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장년이 되면 은퇴나 자녀의 독립, 사별 등 다양한 원인으로 거주 위치나 환경을 조정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 그러나 관련한 고민이 스멀스멀 올라와도 결국 ‘늘 젊고 건강한 상태’만 떠올리며 사회의 잣대에 맞춰진 집을 고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은퇴 후의 집을 고려 중이라면, 우리보다 먼저 고령화의 난제를 마주한 해외에는 어떤 주거 형태가 있는지 살펴보자.
코하우징(Co-housing)은 1970년대 덴마크에서 시작해 스웨덴, 노르웨이, 미국, 캐나다 등으로 전파됐다. 공유주택, 집합주택, 컬렉티브 하우스로도 불린다. 공동생활 시설과 소규모 개인 주택으로 구성돼 사생활과 공동체 생활을 동시에 할 수 있는 형태다. 한집의 모든 공간을 공동으로 사용하는 셰어하우스와 달리 침실과 같이 개인 공간은 보장받으며 거실, 주방 등을 나눠 쓰는 식이다. 일반적으로 거주하게 될 입주민이 주체가 되어 그룹을 형성한 뒤 지방정부, 건축가, 은행 등과 협조해 설립한다. 코하우징은 1인 가구의 증가와 고령화로 인한 고독사 문제를 극복할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사회적 교류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은 개인의 소외감을 해소하는 것은 덤이다.
대표적인 예로는 덴마크의 ‘미드고즈그룹펜 코하우징’이 있다. 덴마크 코펜하겐 공영주택회사 라이예보에서 지은 560채의 아파트 중 5층 아파트 단지 4개 열을 개조해 만들었다. 대부분 1인 가구가 거주한다. 자기 집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1층에 공동 거실, 식당, 회의실, 부엌, 창고가 있는 코먼하우스를 반드시 거쳐야 해서 거주민들이 서로 자주 만날 수 있도록 설계됐다. 여섯 가구로 구성된 ‘토네방스고든’은 코펜하겐 근교인 비케뢰드에 있다. 대중교통과 공립학교까지의 거리가 15분 내외이며 자연환경을 부지 구입 당시와 거의 흡사하게 유지하는 조건으로 건설했다. 단지 내부에는 안뜰이 있고, 이를 중심으로 개별주택이 배치된 구조라 아이들이 활동하는 모습을 보호자가 쉽게 확인할 수 있으며, 단지 내 주차 공간을 최소화해 주민들이 오가며 자연스레 마주치도록 했다.
이외에도 덴마크에는 노인 주택과 청년 주택이 조화롭게 배치된 ‘깅에모스고어 코하우징’, 공장건물을 개조해 만든 ‘예른스토베리에’ 등 다양한 코하우징 단지가 있다. 더불어 스웨덴 알링서스의 ‘샤프테넨 코하우징’은 건물 1층에 치매 노인용 임대형 그룹홈이 있고, 2층에 개인소유의 코하우징이 있다. 코하우징 거주민과 그룹홈 거주민들 간의 접촉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건물의 형태가 타원형으로 조성돼 있다. 부부 중 한 사람이 치매 등으로 일상생활이 어려울 경우 치매그룹홈을 이용하면서 나머지 한 사람은 코하우징에서 생활이 가능하다.
일본에는 코하우징과 유사한 세대 결합 주택, 컬렉티브 하우스(Collective House)가 있다. 도쿄 아리카와구에 위치한 ‘캉캉모리’는 노인 시설과 보육원이 함께 입주한 12층 건물의 2층과 3층에 있다. 이곳에는 유아부터 80대 노인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살고 있다. 공용 주방과 식당, 게스트룸 등이 있으며, 관리하고 운영하는 일은 거주자들의 몫이다. 사람들은 일주일에 몇 번씩 공동 식사 자리에서 얼굴을 마주한다. 공동 식사는 월 1회 당번제로 거주자 몇몇이 날을 정해 함께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 독립적인 생활을 하면서도 시간과 공간 일부를 공유하는 식이다. 아이들은 노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공동체 의식을 배우고, 노인들은 아이들 덕에 삶의 활력을 얻을 수 있어 세대 교류 효과를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자립적으로 생활할 수 없는 사람이 돌봄이나 요양 서비스가 필요할 때 보통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을 고려하게 된다. 그러나 획일적인 느낌과 부정적인 인식 탓에 노후를 요양병원에서 보내고 싶지 않은 사람도 늘었다. 이와 달리 다양한 시설을 갖추고, 폭넓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장소가 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외곽에 치매를 겪는 이들을 위한 ‘호헤베이크 마을’이다. 중앙정부와 지역 기관들의 협조, 치매 요양 전문 간호사의 아이디어로 2009년에 시작됐다. 1만 2,000㎡ 규모에 영화관, 카페, 마트, 헬스장, 레스토랑, 미용실 등의 편의시설을 갖췄다. 거주 시설은 치매 환자 개인의 삶과 취향을 조사해 일곱 가지 인테리어로 지어 선택하도록 했다. 아기자기한 것을 좋아하는 이들을 위한 공방, 음악을 즐기는 이들을 위한 클래식 감상실도 있다.
