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은 언제나 소박한 법
오랫동안 글쓰기 수업을 진행해 오고 있다. 요즘은 특이하게도 읽는 사람보다 쓰고자 하는 사람이 늘어서 글쓰기를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도 많다. 해가 바뀔 때마다 운동하기, 금연 및 금주하기처럼 ‘꾸준히 글쓰기’를 다짐하는 이들이 많지만, 여느 새해 소원처럼 작심삼일로 끝나는 일도 잦다.
호기롭게 글쓰기 수업을 신청하고 나서, 수업이 거듭될수록 글 쓰는 일을 더 힘들어하는 수강생들을 자주 봐 왔다. 읽은 글과 써본 글이 늘어나면 글쓰기에 더 익숙해지는 게 자연스러운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내 글은 물론, 글쓰기 전반에 대한 생각이 많아져 점점 몸이 움츠러든다.
생각은 행동을 주저하게 만들고, 고민하게 만들며, 결국 아무것도 쓰지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글을 열심히 쓰기 위해 듣기 시작한 수업을 통해 글쓰기를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지…. 끝까지 해내지 못한 자신에게 실망하는 일이 가장 힘들 것이다. ‘또 작심삼일이 돼 버렸구나’하며 절망하는 괴로움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 이들에게 내가 하는 말이 있다. ‘모든 글은 한 문장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어떤 대문호의 작품도 한 문장으로 시작했다. 하루에 한 문장만 써도 한 달이면 A4용지 한 장이 채워지고 일 년이면 12장이 모인다. 그렇게 5년을 쓰면 책 한 권 분량의 원고가 쌓인다. 머리로는 다 아는 사실인데 실천하기는 왜 그리 어려울까. 우리는 처음부터 너무 잘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완벽한 문장을 쓰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Beginning
모든 글은 한 문장으로부터 시작된다.그 어떤 대문호의 작품도 한 문장으로 시작했다
즐기려 한 일이 숙제가 될 때
사실은 내가 그런 사람이다. 나는 취미가 없다. 즐겁자고 하는 취미생활에 죽자고 덤벼드는 성미여서다. 즐기기 위해 달리기를 시작했으면서도 실력이 늘지 않는다며 관둬버렸다. 재미로 영화를 보기 시작했으면서, 좋다는 영화는 무조건 정주행해야 속이 풀렸다. 독서도 마찬가지다.
좋아하는 작가가 생기면 그의 전작을 밤새도록 다 읽지만, 흥미가 떨어지면 쳐다도 보지 않는다. 이런 식의 과몰입 성향은 나를 취미로부터 멀찌감치 떨어뜨려 놓았다. 뭘 해도 제대로 해야 한다는 생각, 제대로 안할 거면 시작도 안 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 아무것도 즐길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다. 결국 나는 해야만 하는 일만 주야장천 하다가 일중독이 되어 번아웃을 겪게 되는데….
현재가 아닌 ‘지금’을 살기
2007년에 첫 책을 낸 후 일 년에 한 권씩의 책을 내왔다. 책 쓰는 일로 먹고살기로 결심하고 나서 매년 한 권의 책을 세상에 내놓기로 다짐했다. 올해로 이 일을 한지 열여덟 해. 그런데 저작은 열다섯 권이다. 나머지 세 권은 어디로 갔을까. 중간중간 무기력과 우울증, 번아웃을 경험하며 원고 작업을 하지 못한 탓이다. 당시에는 글을 읽을 수도, 쓸 수도 없었으며, 하고 싶은 일도, 먹고 싶은 것도 없었다. 그저 방바닥과 하나가 되어 종일 TV만 보거나 혼자 술만 마셨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만나도 딱히 할 이야기가 없었고,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지도 않았다. 툭하면 눈물이 났고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이 나를 짓눌렀다. 현재를 살고 있으면서도 ‘지금’을 살지 못했다.
