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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K 컬쳐

발길 닿는 길(해외편)

절벽 위,
푸른 에게해의 골목을 걷다

그리스 산토리니

글 · 사진 서영진 
그리스 산토리니는 푸른 로망의 섬이다. 흰 담장, 파란 지붕의 골목을 걷는 것만으로도 행복감에 빠져든다. 코발트빛 에게해와 화산이 빚어낸 땅은 발끝을 추억으로 물들인다.

에게해를 바라보는 교회당과 절벽

절벽 위 마을, 피라~이아 트레킹

산토리니는 에게해의 400여 개 섬 중 단연 매혹적이다. 흰 담벽과 자갈로 치장된 골목길, 푸른색과 감색 지붕의 교회당은 에게해와 색의 조화를 이룬다. 섬의 윤곽은 영화, 엽서, 드라마가 연출한 상상과 소문보다 선명하다. 고대 키클라데스 제도의 화산섬은 눈을 감아도 지워지지 않는 아득한 장면을 지녔다.

산토리니의 대표마을이 ‘피라’와 ‘이아’다. 두 마을은 초승달 모양의 섬 서쪽 절벽 위에 들어서 있다. 옛 항구를 지닌 피라는 섬 주민들의 오랜 터전이었고, 이아는 석양에 물든 풍경이 눈부시다.

휴양객들이 발코니 수영장에서 망중한을 즐길 때, 트레킹 마니아들은 피라와 이아 마을 사이를 걷는다. 에게해와 나란히 이어지는 하이킹 코스는 약 12㎞, 3시간이 걸린다. 마을 골목을 기웃거리고 전망대에서 바다에 취하는 시간이 어우러지면 반나절이 꼬박 소요된다. 산토리니를 걷는 여행자들은 그리스 전통 레스토랑인 타베르나에서 커피 한잔 마시고, 파란 대문 계단에 걸터앉아 휴식을 취하며 ‘빛에 씻긴 섬’을 향유한다.

산토리니를 지금의 초승달 모양으로 만든 것은 3600년 전 미노아 문명이 절정일 때 발생한 화산폭발이었다. 피라의 흰 가옥들은 화산이 빚어낸 칼데라의 정상 부위에 세워졌다.

트레킹은 피라의 중심 테토코풀루 광장에서 시작한다. 광장 주변에 그리스 식당과 가게들이 몰려 있고, 아침에는 이곳 주민들이 갓 잡은 생선을 내다 판다. 피라는 전 세계 관광객들이 몰려들지만 정겨운 사람냄새가 남은 곳이다.

피라의 옛 항구 방향으로 가는 길은 골목들이 미로처럼 늘어섰다. 고고학 박물관과 클럽으로 흥청거리는 에리트루 스타부르 거리는 한낮에 한적한 모습이다. 고대 그리스 공예품을 판매하는 이파판티스 거리, 보석가게들이 즐비한 골드 스트리트도 빛의 추임새를 더한다.

절벽 위 산토리니의 흰 가옥들
옛 항구와 연결되는 계단과 당나귀


흰 담장, 푸른 대문으로 치장된 골목

옛 항구로 내려서는 계단에는 당나귀들이 레트로 감성의 소재가 된다. 케이블카가 건립됐지만 당나귀는 아직도 항구의 가파른 경사면을 오르는데 귀하게 쓰인다. 최근에는 산토리니 시장이 동물보호를 위해 당나귀 탑승을 자제해 줄 것을 관광객들에게 요청한 상황이다. 케이블카 승강장을 벗어나야 길은 비로소 번잡함을 덜어낸다.

피라를 벗어나 피로스테파니, 이메로비글리 마을로 연결되는 코스는 호흡이 더디게 흐른다. 에게해의 하얀 집들은 한적함 속에서 빛을 발한다. 피로스테파니의 가옥들은 해발 300m 높이에 들어서 있다. 좁은 골목길을 채운 집들은 아담한 문과 창이 제각각이다. 파란 대문을 열면 낮은 카페와 갤러리가 담겨 있다. 부겐빌리아 꽃이 핀 계단에 걸터앉아 ‘블루, 화이트, 레드’의 눈부신 변주만 감상해도 시간은 파도처럼 흘러간다.

에게해는 숱한 문명의 요람이었고 바다는 자양분이었다. 미노스, 이오니아, 시칠리아인들이 바닷가에 도시를 세웠고 산토리니에서는 고대 키클라데스 문명이 번영했다. 성 니콜라스 수도원, 성 아나스타시오스 교회 등은 이멜로비글리 인근에서 만나는 유적들이다. 돔과 세 개의 종이 매달린 교회 외관은 키클라데스 건축의 대표적인 양식이다.

