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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K 컬쳐

발길 닿는 길(해외편)

낭만 깃든
설국을 잇는 길

일본 홋카이도

글 · 사진 서영진 
홋카이도의 겨울은 길고 깊다. 11월 즈음 내린 첫 눈은 이듬해 4월까지 간다.
긴 겨울을 나는 홋카이도의 철로들은 낭만과 추억을 싣고 설국(雪國)을 가로지른다.
눈 쌓인 간이역에 무심코 내리거나, 영화의 배경이 된 도시에 하룻밤 의지할 수도 있다.
설경에 안긴 노천온천에서 한몸 쉬어 가도 좋다.

단칸 열차 오가는 홋카이도의 고즈넉한 간이역

영화 <러브레터>와 <철도원>의 그곳

홋카이도의 열차들은 겨울이면 색깔을 바꾼다. 설원을 달리는 테마열차가 등장하고, 열차의 스토브에서 오징어를 구워 먹을 수 있는 이색 열차가 오간다. 아바시리역에서는 오호츠크해의 얼음 바다를 구경하는 유빙열차가 출발한다. 홋카이도는 끝없는 눈밭, 유빙의 바다, 겨울 축제의 도시로 유명하다. 홋카이도의 설원은 영화와 소설 속에 설렘과 함께 등장한다.

북쪽의 아사히카와는 소설 <빙점>의 작가 미우라 아야코를 배출한 도시다. ‘눈 박물관’과 눈 축제를 간직한 고장에는 홋카이도에서 가장 많은 눈이 내린다. 흩날린 눈이 채 녹기 전, 금세 수북이 쌓인다. 아사히카와에서는 해산물 육수에 간장을 더한 소유라면이 별미다. 아사히카와에서 소야혼센 열차를 타면 러시아 사할린과 마주한 최북단 왓카나이까지 이어진다.

하코다테혼센 기차노선은 제법 번잡한 오타루, 삿포로, 하코다테를 가로지른다. 오타루는 명대사 “오겡끼데스까(잘 지내고 있나요)”로 알려진 영화 <러브레터>의 도시다. 오타루 시청사 등 촬영지를 찾는 여행은 여전히 인기를 구가한다. 주인공 나카야마 미호가 눈밭에서 절절한 그리움으로 외치는 그 장면은 홋카이도의 스키장에서 찍었다. 오타루는 낭만적인 운하를 간직했으며, <미스터 초밥왕>에서 초밥의 도시로 나온다.

삿포로 남단의 하코다테는 큰 섬 혼슈우에서 건너온 열차가 처음 닿는 항구도시다. 개항의 도시답게 유럽풍 골목 분위기가 완연하다. 포장마차 골목인 다이몬요코초의 오징어 요리와 유노카와 온천의 원숭이 온천욕도 이채롭다. 하코다테는 세계 3대 미항으로 알려져 있으며, 매혹적인 야경으로 낮 못지 않게 밤이 매혹적인 도시다.

삿포로 해산물 요리
유노카와의 원숭이 온천욕


‘에끼벤’ 도시락과 함께하는 삿포로

홋카이도의 대표 도시 삿포로는 관문이자 추억 여행의 거점이다. 삿포로역 인근은 온통 도시락 가게로 즐비하다. ‘에끼벤’으로 불리는 도시락은 낯선 여행자들에게 추억의 매개다. 일본 열차 여행의 묘미는 역 근처를 기웃거리며 다채로운 도시락을 향유하는 것이다. 홋카이도의 특산물인 털게가 들어 있는 그림 같은 도시락은 입과 눈을 즐겁게 한다. 삿포로 도심에는 100년 세월을 지닌 노면전차가 달린다. 삿포로 시덴으로 불리는 전차는 1916년에 개통돼 100년 가까운 역사를 지녔다. 한때 폐선 위기를 맞았지만, 여전히 도심의 오도리공원을 가로지른다. 삿포로에서는 매년 2월 세계적인 눈 축제가 열린다. 다양한 라면을 맛볼 수 있는 라멘요코초, 삿포로 맥주 공장, 홋카이도대학 같은 오랜 명소들은 묵직한 눈 사이에서 활기를 되찾는다.