그 시간이 길어지면서, 만날 이렇게 누워만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나 자신과 약속했다. 첫 번째는 그게 무엇이든 나를 즐겁게 하는 일만 할 것(과연 그런 게 생길까 싶었다), 두 번째는 건강 및 영양과 관계없이 먹고 싶은 것만 먹을 것(세상에 그런 음식이 있을까 의문이었다), 세 번째는 억지로라도 일과 멀어질 것(일 중독자인 나에게 가장 어려운 미션이었다). 늘 생산적인 일만 생각하던 삶의 고무줄이 끊어진 김에 잠시 그대로 있어 보자 싶어 생각해낸 것들이었다.
책임감에서 시작되는 성취감
만화책을 읽고 싶으면 만화책만 읽고, 그마저 읽고 싶지 않으면 때려치웠다. 종일 누워있다가 밤이 되어 집 근처를 한 바퀴 산책하고 싶으면 하루에 딱 그것만 했다. 딸기가 너무 먹고 싶을 땐 밥 대신 딸기만 먹었다. 줄줄이 신작을 발표하는 작가들의 소식을 멀리하고, 나에겐 휴식이 더 필요하다고 되뇌었다. 하지만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고, 나는 쉬는 일에도 ‘잘 쉬어야 한다’라는 강박을 느끼며 잘 쉬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코미디를 왜 보나, 내 삶이 코미디인데. 남들에게는 희극일지 몰라도 나에겐 비극이었다. 코미디의 포인트는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일 테지만.
그러던 어느 날, 너무 무료해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날 있었던 일, 느꼈던 감정을 한 줄 한 줄 써내려 가다 보니 짧게 끝내려고 했던 글이 종이 한 장이, 어떨 땐 서너 장이 됐다. 빈 수첩에 아무 말이나 쏟아놓으며 울기도 했고, 분노가 올라오기도 했으며, 가슴이 후련해지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느낀 것은 나는 성취를 위해 나의 고단함과 외로움을 전혀 받아주지 않고 살았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눈앞의 감독관처럼 “열심히만 해, 그러면 다 해결돼!”라며 채찍질만 일삼아왔다는 걸 깨달았다. 그걸 알고 나니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 심리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심리상담을 받으면서 내가 인간관계에 지나치게 의존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외로움을 많이 타는 성격임에도 끝까지 강한 척을 하며 살아왔기에 가까운 사람에게는 지나치게 기대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 사이가 처음에는 좋았다가도 점점 부담스러워지는 이유, 나는 물론 상대 역시 자꾸 무거워지는 이유는 서로에게 너무 깊이 관여하고 의존하기 때문이었다. 그걸 알고 나서 자립이라는 단어를 마음에 새기게 되었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말이다. 이제껏 혼자서 먹고살고 열심히 일하면 자립한 사람이라 믿어온 터라 이제 와서 어떻게 자립심을 키워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그때 나에게 새롭게 다가온 단어는 ‘책임감’이었다.
얼핏 누구보다 책임감 있게 살아온 사람처럼 보였지만, 나는 책임감이 없었다. 내 몸 하나 건사하는 것만으로도 빠듯하다며 피할 수 있는 일들은 요령 좋게 피하며 살아왔다. 혼자 글을 쓰며 사는 삶 역시 나의 회피성 기제가 선택한 직업이다. 위치에 맞게 어떻게 처신하는지가 중요한 조직 생활에는 영 자신 없고, 매일 출근할 의지도 없으니 ‘집에서 혼자 일하는 게 맞아’라며 우겨왔을 뿐이다. 나에게 이게 잘 맞는다는 말로, 다른 것은 하지 못하는 사실을 숨기면서.
Obligation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고,나는 쉬는 일에도 ‘잘 쉬어야 한다’라는강박을 느끼며 잘 쉬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일상을 뒤집는 작은 변화
내 안에 책임감 이슈가 자라나면서 내가 이제껏 무엇을 책임지며 살아왔는지 되돌아보게 되었다. 그러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책임지는 일을 적극적으로 피함으로써 삶을 더 어렵게 만들어 온 건 아닐까. 변화가 두려워 늘 같은 상황에 머문 채 과거를 되새김질하고 미래를 불안해하며 지내온 건 아닐까. 만약 나에게 책임질 존재가 생긴다면 내 삶은 어떤 모습이 될까. 그런 이유로 강제적으로(!) 책임질 대상을 만들었다. 억지로라도 책임감을 기를 수 있는 방법, 바로 유기견을 입양한 것이다.