환자의 안전을 위해 250여 명의 간병인·의사·요양보호사·직원 등이 마을 곳곳에 상주한다. 이들은 평소 슈퍼마켓 직원이나 미용사 등으로 생활하다 환자들에게 도움이 필요할 때만 나선다. 마을 주민들은 함께 모여 요리하고, 사교 행사를 열고, 장도 본다. 치매 환자의 일상 수행 능력은 최대화하고 간병인의 개입은 최소화하는 게 원칙이다. 정신이 흐릿하고, 손과 머리를 떨고,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고 있어도 일반 요양원처럼 종일 침대에 누워 있지 않아도 된다. 치매 등급을 받은 입소자들은 개인 형편에 따라 한 달 최소 500유로(약 64만 원), 많게는 2,500유로(약 322만 원)를 정부에 내면 된다.
미국은 은퇴 후 펼쳐질 인생 2막의 고민을 덜어줄 주거 옵션이 세분화돼 있다. 건강한 55세 이상을 대상으로 하는 액티브 어덜트 커뮤니티(active adult community)와 독립 생활공간인 인디펜던트 리빙(independent living), 생활에 어려움이 있는 중장년을 위한 어시스트 리빙(assist living), 치료와 재활에 초점을 맞춘 라이선스드 리빙(licensed living) 등으로 나뉜다. 이 중 가장 대표적인 미국의 은퇴 도시인 선 시티(Sun City)는 2만 6,000가구, 4만 명 이상이 거주하고 있다. 애리조나주립대가 평생교육을 제공하고 골프·수영 등 스포츠 시설, 병원, 쇼핑센터 등 편의시설이 갖춰져 있다.
코하우징(Co-housing)은
공유주택, 집합주택, 컬렉티브 하우스로도 불린다.
공동생활 시설과 소규모 개인 주택으로 구성돼
사생활과 공동체 생활을
동시에 할 수 있는 형태다.
시끄러운 도심을 뒤로하고 농촌이나 소도시의 여유로움을 느끼고 싶지만 낯선 환경에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된다면 ‘다거점생활’을 고려해보자. 일본에는 일정 금액을 내면 전국 곳곳의 빈 주택을 골라 살아보는 서비스가 있다. 이를 ‘주거를 구독한다.’라고 표현하는데, 우리나라의 ‘한달살기’와 비슷한 개념이라 볼 수 있다. 한곳에 오랜 기간 머무르기보다 필요나 희망에 따라 부담 없이 이동할 수 있다. 다거점 생활플랫폼 ‘어드레스(ADDress)’는 지자체와 함께 자연과 역사가 풍부한 지역의 빈집들을 개조해 현재 전국 50여 곳 이상의 거주지를 제공한다. 사용자는 월 4만엔(약 45만 원) 이외에 회원 등록비, 입회비 등의 추가 비용 없이 최대 한 달까지 머물고, 다른 지역의 집으로 옮길 수 있다. 가족이나 친구 등 동반자의 이용료는 무료다. 더불어 지역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각 주택에 ‘야모리(家守)’라 불리는 생활교류 서포트 스태프가 있다. 야모리의 중개로 주민 커뮤니티에 참여하는 등 향후 이사를 왔을 때 지역에 흡수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다.
어드레스는 빈집을 활용해 생기를 잃어가는 지역을 살리고, 그 지역민들의 일자리 창출까지 돕는 선순환을 일으키고 있다. 집을 방치하던 집주인도 어드레스에 공간을 대여해주면 임대수익을 제공받게 되고, 야모리들 역시 2~5만 엔의 수고비를 받으며 생활에 보탠다. 이외에도 도쿄 내에서 특화된 ‘크로스 하우스(XROSS HOUSE)’, 일본뿐 아니라 전 세계의 집을 구독할 수 있는 ‘하프(HafH)’ 등도 주거 유형 중 하나로 주목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