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BK 테마

타인의 생각

상상과
가장 가까운 순간,

우리는

글 · 정혜윤 작가

우리가 상상하는 장면은 우리가 원하는 삶이다.
쉬고 싶고, 행복하고 싶고, 편안하고 싶은 순간들.
하지만 진짜 쉬고 있을 때, 행복할 때, 편안할 때 우리는 어떤 마음가짐일까?
상상 속 장면들을 놓치지 않는 방법에 대해 알아보자.

  • #마음가짐
  • #시레토코
  • #온전한기쁨

기다리던 시레토코와의 조우

기억할 수도 없는 아주 오래전부터 나는 일본 홋카이도 시레토코에 홀려있었다. 그 고장을 설명하는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시레토코에는 아무르 강의 유빙이 흘러온다.” 아무르 강과 유빙. 이 두 단어 모두 신비롭고 멀게 느껴졌다. 소문에 따르면 유빙에는 모든 신비로운 이야기에 덧붙여지는 사랑 이야기가 있다. 유빙에 일몰이 비치면 유빙은 보라색, 푸른색으로 물들고 그 유빙 앞에서 사랑을 맹세한 연인들은 결코 사랑 때문에 힘든 일을 겪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레토코도 변치 않는 사랑이라는 위태로운 약속의 장소였다. 시레토코는 어떤 곳일지 상상만 하고 살다가 시레토코의 수의사 다케마즈 미노루가 쓴 <숲 속 수의사의 자연일기>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다케마즈 미노루의 책에도 유빙 이야기가 나온다. 책에 따르면 해가 떨어지면 바닷가는 푸른색 유빙들로 덮인 사파이어의 바닷가가 된다. 다케마즈 미노루의 책을 읽으니 더욱 시레토코에 가보고 싶었다. 2017년 여름, 나는 마침내 시레토코로 향했다.

시레토코의 첫인상은 이랬다. 외롭고 쓸쓸한 사람이 “나 여기 살아볼까?”라고 할 만한 곳. 시레토코는 고독이 환영받을 만한 곳,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든 여전히 자기만의 시간과 이야기를 가진 호젓한 곳이었다. 내가 묵던 호텔에서는 창문만 열면 바로 오호츠크해를 볼 수 있었다. 여름이라서 유빙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책 때문에 겨울의 유빙을 상상해 볼 수 있었다. 밤에 본 오호츠크해는 검고도 한없이 깊은 푸른색이었다.

Imagination

시레토코의 첫인상은 이랬다. 외롭고 쓸쓸한 사람이 “나 여기 살아볼까?”라고 할 만한 곳.


지구의 삶을 진정으로 사랑할 때

호텔 8층에 있는 온천장에서 온천을 즐길 때는 눈앞에 쉴 새 없이 제비와 갈매기가 날아다녔다. 나는 고래를 보러 가기도 하고 맥주를 마시러 가기도 하고 일몰을 보러 가기도 했지만 주로 바다와 새를 바라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많은 것을 모르는 나지만 새들이 아름답다는 것만은 안다. 나는 내가 새로 태어나는 것이 더 나았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세상 위를 약간만 높게, 약간만 자유롭게 떠다니고 싶다. 어쨌든 그 계절에 하늘을 배경으로 일어나는 일들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각자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들을 하는 중인 생명들의 에너지로 가득했다. 나는 지구에서의 삶을 좋아한다. 지구는 매일 매일 내게 푸른 하늘과 커다란 구름을 안겨준다.

그날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진짜 아름답다.” 그다음에 자조 섞인 한 문장이 잽싸게 따라붙었다. “나는 어제도 오늘도 별 볼 일 없는 생각이나 하고 있는데 세상은 아름답기도 하네.” 다음 순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저물어가는 하루 속에서, 설명할 수 없는 애수에 젖어서, 쓸쓸한 기분으로 맥주나 한잔하러 가면 딱 좋을 순간에, 잘 준비를 하러 날아가는 제비를 향해 팔을 길게 뻗는데 느닷없는 말 한마디가 내 입 밖으로 튀어나오고 말았다.

“나도 좋은 일 좀 해야겠어!” 내가 말하고도 내가 놀랐다.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했나 따져보니 떠오르는 일이 있었다. 그날 낮에 본 갈매기 한마리다. 다른 갈매기는 모두 날개가 두 개인데 그 갈매기만 날개가 하나였다. 태어날 때부터 없었을까? 다쳤을까? 혹시 동물보호센터에 데려다줘야 할까? 야생에서 무사히 살 수 있을까? 그 날개가 하나뿐인 갈매기가 나에게 좋은 일 좀 해보라고 시킨 것 같았다.

나는 지구에서의 삶을 좋아한다. 지구는 매일 매일 내게 푸른 하늘과 커다란 구름을 안겨준다.