충동적으로 가족이 된 개 한 마리는 내 일상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무슨 말을 해도 통하지 않고, 툭하면 짖거나 으르렁거리고, 가끔은 나를 물려고 하는 작은 생명 앞에서 깨달았다. 그동안 나는 입력하면 반드시 결괏값이 나오는 일에만 매진해 왔다는 것을 말이다. 열심히 일하면 인정받고, 글을 꾸준히 쓰면 책이 만들어지고, 사람에게 잘하면 그 사람은 내 편이 되는 것처럼 수학 공식에 대입하듯 인생을 살아왔다는 것을. 그래서 취미로 시작한 일이 성에 안 차면 금방 관두고, 원했던 일들이 제대로 완성될 것 같지 않으면 포기하고, 잘될 것 같은 일에만 열정을 다하는 일로 책임감 있게 산다고 착각했다는 것을.
작은 강아지 한 마리는 내가 이제껏 살아가던 방식을 전면적으로 다시 보게 만들었다. 새로운 변화에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열심히 노력해도 안 되는 게 있다는 것. 그리고 패배감을 통해 배우는 것도 있다는 것. 아무리 애써도 개는 나를 따르지 않았고, 잘해주려고 하는 데도 이빨을 드러내고, 늘 같이 있는 나보다 처음 본 사람 앞에서 좋다고 꼬리를 흔들었다. 개와 적응하는 일은 나의 모자람을 대면하는 일의 연속이었다.
Achievement
잘하지 못할 것 같아도 일단 하기.그리고 꾸준히 해보기.그 끝에는 어떤 모양으로든 성취가 기다린다
잘 쉬는 것도 잘 사는 방법임을
어느새 개와 함께 산 지 4년이 됐다. 여전히 나는 모르는 게 많지만 지난 시간을 통해 조금 달라진 게 있다. 이제는 안 되는 일이 있어도 전처럼 아등바등하지 않는다. 머리가 복잡할 때, 예전에는 밤새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다면 이제는 산책줄을 잡고 일단 밖으로 나간다. 늘 과거와 미래에 저당 잡힌 채 살던 나는 개와 가족이 되고 나서부터 늘 현재를 산다. 지금이 아니면 누리지 못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 지를 개를 통해 알아간다.
얼마 전에도 또 한 번의 번아웃이 찾아왔다. 이번에는 상태가 더 좋지 않아 우울증도 같이 겪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전처럼 허둥대지 않았다. 글이 써지지 않으면 푹 쉬었다가 일단 한 문장만 쓰기로 했다. 몸이 움직여지지 않아도 산책줄을 끌고 개랑 십 분만 걷다 오자 마음먹었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힘들 때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았다. 그렇게 몇 달을 보내니 내 안에 싹 메말랐다고 생각했던 글에 대한 열정의 싹이 돋기 시작했다. 한 줄 일기로 시작했던 글은 글 한 편이 되었고 책 한 권 분량으로 이어져, 어느새 새 책 출간을 준비하고 있다. 모든 성취는 일단 해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 고민이 될 땐 생각을 접고 일단 몸을 움직일 것. 몇 번의 번아웃과 나의 사랑하는 개가 알려준 인생의 진리다.
며칠 전, 또 하나의 글쓰기 수업을 종강했다. 마지막 시간에 수강생들에게 말했다. “글을 잘 쓰고 싶으시죠? 일단 잘 쓰고 싶은 마음을 버리면 어떨까요? 대신, 매일 한 문장이라도 쓰는 거지요. 잘 쓰는 사람은 매일쓰는 사람을 이길 수 없습니다. 매일 쓰는 사람이 잘 쓰는 사람보다 더 잘쓰는 사람이거든요.” 잘하지 못할 것 같아도 일단 하기. 그리고 꾸준히 해보기. 그 끝에는 어떤 모양으로든 성취가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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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김신회 작가 작가이자 1인 출판사 『여름사람』 대표. <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 <아무튼, 여름> 등을 썼고, <나의 누수 일지>를 쓰고 만들었다. 다양한 매체를 통해 글쓰기 강연을 하고, 에세이 쓰기를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