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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IC CLOUD

새로운 세기, 색의 향연

앙리 마티스
<모자를 쓴 여인>

글 · 전원경 예술 전문 작가, 세종사이버대 교수
<모자를 쓴 여인>, 앙리 마티스
1905년, 캔버스에 유채, 80.65x59.69cm,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샌프란시스코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예술의 개념은 파격적으로 변화했다. 20세기의 예술 작품에서는 명확한 형태와 정연한 구조를 더 이상 찾을 수 없다. 예술은 이제 자연의 모방이 아니라 예술가의 마음속에 있는 어떤 심상이나 느낌을 자유로이 표현하는 수단이 되었다.
피카소와 마티스는 각기 입체파와 야수파라는 혁신적인 유파를 통해 새로운 세기의 시작을 알린 파리의 화가들이다.

자신을 찾아가는 길

앙리 마티스(Henri Mattisse, 1869~1954)는 흔히 야수파의 대표적 화가, ‘색의 마술사’로 불린다. 마티스 하면 일부러 서투르게 그린 듯한 데생과 오직 강렬한 색채만 앞세운 장식적 회화들, 또 만년의 색종이 콜라주들이 떠오른다. 물론 마티스가 습작 시기부터 이런 그림을 그렸던 것은 아니다. 언뜻 보기에는 서툴러 보이는 데생의 작품들이지만 자신의 개성을 찾기까지 마티스는 길고 먼 길을 돌아가야 했다.
마티스는 1869년 북프랑스의 부유한 상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가 법관이 되기를 원했고 마티스는 법대에 진학해 스물두 살에 변호사 자격증을 땄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이미 그림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마티스는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화가귀스타프 모로의 화실에 들어가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 1895년에는 소원했던 에콜드 보자르의 입학 허가도 받았다. 막상 에콜 드 보자르에서 공부를 하면서 마티스는 학교에서 자신이 원하던 가르침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루브르의 고전주의 작품들도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때부터 마티스는 자신의 개성이 무엇인지, 진정 원하는 작품은 어떤 것인지를 찾아내기 위한 긴 모색의 길에 들어선다. 모네부터 시작해서 세잔, 고흐, 고갱, 시냐크 등 마티스는 자신이 따라 할 수 있는 모든 선배 화가들의 화풍을 다 흉내 내보았다. 한때 쇠라와 시냐크의 점묘법에 대단히 몰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어디서도 진정한 길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어디서나 스스로를 탐구했다”라는 그 자신의 회고처럼, 결국 마티스에게 길을 열어준 유일한 빛은 마티스 본인의 직관이었다.


현란한 색채 그리고 야수파의 탄생

마티스는 전통적인 방식의 그림을 잘 그렸기 때문에 남들처럼 그림을 그린다면 쉽게 돈을 벌 수 있었다. 1904년에 화상 볼라르의 도움으로 연 첫 번째 개인전은 나쁘지 않은 반응을 얻었다. 평범한 정물화를 그려 달라는 요청도 들어왔다. 그러나 마티스는 남들과 엇비슷한 그림을 그릴 수는 없었다. “그것은 내 예술적 죽음이 될 것이다” 라고 말하며 오히려 그때까지의 작품 중 어디서 본 듯한 그림은 전부 없애기까지 했다. 아내인 아멜리와 세 명의 자녀를 부양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런 결정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코르시카에서 발견한 지중해의 빛나는 태양이 어떤 계시를 알려주는 것 같았다. 살롱전 입선에 연달아 실패하고 생계를 위해 아내가 낸 모자점도 폐업하는 등 어려움 속에서 마티스는 암중모색을 계속했다.
마티스는 인상주의에 미련을 두지 않기로 했다. 출범한 지 30년이 지난 인상주의는 더 이상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놓지 못했다. 쇠라와 고흐로 대표되는 후기 인상주의 역시 마찬가지였다. 동료 화가인 앙드레 드랭은 마티스에게 “점묘법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라고 충고했다. 점묘법을 포기하자 이제는 점묘법에서 구사했던 현란한 색채만이 남았다. 지중해의 빛 아래서 발견한 색채. 마티스는 본인의 직관을 믿어보기로 했다.
1905년 아멜리를 그린 ‘모자를 쓴 여인’을 ‘살롱 도톤’에 출품하면서 마티스는 ‘야수파’라는 달갑지 않은 이름을 얻었다. 비평가 루이 보셀이 살롱 도톤 전시장을 찾았다가 마티스, 드랭, 블라맹크 등 현란한 색채를 앞세운 그림들 사이에 고전적인 조각이 한 점 서 있는 장면을 보고 “저런, 도나텔로(15세기 초반 피렌체에서 활동했던 조각가)가 야수들 사이에 있군그래”라고 말하며 혀를 찼다. 이 한탄 조의 말에서 ‘야수파’라는 명칭이 탄생했다.


‘빛’을 향해 나아가다

‘모자를 쓴 여인’ 속의 아멜리는 현란한 원색으로 가득 차 있는 듯이 보인다. 그녀는 화려한 모자를 쓰고 부채를 든 채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놀랍게도 아멜리는 모델을 설 때 검은 옷과 검은 모자를 쓴 상태였다고 한다. 비평가 카미유 모클레어는 “마티스가 사람들의 얼굴에 한 바가지의 물감을 쏟아부었다”라고 말했다. 언론은 물론이고 마티스의 동료들, 심지어 아멜리까지도 ‘모자를 쓴 여인’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 다만 미국인 컬렉터 레오 슈타인은 확신을 갖고 이 그림을 구입해서 마티스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다. ‘모자를 쓴 여인’은 일종의 선언, 마티스 본인에게조차 두렵게 느껴지곤 했던 현란한 색채가 그림의 전면에 등장함을 알리는 신호탄 같은 그림이었다. ‘모자를 쓴 여인’을 그린 후, 마티스는 ‘모든 것을 갈기갈기 찢어 그릴 생각’이라고 선언했다. 드디어 그는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어딘지 깨달았던 것이다.
자신의 길을 색에서 찾은 이후로 마티스는 말 그대로 쉬지 않고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하거나 콜라주를 만들었다. 만년의 화가는 후배들에게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말고 일단 그리라”고 충고했으며 자신이 언제나 씨름하는 대상은 색채, 궁극적으로 현대미술이 나아갈 방향은 ‘빛’이라고 대답했다. 임종의 병상에서까지 긴 막대에 목탄을 묶어 병실 천정에 그림을 그렸던 마티스는 자신의 작업에서 해답을 찾아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아직 찾고 있다”라고 말했다. 마티스는 놀라운 화가이자 영감의 화가, 영혼의 맨 밑바닥까지 화가로서만 살았던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