삿포로를 출발한 열차는 남쪽 온천 마을과 연결된다. 온천 마을 노보리베츠에서는 전통 료칸에 묵으며 유황 온천욕을 즐기는 아늑한 시간이 마련된다. 삿포로 북쪽의 후라노, 비에이까지는 단칸열차들이 오간다. 투박한 외관의 열차들은 허물도 경계도 없다. 검표원을 겸하는 차장과 손님과의 거리 또한 가깝다. 간이역에서 만난 역무원은 기약 없는 이방인을 향해 두 손을 모으고 목례를 한다. 일본 시골마을 간이역의 사연을 담아냈던 후르가토 야스오 감독의 <철도원> 속 장면과 닮았다. 홋카이도의 열차 곳곳에서 잔잔하고 섬세한 부분을 목격하게 된다. 좌석 앞에는 열차표를 꽂아 두는 앙증맞은 티켓 꽂이가 달려 있다.

설경 속에 즐기는 노천온천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인 ‘닝구르 테라스’ 통나무집


스키장에 머무는 낭만, 소도시 후라노

홋카이도의 중심인 후라노는 겨울이면 설경이 아득하다. 인구 2만 6000명의 후라노는 작은 스키타운인 듯싶지만, 스노보드 월드컵대회를 개최한 도시다. 마니아들이 즐겨 찾는 후라노 스키장의 설질은 가볍고 푹신푹신하다. 후라노의 아쿠도라역은 영화 <철도원>의 실제 배경이 된 간이역이기도 하다. 후라노는 드라마 한 편으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1980년대 일본의 안방극장을 휩쓸었던 <기타노쿠니카라>에 마을이 배경으로 담기며 관심을 끌었다. 드라마 작가가 운영하던 ‘닝구르 테라스’가 화제였고, 금세 명소로 자리 잡았다. 닝구르 테라스에서는 통나무 오두막마다 전통 수공예품을 만들어 내는데, 연인들에게 데이트 명소로 늘 인기다. 와인가게, 치즈 공방, 과자 가게 등을 둘러보는 후라노의 길목들은 마냥 소담스럽다.

후라노 인근의 비에이는 예술가와 자연 애호가들이 사랑한 고장이다. 사진 작가 마에다 신조의 갤러리를 비롯해 마을 곳곳에 아트 갤러리와 앙증맞은 가게가 들어서 있다. 비에이의 시키사이노오카 언덕은 사계절 신비롭다. 겨울에는 라벤더 꽃밭 대신 순백의 눈밭으로 채워진다. 설원 한가운데에는 크리스마스트리가 서 있다.

후라노와 비에이 뒤편으로는 다이세쯔산이 흐른다. 다이세쯔산은 일본에서 가장 큰 국립공원으로, 홋카이도에서 가장 높은 아사히다케 봉우리(2290m)를 품고 있다.

홋카이도의 철로 끝에 닿은 도시의 이름들은 대부분 낯설다. 혼슈우, 큐슈에서 봤던 풍경과도 사뭇 다르다. 설렘으로 단장된 열차길은 수수한 간이역을 벗어나 기차 소리가 아득해질 때까지 낭만과 추억으로 남는다.

아사히카와의 겨울 골목 풍경
큰 눈이 쌓인 홋카이도 도로

설국 속에 들어선 후라노 스키장

홋카이도 철로 여행

이 철로 여행은 삿포로를 기점으로, 북쪽으로 향하면 아사히카와를 경유해 오호츠크해와 가까운 일본 최북단의 왓카나이, 유빙의 고장 이바시리까지 이동할 수 있다. 아사히카와에서 영화 <철도원>의 도시인 후라노행 열차로 갈아탈 수 있다. 삿포로에서 하코다테혼센을 이용해 서남쪽으로 향하면 <러브레터>의 고장 오타루, 야경의 도시 하코다테로 연결된다. 삿포로 남쪽으로는 노보리베츠, 도야 등 온천 지역이 가깝다. 이들 도시를 열차로 이동하며 구경하려면 약 5~7일이 소요되는데, JR 홋카이도 레일패스를 이용하면 편리하다. 단칸 테마열차인 ‘노롯코’ 열차에 탑승하는 것도 운치 있는 방법이다. 삿포로, 오타루, 아사히카와에서는 겨울이면 눈과 얼음 축제가 열린다. 홋카이도와 본섬 혼슈우는 세이칸 터널로 연결된다. 길이 53km로, 세계 최장 길이의 해저 터널이다. 이 터널만 왕복으로 오가는 별도의 열차 투어가 마련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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