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 지금에나 굳건한 무하의 인기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20여 년간 유럽에서 유행한 ‘아르누보’와 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여성적인 곡선과 식물의 넝쿨, 선을 강조하는 드로잉 등 곡선과 장식을 많이 이용한 아르누보 스타일은 프랑스, 독일, 스코틀랜드, 보헤미아, 스페인 등 전 유럽에서 활발하게 등장한 20세기 초반의 장식 미학이었다. 아르누보는 회화가 아니라 장식에서 나타난 경향이었기 때문에 보석이나 가구디자인, 실내장식, 건축, 일러스트 등 다양한 분야에 응용될 수 있었다. 지금 보기에는 괴이할 정도로 장식 과잉인 이 스타일에 왜 20세기 초의 유럽은 열렬한 호응을 보냈을까? 세기말과 세기초를 관통하던 긴장감에서 해방된 대중은 어떤 파격적인 새로움을 원하고 있었다. 신흥 부르주아들은 아르누보 스타일의 가구와 실내장식에 둘러싸여서 구시대의 귀족이 된 듯한 느낌을 받곤 했다.
아르누보는 파리, 빈, 바르셀로나 등지에서 가장 번성했다. 파리의 아르누보를 이끈 이가 바로 알폰소 무하다. 그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무하는 프랑스가 아니라 모라비아, 현 체코 공화국 출신이다. 무하는 20대 후반인 1887년, 화가를 꿈꾸며 빈과 뮌헨을 거쳐 파리 유학길에 오른 시골 젊은이였다. 그는 파리에서 공부하는 틈틈이 일러스트를 그려서 조금씩 이름을 알렸다. 1894년, 크리스마스이브에도 무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동료들은 모두 크리스마스를 보내러 파리나 시골의 집으로 돌아갔지만 먼 동유럽에서 온 무하는 따로 갈 데가 없었다. 그런 무하에게 인쇄소에서 다급히 연락이 왔다. 새해 첫날 파리 거리에 붙일 르네상스 극장의 연극 ‘지스몽다’ 포스터가 필요하다는 전언이었다. 연극의 주연은 당대 최고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였다.
당시 무하를 둘러싼 상황은 이러했다. 19세기 후반부터 석판화 인쇄 기술의 발달로 새로운 공연이나 신제품, 가게 등을 홍보하기 위한 포스터 제작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1889년 문을 연 카바레 ‘물랭 루즈’는 툴루즈-로트렉의 감각적인 포스터에 힘입어 단숨에 파리를 대표하는 카바레로 부상했다. 당시의 기술로는 다섯 가지 컬러의 포스터를 시간당 1만 매의 속도로 인쇄할 수 있었다고 한다. 파리 중심가에는 담배와 술, 자전거 등 다양한 신제품과 발레, 연극 홍보 포스터들이 날마다 나붙었다. 이런 와중에 새 연극의 포스터가 급히 필요해져 무명의 일러스트레이터 무하에게 그 의뢰가 들어온 것이다.
무하는 ‘지스몽다’의 주인공인 사라 베르나르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포스터를 그렸다. 그는 비잔티움 모자이크를 연상시키는 화려한 무늬를 꼼꼼하게 그리고 베르나르의 머리 타래를 그림 가장자리의 장식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그리스 정교의 전통이 남아 있는 모라비아에서 자란 무하에게 비잔틴식 의상과 머리 모양은 그리 낯설지 않은 것이었다. 인쇄업자는 너무 낯선 그림이라며 베르나르가 이 포스터를 거절할 게 분명하다고 말했다. 무하는 낙담했지만 정작 극장에서 온 소식은 예상과는 완전히 달랐다. 베르나르가 이 그림을 그린 화가와 전속 계약을 맺고 싶다고 요청해 온 것이었다. 당시 베르나르는 50대로 접어들며 여배우로서 사양세에 들어선 상황이었다. 포스터든, 파격적인 연극이든 간에 그녀에게는 자신의 이미지를 일신할 계기가 필요했다. 베르나르는 무하의 그림을 통해 영원히 늙지 않는 여신, 또는 동방의 이국적인 요정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무하는 6년간 베르나르의 신작 포스터를 독점적으로 그리는 계약을 맺었다. 이 계약기간 동안 ‘카멜리아’,‘토스카’, ‘사마리탄의 여인’, ‘햄릿’ 등 베르나르 가 주연한 포스터들이 무하의 그림으로 잇따라 제작되었다. 나붙는 포스터마다 큰 화제가 되면서 무하는 파리의 대표적 일러스트레이터로 발돋움하게 된다.
무하의 여성들이 살로메 스타일의 ‘팜 파탈’, 즉 남성을 위협하는 무서운 여성들이 아니란 점도 광고주들이 무하를 환영한 중요한 요인이었다. 무하의 일러스트 속 여성들은 하나같이 아름답지만 정숙해 보이는 여인들이다. 이 때문에 무하의 광고디자인은 술과 담배처럼 남성 소비자들에게 어필해야 하는 상품에서 특히 각광받았다. 한 마디로 상업성과 예술이 절묘하게 결합하는 지점에 무하의 일러스트가 있었다. 이러한 복합적인 스타일은 변방에서 태어나 예술의 중심으로 진입한 무하의 삶과 분명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파리와 미국에서 큰 인기를 얻었던 무하는 인생의 만년을 막 독립한 체코슬로바키아로 돌아와 보냈다. 그는 신생 국가인 체코슬로바키아의 우표와 군복을 디자인하고 보헤미아의 탄생 설화를 그림으로 표현한 대규모 연작 ‘슬라브 서사시’를 그리기도 했다. 프라하에는 무하의 천장화로 장식된 프라하 시청사 등 그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건물들이 여럿 남아 있다. 그림이나 일러스트, 실내디자인 등 장르를 막론하고 무하의 작품은 화려하고 풍요로운 장식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이국적인 작품들에서 우리는 1차 대전 이전의 유럽, 고상하고 우아하며 기품이 넘치던 시대인 ‘벨 에포크(Belle Epoque)’의 추억을 자연스레떠올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