 일상 깊숙한 곳으로 들어온 헬시 플레저는 더이상 소수가 향유하는 전유물이 아닌 건 분명해보인다.







지속 가능한 헬시 플레저 라이프

‘맛있는데 건강한 음식’이라는 명제는 그간 모순처럼 받아들여졌다. 넷플릭스 시리즈로 제작되기도 한 사민 노스락의 저서 <소금, 산, 지방, 열>에 따르면 맛있는 음식은 제목에 열거된 네 가지 핵심 요소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야만 한다. 네 가지 요소가 식자재와 상호 작용하며 인류의 요리는 진화되어 왔으며, 풍미의 극대화는 하이스펙 푸드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맛있는 음식을 섭취하는 일은 별 수 없이 건강 관리와 다소 멀어지는 길로 여겨야 했다.
인간의 조리사는 그간 맛을 중심으로 진화했지만 이제 건강 또한 간과하지 않는다. 맛을 살리면서 영양을 고르게 챙기는 미션에 도전하는 셈. 그렇다면 건강은 물론 맛까지 사로잡은 로우스펙 푸드가 그간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꿔놓을 수 있을까? 아직은 과장된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서두에 언급한 냉동 김밥을 비롯해 비빔밥, 떡볶이 등 K푸드가 해외에서 건강한 간편식으로 각광받고 있지만, 성분을 세세하게 뜯어 보면 칼로리와 염분, 탄수화물 함량이 결코 낮지 않아 재평가될 가능성이 다분하다. 인기를 끌고 있는 제로 음료에 들어간 아스파탐이 체내 인슐린 호르몬 분비에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 또한 보도되고 있다. 인공감미료를 섭취하면 단맛으로 인해 췌장에서 인슐린이 잘못 방출될 가능성이 있다는 연구 결과도 뒤따른다. 이처럼 아직 불완전한 로우스펙 푸드를 보다 안심하고 즐기기 위해선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 식음료 회사들은 로우스펙 푸드를 위해 새롭게 첨가하는 성분의 안전성을 보다 꼼꼼하게 검증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고, 소비자는 과장된 마케팅에 현혹되지 않도록 늘상 경각심을 갖아야 할 테다.
헬시 플레저를 실천하기 위해 보다 중요한 것은 결국 테이블 위의 즐거움이다. 접시에 올려둔 음식을 느긋하게 맛보고 대화를 나누고 잠시 일상의 압박에서 벗어나는 시간. 음식을 먹는 행위는 단순히 영양을 보충하는 것에만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이다. 테이블 위에서 벌어지는 여러 상호 작용은 우리의 일상을 한층 풍요롭게 만들어낸다. 헬시 플레저 역시 이런 즐거움을 기반으로 추구해야 한다.
로우스펙 푸드의 인기와 함께 인류의 식단은 건강해지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반면, 테이블에 머무는 시간은 차츰 줄어들고 있다. 접시나 그릇은 간편식 용기가 대체하고, 음식을 조리하는 과정 또한 단순해졌다. 음식이 단지 영양과 편리함을 기준으로 재편되면 인류의 식단은 점점 단조롭게 변모되고 말 것이다. 영화 <설국열차> 꼬리칸의 탑승객이 배급받던 바퀴벌레 젤리까지는 아니더라도 말이다. 그렇기에 테이블에서의 즐거움을 놓치지 않는 헬시 플레저가 더욱 중요하다. 음식의 오리지널리티를 잊지 않고 느긋하게 테이블 위에서 즐기는 식사 시간. 진정한 헬시 플레저는 그 경험을 지속하는 길에서 이룰 수 있지 않을까?






고현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 <파인더스 매거진> 편집장을 거쳤으며, 다채로운 주제를 남다른 시선으로 소화해 글을 쓰는 자유 기고가다. 세상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사소한 시도라는 의지를 담은 싱글몰트 위스키 시음실 겸 디자인 잡화점 ‘무용소(@mooyong_so)’를 서촌에서 운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