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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효율을 따지게 된 심리
영화 대신 쇼츠가 뜨는
‘시성비’의 시대

글 · 한애란 동아일보 기자

가격 대비 성능을 일컫는 ‘가성비’. 십수 년 전부터 널리 쓰여 이제 익숙한 신조어다. 그럼 ‘시(時)성비’는 어떤가. 시간 대비 성능을 추구하는 시성비 현상이 어느새 우리 일상으로 자리잡고 있다.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

넷플릭스나 유튜브 콘텐츠를 1.2배속, 1.5배속으로 시청한 적이 있나? 보다가 중간 부분을 건너뛴 경험은? 아마 ‘그렇다’라는 답이 많을 것이다. 지난해 엠브레인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69.9%가 ‘영상 콘텐츠를 빨리 감기로 시청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사람들은 왜 빨리 감기를 할까. 일본 칼럼니스트 ‘이나다도요시’는 2022년 낸 저서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에서 이를 ‘타이파’ 트렌드로 설명했다. 타임 퍼포먼스(Time Performance)의 일본식 줄임말로,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시성비’이다. 유튜브와 넷플릭스의 등장으로 우리가 추가 비용 없이 볼 수 있는 콘텐츠 양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남들과 대화에 끼려면 인기 콘텐츠 내용쯤은 파악해둬야 하지만, 이를 챙겨볼 시간이 모자란다. 세상에 콘텐츠가 넘치는데 가능한 한 효율적으로 많은 걸 보고 싶다는 생각, 즉 시성비를 추구하게 된 이유이다.
디지털화는 소비자에게 유연한 시성비 소비 능력을 선사했다. 음악을 예로 들면, LP판 시절엔 한 앨범에서 곡을 뛰어넘는 것도 어려웠다. CD가 나오면서 곡건너뛰기는 쉬워졌지만, 앨범을 바꾸려면 CD를 갈아 끼워야 했다. 그런데 이제 스트리밍 서비스를 이용하면 곡도, 앨범도, 아티스트도 간단한 터치로 한순간에 바꿀 수 있다.





결말 알고 볼지 말지 정한다

시성비를 추구하는 사람은 크게 둘로 구분된다. 하나는 시간이 정말 없어서, 즉 육아나 직장생활로 너무 바빠서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려는 사람. 다른 하나는 시간에 쫓기진 않지만 ‘일정 시간 안에 더 많은 것을 소비하고 즐기고 싶은’ 사람이다. 전자의 경우, 과거부터 늘 있었고, 새롭지 않다. 주목해야 할 건 후자, 즉 시간이 있는데도 시성비를 추구하는 소비자가 엄청나게 늘고 있는 현상이다.
이런 시성비 소비의 전형은 유튜브에 넘쳐나는 영화·드라마 리뷰 영상이다. 보통 영상의 하이라이트 부분만 따서 자막과 내레이션을 붙여 10분 정도로 정리해 올린다. 특히 ‘결말 포함’이라고 밝힌 리뷰 영상이 꽤 높은 조회수를 올리는 걸 종종 볼 수 있다. 사람들은 리뷰 영상으로 스토리를 파악한 뒤, 재미있겠다는 확신이 들면 드라마를 정주행하기도 한다.
유튜브에서 1분 이내의 짤막한 ‘쇼츠’가 인기를 끄는 것도 비슷한 현상이다. 보통 쇼츠는 일반 동영상의 흥미로운 포인트만 잘라놓은 게 많다. 사람들은 쇼츠가 마음에 들면 그제야 원본 영상까지 클릭해 본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스포일러 소비’이다. 스토리의 중요 사항이나 결말을 미리 알려주는 스포일러는 소비자들이 피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감상의 재미를 해친다고 여겨서다. 하지만 시성비를 추구하는 이들은 이런 스포일러를 오히려 찾아본다.




보통 쇼츠는 일반 동영상의 흥미로운 포인트만 잘라놓은 게 많다.
사람들은 쇼츠가 마음에 들면 그제야 원본 영상까지 클릭해 본다.





손해 보지 않고 싶은 심리

스포일러를 일부러 찾아보는 시성비 소비. 그 알 듯 말 듯한 세계를 이해하려면 일단 가성비와 시성비가 완전히 다른 개념이라는 걸 알아둬야 한다.
가성비는 돈에 여유가 없어서, 한정된 돈을 유익하게 쓰려고 추구하는 것이다. 끼니는 편의점 도시락으로 때우면서 돈을 모아 명품백을 사거나 해외여행을 가는 식이다. 이와 달리 시성비는 시간이 없어서도 아니고, 절약한 시간을 유용하게 쓰기 위한 것도 아니다. 그럼 도대체 무슨 심리일까. 닛세이 기초 연구소의 ‘히로세 료’ 연구원의 저서 「타이파의 경제학」은 이를 아래와 같이 분석했다.
먼저 돈도, 시간도 손해 보지 않으려는 심리이다. 소비자들은 기껏 시간을 들였는데 지루하고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그 시간에 다른 재미있는 걸 소비할 기회를 잃었으니 손해라고 여긴다. 바로 이 점에서 영화를 영화관에서 보는 건 리스크가 매우 큰 일이다. 재미가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영화에 시간과 돈을 모두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영화를 보면서 다른 일(스마트폰 검색 등)을 할 수 없는 데다, 예기치 않은 감정의 기복을 겪어야 한다는 점도 스트레스 요인이다.
그래서 요즘엔 미리 리뷰영상으로 줄거리를 다 알아본 뒤 영화를 볼지 말지를 정한다. 사전 정보 없이 작품을 처음 접하면서 받게 될 감동 따위는 포기하고 말이다. 콘텐츠는 감상의 대상이 아닌 소비의 대상이 되었다.
시성비의 대표 사례로 꼽히는 일본 모바일 독서 앱 ‘플라이어(Flier)’에서도 이런 심리를 엿볼 수 있다. 플라이어는 ‘6시간 걸릴 독서 시간을 10분으로 줄여준다’는 컨셉으로 책을 요약해서 텍스트와 음성으로 제공해준다. 주로 경제·경영 관련 서적이나 직장인을 위한 교양서적을 다루는데, 누적 구독자 수가 110만 명에 달한다. 앱 구독자들은 요약본으로 책 전체 내용을 파악한 뒤 마음에 들면 실제책을 구입한다. 괜찮을지 아닐지 모르는 책에 굳이 6시간이나 들이지 않아도 되니, 후회의 가능성을 크게 줄일 수 있다.




