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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IC CLOUD

여름 햇살처럼 빛나는 젊음
르누아르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R E N O I R
글 · 전원경 예술 전문 작가, 세종사이버대 교수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1876년, 캔버스에 유채, 175x131cm, 오르세미술관, 파리
르누아르의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를 보면 저절로 싱그러운 초여름의 햇살 그리고 그 햇살만큼이나 환하고 밝은 젊음이 떠오른다. 그림은 몽마르트르의 카페 겸 유원지인 물랭 드 라 갈레트에서 열린 주말 파티를 담고 있다. 가로 175cm, 세로 131cm의 큰 캔버스 가득히 젊은이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르누아르 작품의 주 무대였던 ‘물랭 드 라 갈레트’

나무들이 둘러싸고 있는 야외의 댄스 홀, 무성한 나뭇잎들 사이사이로 환한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그 빛을 받은 처녀들의 얼굴에서는 투명한 광채가 반사된다. 그림의 한가운데 있는 처녀들은 오른편 테이블에 앉아 있는 한 무리의 남자들과 막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 듯하다. 두 처녀는 몸을 앞으로 약간 기울이고 눈을 빛내고 있다. 우리에게 뒷모습만 보이는 남자가 무언가 재치 있는 입담으로 아가씨들의 귀를 솔깃하게 하는 모양이다. 테이블 다른 편에 앉은 남자의 친구들은 친구와 아가씨들 사이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며 설레는 감정을 숨기지 못한다. 이들의 뒤편으로는 모자를 쓴 한 무리의 남녀들이 한데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고 그 뒤로는 댄스에 열중한 아가씨들의 홍조 띤 얼굴이 보인다. 댄스 홀의 바닥에서 둥실둥실 떠다니는 햇빛이 구름 위를 걷는 듯한 젊은이들의 감정과 파티의 열기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림의 무대인 물랭 드 라 갈레트는 현재도 여전히 몽마르트르에서 영업하고 있다. 1873년 르누아르는 몽마르트르 언덕 근처에 작업을 위한 화실을 하나 세내어 들어갔다. 지금의 몽마르트르는 파리의 명소 겸 ‘핫 플레이스’이지만, 르누아르가 머물던 그 당시의 몽마르트르는 시내에서 먼 변두리 동네였다. 언덕에는 포도밭이, 풀밭과 풍차들 사이에는 가난한 화가들의 아지트 역할을 하던 카페들이 있었다. 새 화실로 짐을 옮기고 심기일전한 르누아르는 그림의 주제를 찾아 몽마르트르를 거닐었다. 그의 눈에 띈 대상은 물랭 드 라 갈레트에서 주말마다 열리는 댄스 파티였다. 르누아르는 파티의 분위기를 생생히 살려내기 위해 자신의 친구들 그리고 파티에 온 진짜 손님들을 모델 삼아 그림을 그렸다. 환하게 빛나는 야외 유원지의 들뜬 분위기와 드레스를 차려 입고 댄스 파티를 찾아온 아가씨들의 표정을 생생하게 묘사하기 위해 르누아르는 1년 가까이 물랭 드 라 갈레트를 드나들며 스케치를 계속했다.


한발 늦게 드러난 그림의 진가

심혈을 기울여 그린 그림이었지만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가 출품된 1877년 제3회 인상파전의 반응은 냉담했다. 평론가들은 이 그림에 대해 ‘왜 사람들이 폭풍우 치는 하늘과 구름 위에서 춤추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식의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은 인상파 지지자들은 이 그림의 진가를 알아보았다. 르누아르의 친구들은 ‘무지개 같은 반사광이 그림에 가득 차 있다’는 칭찬으로 르누아르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고, 동료 화가이자 인상파의 주요 후원자였던 구스타프 카유보트는 전시회 직후 이 그림을 사들였다. 이후 카유보트는 유언장을 통해 자신이 가지고 있던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프랑스 정부에 기증했고, 그림은 카유보트의 사망 후인 1896년 프랑스 정부로 넘어갔다. 현재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는 인상파의 작품들을 주로 소장하고 있는 파리 오르세 미술관의 대표작으로 전 세계에서 몰려드는 관람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그림 속에는 가난이 존재하지 않는다’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가 보는 이들을 절로 미소 짓게 만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림 한 가운데에 자리한 아가씨들의 발그레한 뺨과 화사한 표정 덕분이 아닐까? 이 처녀들은 실제로 르누아르의 이웃사촌들이었다. 당시 몽마르트르에서 살던 처녀들은 부유한 부인들의 드레스에 수를 놓거나 상점의 점원으로 일하며 얼마 안 되는 보수를 받는 처지였다. 한 주 내내 고된 노동에 시달렸을 이들은 주말의 파티를 위해 아껴 둔 드레스를 꺼내 입고 물랭 드 라 갈레트를 찾았을 것이다. 언뜻 보아도 이들이 걸친 드레스나 장신구들이 고급품은 아니다. 그러나 아가씨들의 상기된 얼굴과 빛나는 눈동자, 그리고 테이블 위에 손을 올려놓은 오른쪽 끝 남자의 순진한 시선은 이들이 다시 오지 못할 젊음의 한순간을 온전히 즐기고 있음을 보여준다. 평범한 옷차림과 장신구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는 초여름 햇살처럼 싱그러운 젊음이 있고, 그 젊음은 화가의 화폭에서 어떤 보석이나 명품보다 더 찬란한 광채를 내며 빛난다.

이 그림을 그리던 당시의 르누아르 역시 그림 속 모델인 남녀와 엇비슷한 처지였다. 리모주의 가난한 집안에서 7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난 화가는 열두 살 때부터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는 일을 통해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파리에서 화가 수업을 할 때도 부유한 친구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생계를 유지하곤 했다. 고대하던 살롱전에서는 계속 낙선했고 모네 등이 주도한 인상파 전시회에서도 르누아르의 그림은 잘 팔리지 않았다. 1880년대에 서서히 인상파의 가치가 알려지고 뉴욕의 부호들이 인상파의 그림을 사면서 르누아르는 비로소 가난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림 속 젊은이들의 모습 어디서도 화가의 불안한 마음은 찾아볼 수 없다. 르누아르는 천성적으로 명랑한 성격이었고 불안과 고통보다는 즐거움과 행복을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림에는 가난한 사람이 있을 수 없다’라는 것이 르누아르의 철학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그의 또 다른 대표작인 ‘보트 파티에서의 오찬’에도 잘 드러나 있다. 사랑에 빠진 젊은이들의 기쁨, 모든 사람이 서로 어울려 편안하고 느긋하게 즐기는 파티의 즐거움, 햇빛과 음악, 사랑스러운 천진함 등의 정서가 그의 화풍과 어우러져 행복의 에너지로 발현되고 있다.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가 보는 이들의 마음을 환하게 밝혀주는 것은 바로 이러한 부분 때문이다. 그 어떤 불안과 가난도, 앞날의 불투명한 전망도 젊음의 빛을 가리지는 못한다. 그림이 담고 있는 풍경은 젊음의 영원한 빛이다. 화가는 마음 먹기에 따라서 삶은 언제나 축제일 수 있다고 말해주는 듯하다. 초여름의 싱그러운 햇살처럼, 화폭 속에서 환히 웃고 있는 젊은이들처럼 말이다.

보트 파티에서의 오찬,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1881년, 캔버스에 유채, 129.5x172.7cm, 필립스미술관, 워싱턴 D.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