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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K 컬쳐

카툰으로 보는 역사

내가 ‘군주’가 될 상인가
세조

글 · 편집실 일러스트 · 유남영 참고 · KBS <역사저널 그날>
관계에서 친해지거나 어색한 분위기를 풀 때 ‘술자리’만 한 것이 없다. 이를 활용했던 조선의 왕이라면 단연 세조다. <세조실록>에서 술자리 기록을 검색하면 467건이 나온다. 술자리에 있어 세조는 조선 최고의 군주君( 酒)였다. 격의 없이 즐기며 신하들의 기분을 풀어주고 자신에게 충성을 다짐하게 했던 세조의 술자리 소통법.


1453년 계유정난에 성공한 수양대군은 단종을 압박해 1455년 왕위에 올랐다. 왕권 강화를 위해 자신 만의 정치를 펼치고자 했던 세조는 술자리를 자주 베풀며,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준 공신들과 만남의 장을 즐겨 가졌다. <세조실록>에는 세조가 한명회, 신숙주, 정인지 등과 술자리를 즐겼다는 기록이 여럿 나온다. 참고로 역대 왕의 실록에서 술자리를 검색하면 974건이 나오는데, <세조실록>의 경우 467건으로 절반에 해당한다. 세조의 기록은 가히 조선 임금 가운데 최고 기록이다.

술자리에 대한 여러 일화가 전하는데, 세조가 대화를 많이 했음은 물론 흥이 나면 함께 춤추거나 즉석에서 게임을 하는 등 신하들과 격의 없이 소통했고, 1차가 아쉬워 2차까지 가졌다는 내용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경희궁에서 열린 한 술자리는 북쪽의 야인 정벌에 나선 군사들을 위로하는 행사였는데, 술이 반쯤 취했을 무렵 세조가 ‘이준, 정인지, 신숙주, 한명회, 홍윤성, 홍달손에게 명해 일어나 춤추게 했다. 여려 장수와 호위군사에게 술을 내려 취할 때까지 마시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세조는 자신을 왕으로 추대한 공신 세력을 양날의 검으로 인식했다. 목숨을 바쳤던 공신들이지만, 한순간 자신에게 칼끝을 겨눌 수 있음을 생각했던 것이다. 잦은 술자리를 통해 신하들의 기분을 풀어주고 자신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계기로 삼고자 했다. 한명회, 신숙주처럼 역사 속 인물들의 숨은 모습을 볼 수 있는 일화는 또 있다. 술이 얼큰하게 취한 세조는 장난기가 발동해 신숙주의 팔을 비틀었고, 신숙주에게 자신의 팔을 비틀어보라고 했다. 취기 오른 신숙주가 세조의 팔을 비틀자 세조는 아픔을 느끼다 못해 기분이 상했다. 술을 핑계로 자신을 능멸했다고 여겼던 것. 이 상황을 모두 지켜본 한명회는 신숙주가 염려됐다. 술이 잔뜩 취해도 집에 가면 반드시 책을 보던 신숙주의 습관을 알던 한명회는 신숙주의 종을 불러 그날은 집에 데려가 바로 재우게 했다. 예상대로(!) 세조는 신숙주의 동태를 살폈고, 신숙주가 잠들었다는 보고를 받곤 그가 술에 취해 실수한 것임을 알고 분을 풀었다고 한다.

술자리를 정치의 무대로 만들었던 세조는 임종 직전 ‘원상제’를 시행했는데, 신숙주, 한명회, 정인지 등 공신들이 왕의 사후에도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였다. 원상제는 예종, 성종을 거치면서 훈구파의 기틀을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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