세스 노터봄을 만나고 달라진 삶

나는 실제로 좋은 일을 하려고 했다. 내가 시레토코에 다녀온 이듬해부터 기후 위기에 관한 이야기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는 기후 위기와 여행을 한 번도 연결 지어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비행기가 어마어마한 이산화탄소를 배출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여행이 점점 덜 즐겁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것을 보러 여행을 가는데 그것이 아름다움을 파괴하는 일이라면 어쩌면 좋단 말인가. “좋은 일 좀 하고 살아야지!”라는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마음이 무겁던 나는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더 이상 비행기를 타지 않기로 엄청난 결심을 했다. 물론 여행은 가고 싶었다. 여전히 다른 곳이 궁금했다. 여전히 보지 못한 것이 많았다. 그래서 여행서를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세스 노터봄이라는 놀라운 여행작가를 발견했다. 내가 처음 읽은 세스 노터봄의 책은 <산티아고 가는 길>이라는 책이었다. 그는 그 책에서 자신의 시간을 지난 시대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에 아낌없이 쓴다. 그는 쓰러져가는 성당의 돌기둥, 닳아빠진 돌계단 하나만 봐도 이야기를 구름처럼 일어나게 하는 초능력자다. 뭘 말하든 말하는 것보다 수천 배는 더 알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나에게 이상적인 인간이다. 내가 백 번쯤 죽었다 깨어나면 어쩌면 세스 노터봄처럼 볼 수 있을까? 한 번 사는 삶으로는 불가능했다. 차라리 세스 노터봄이 영원히 스페인을 걷는 것을 꿈꾸는 것이 낫다.


곱씹을수록 모든 순간이 즐거움이다

나는 세스 노터봄에 굶주렸다. 그래서 그의 다른 책 <유목민 호텔>이라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 내용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어느 잡지사에서 “노터봄 씨, 당신에게 가장 이상적인 호텔은 어디예요?”라는 질문을 던진 것이다. 그 질문을 받은 노터봄은 우선 자신이 가본 적 있는, 하지만 나로서는 들어본 적도 없는 지역의 호텔 이름들을 쭉 나열했다. 그가 이상적인 호텔로 고른 것은 현실의 호텔이 아니었다. 그의 이상적인 호텔은 텔레비전이 없고 소음이 없고 옆방에서 사랑을 나누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1층 정원에는 도마뱀붙이(도마뱀붙이는 행운의 상징이다)가 있어야 하고 3층에는 갈라시아 지방의 바람이 불어야 한다(나는 노터봄이 갈라시아 지방의 바람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러니까 그의 이상적인 호텔은 실제로 존재해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호텔 10으로 검색되는 호텔이 아니라 자신이 싫어하는 것은 빼고 좋아하는 것을 잔뜩 가져다 붙이는 일종의 상상 속 호텔이었던 셈이다. 나는 ‘이상적인 호텔’이라는 개념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리고 나의 이상적인 호텔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기 시작했다. 나의 이상적인 호텔은 여름밤의 은하수를 볼 수 있을 만큼 주위는 어두워야 하고 창문 밖으로는 고래가 지나가는 것이 보여야 하고 걷다 보면 바다가 나와야 하고 제비(제비는 나의 행운의 상징이다)가 날아야 하고…. 그런데 상상할수록 이상적인 호텔의 세부사항은 끝이 없었다. 나는 눈 내리는 야외 온천에 몸을 담그는 즐거움을 알고 여름에 반딧불이를 따라 걷는 즐거움을 알고,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빛나는 올리브 숲을 걷는 즐거움을 알고, 겨울 시금치를 먹는 즐거움, 해풍 맞은 귤을 먹는 즐거움, 텃밭에서 갓 솎아낸 상추를 먹는 즐거움, 두꺼운 겨울옷을 벗어 던지는 즐거움, 좋은 이야기를 듣는 즐거움, 기발한 농담을 찾아내고 그것을 듣고 웃을 사람을 떠올리는 즐거움을 안다. 그뿐인가? 하루의 노동을 끝내고 깨끗이 샤워하는 즐거움, 손을 맞잡는 즐거움, 인간의 에고가 없는 세계를 보는 즐거움,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아름다움을 맛보는 즐거움, 이 모든 즐거움을 안다. 결국 이상적인 호텔은 완성되지 못했다. 삶에 기쁨을 주는 것을 내가 느끼려고만 한다면 거의 무한해 보였다.

Aesthetics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아름다움을 맛보는 즐거움, 이 모든 즐거움을 안다.


최선을 다할 때 온전한 기쁨을 만나다

생각할수록 내게 이 호텔은 연장된 정체성의 일부로 보였다. 지구에서 무엇을 사랑하는가, 어디에서 기쁨을 느끼는가를 빼고 자기 자신을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이상적인 호텔에 대한 상상에서 출발해서 이상적인 자아, 이상적인 삶을 상상하게 되었다. 더 잘 보고 더 잘 듣고 더 잘 느끼고 더 강렬하게 경험하는 나를 상상해 보게 되었다. 상상뿐일지라도 너무 기뻤다. 더 잘 듣고, 더 잘 보고, 더 잘 느끼고, 더 강렬하게 경험하는 것, 그리고 그것들을 이야기 안에서 살아있게 만드는 것. 이것이 내가 이 지상에서 최선의 삶을 사는 방법일 것 같았다. 이렇게 사는 삶이 기쁨이고 의미이고 보람이고 사는 것 같이 사는 기분일 것 같았다. 나는 상상력을 이렇게 정의 내려본다. ‘장차 될 모습에 영향을 미치는 힘’. 그래서 ‘점점 더 기쁨을 잘 아는 사람으로 변신하고 싶다.’, ‘기쁨을 만들 수도 있는 사람으로 변신하고 싶다.’ 이런 상상을 정말 많이 한다.

Intact

  • 글. 정혜윤 작가 마술적 저널리즘을 꿈꾸는 라디오 피디로 현재 CBS 라디오 프로듀서다. 다큐멘터리 ‘자살률의 비밀’로 한국피디대상을 받았다. 저서로는 『삶을 바꾸는 책 읽기』, 『인생의 일요일들』, 『뜻밖의 좋은 일』, 『아무튼, 메모』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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