절벽 꼭대기의 이메로비글리 마을 전망대에 오르면 트레킹 코스가 한눈에 담긴다. 남쪽으로 피라, 북쪽으로 이아마을이 아슬아슬 매달려 있다. 이아 마을에서 시작된 칼데라 능선은 피라를 지나 남쪽 끝인 ‘아크로티리’ 곶까지 18㎞ 펼쳐진다.

이멜로비글리의 절벽 아래에는 ‘스카로스 록’이 위치했다. 산토리니는 로마, 베네치아,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은 과거를 지녔고 스카로스 록은 바닷가 요새 역할을 했다.

푸른 바다 너머 산토리니의 부속 섬들 주변에는 범선과 유람선들이 떠 있다. 네아 카메니, 팔레 아카메니 섬은 산토리니의 화산지형을 고스란히 담아낸 곳이다. 네아 카메니에서는 분화구까지 화산 트레킹이 가능하고, 팔레아 카메니 섬은 유황온천수에서 헤엄을 칠 수 있다.

이아의 황홀한 일몰과 풍차


화산섬 끝자락, 황홀한 석양의 ‘이아’

이멜로비글리를 지나면 길은 황량해진다. 하얀 담장이 끝나고 잡목과 거친 돌벽, 붉은 흙길이 이어진다. 말 없는 바다와 이아로 향하는 찻길만이 묵묵한 동행이 된다. 걷기 여행자들의 흔적도 드물다.

성모승천 예배당을 만나면 서쪽으로 바다가 열리고, 동쪽으로 평지가 탁 트인 광경이 펼쳐진다. 거친 흙길의 끝자락에 이아마을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아마을은 산토리니의 북쪽 끝 절벽 위에 외롭게 들어서 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이아는 작은 어촌 마을이었다. 큰 가옥들은 선주의 소유였고, 선원들은 석회암 동굴에 집을 짓고 살기도 했다. 방과 주방이 분리된 아치형 동굴은 키클라데스 건축양식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다. 이들 동굴양식은 관광객들 숙소의 모티브가 됐다. 외딴 어촌마을은 일몰 명소로 소문이 나면서 피라 못지않게 유명해졌다. 대리석이 깔린 마블로드, 언덕 아래 숨은 포구인 아모디 베이, 앙증맞은 서점인 아틀란티스 서점도 명소가 됐다.

해질녘이 되면 골목과 기념품 가게를 배회하던 모든 형태의 여행자들은 아기오스 니콜라스 성채 주변에 모여든다. 사람들은 성벽과 담장에 기대거나 테라스에 누워 에게해의 석양을 맞는다. 걷기여행도 이곳 성채에서 마무리된다. 마을 너머 작은 섬 위로 해가지고 붉은빛은 바다를 물들인 뒤 하얀 마을 위에 내려앉는다. 풍차와 교회당 십자가, 어깨를 기댄 연인들의 입맞춤이 노을 안에 담긴다.

그리스 사람들은 산토리니를 ‘티라’로 부른다. 섬은 페리사 비치, 카마리 비치 등 낮은 해변을 간직하고 있다. 척박한 토양에서 출하된 산토리니의 디저트 와인 역시 명물에 속한다. 산토리니는 6~8월이 성수기, 9월을 넘어서면 섬은 한적해지고 길은 걷기에 수월해진다.

화산 칼데라에서 이아로 연결되는 트레킹 코스
트레킹 코스에서 바라본 에게해와 산토리니의 화산섬

교회당 너머 해가 저무는 이아 마을의 석양
섬의 명물인 산토리니 와인


산토리니 피라~이아 트레킹

피라마을에서 이아마을까지 12㎞ 코스로, 3~4시간이 소요된다. 1/3 지점인 이멜로비글리까지는 흰골목길이 이어지며 그 이후로 이아까지 화산 흙길이다. 완만한 경사의 오르막과 내리막이 연결돼 초보자도 하이킹이 가능하다. 마을 구간에서 햇볕을 피해 걸으려면 오전에 출발하는 것을 추천한다. 이멜로비글리 이후로는 물을 구할 가게나 좌판이 드물어 물을 충분히 준비해야 하며 선글라스와 모자도 필수다. 트레킹이 끝난 뒤 이아에서 피라까지 수시로 운행하는 버스를 타고 귀환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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