인생은 결국 자신의 주의를 돌리고 시간을 쏟은 것들의 총합이란 뜻이다.
혹시 남들 기준에 얽매여 이리저리 기웃거리느라 시성비를 추구하며
괜히 바쁜 것은 아닌지, 가끔 돌아보면 어떨까.





소비는 목적 아닌 수단

시성비를 추구하는 또 다른 이유는 소비 자체가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를 1.5배속으로, 중간을 건너뛰면서 보는 진짜 목적은 이를 소비(시청)함으로써 즐거움과 감동을 얻으려는 게 아니다. 바로 주위와의 커뮤니케이션, 즉 대화에 낄 수 있도록 ‘영화를 본 상태’가 되기 위해서다. 이들에게 소비는 도구일 뿐이고 ‘소비한 상태가 되는 것’이 목적이다.
결국 ‘남에게 ~한 상태로 인식되고 싶다’는 욕망이 본질이다.「타이파의 경제학」은 이를 숙제에 비유해 설명한다. 우리가 숙제를 하는 목적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숙제로 학력을 높이는 것, 다른 하나는 숙제를 끝낸 상태로 만들어서 선생님에게 혼나지 않는 것. 첫 번째 목적이라면 숙제에 시간이 오래 걸려도 괜찮다. 오히려 오래 걸려야 효과가 좋을 수도 있다. 하지만 후자, 즉 ‘숙제를 끝낸 상태’가 되기 위해서라면, 숙제를 붙잡고 끙끙댈 필요가 없다. 할 수만 있다면 답을 베끼든, 다른 사람이 대신해주든 빨리 끝내는 게 최고다. 바로 이 심리-○○한 상태가 되고 싶다- 때문에 소비자들은 시간 대비 효율을 추구한다.




시성비에 지배되지 않으려면

친구들과의 대화에 끼고 싶어서, SNS에서 지금 핫한 유행을 뒤쫓고 싶어서. 이런 이유로 요즘 사람들은 너무 많은 것을 열심히 소비해야 한다. 게다가 각종 광고와 미디어의 정보들은 더 많은 콘텐츠를 소비하라고 부추긴다. 이것도 봐야하고, 저것도 해야 하고. 마치 주어진 미션을 달성하듯 바쁘다. 그래서 더욱더 시성비를 추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분명 2024년의 현실을 보여주는 트렌드이다. 기업이나 콘텐츠 창작자라면 이를 받아들이고 맞춰나가는 수밖에 없다. 소비자가 가진 시간을 두고 쟁탈전을 벌여야만 하는 운명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기업들은 고객마다 생각하는 ‘시간의 가치’가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제품과 서비스에 반영해야 한다. 같은 콘텐츠라도 시간을 최소로만 쓰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고, 차분히 마주하는 시간에서 가치를 얻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재생속도를 8단계(0.25배속부터 2배속까지)로 나눈 유튜브가 바로 그런 사례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생각이 든다. 다른 사람을 의식해 바쁘게 소비하고는 있는데, 과연 그것이 정말 꼭 필요한 소비일까. 정작 타인은 고민할 필요 없는, 본인을 위한 주체적인 소비를 할 시간은 잃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SNS에 자랑하거나 대화 소재로 삼을 수 없는 소비라도, 자신이 거기서 가치를 찾아낸다면 사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남들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자신에겐 큰 정신적 만족감을 줄 수도 있다. 영국 가디언 기자인 ‘올리버 버크먼’은 저서 「4000주」에서 인생이 겨우 4000주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면서 그 시간 동안 ‘무엇에 주의를 기울이냐에 따라 그 사람 인생이 정해진다’고 말한다. 인생은 결국 자신의 주의를 돌리고 시간을 쏟은 것들의 총합이란 뜻이다. 혹시 남들 기준에 얽매여 이리저리 기웃거리느라 시성비를 추구하며 괜히 바쁜 것은 아닌지, 가끔 돌아보면 어떨까.




Profile.
글. 한애란 22년 차 기자. 동아일보에서 글로벌 경제·산업 트렌드를 다루는 ‘딥다이브’ 뉴스레터를 발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