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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BRIEFING 2

미·중 반도체 패권 다툼
위기인가, 기회인가

글 · 박정일 디지털타임스 산업부장
반도체 패권을 두고 벌어지는 미·중 간 갈등이 과거 ‘냉전’ 시대를 방불케 할 만큼 첨예한 대치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1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전쟁과 최근까지 이어졌던 중국의 코로나19 봉쇄정책은 글로벌 인플레이션을 촉발시켰고, 여기에 물가 인상을 억제하겠다며 ‘빅스텝’을 이어가고 있는 미국의 금리정책까지 더해지면서 세계 경제는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국내 반도체의 국가별 수출 비중
자료 : 유럽연합집행위원회

코로나19로 대두된 공급망 이슈는 미국과 유럽 등 세계 각국의 노골적인 ‘리쇼어링(제조업의 자국 회귀)’ 정책으로 이어졌고,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는 다른 나라보다 더 큰 타격을 받고 있다. 특히 대중 반도체 수출이 급감하면서 무역적자는 계속 쌓이고 있다. 당장은 전체 수출의 20% 안팎을 차지했던 반도체가 살아나지 않는 한 한국 경제는 1%대 성장률도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한다. 미·중 반도체 패권 다툼과 이에 따른 시장 재편 흐름에서 자칫 ‘실기(失機)’할 경우 한국이 입게 될 타격은 상상 그 이상이 될 것이다.

미·중 반도체 전쟁 왜 시작됐나

2019년 미국 정부가 국가안보를 이유로 중국 화웨이를 일명 ‘수출 블랙리스트’로 올리면서 시작된 미·중 무역전쟁은 5년째 이어지고 있고, 미국 정권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으로 넘어오면서 반도체가 최대 격전지로 부상했다.

미국은 일본과 대만, 한국까지 우군으로 영입하는 ‘칩4동맹’으로 중국을 고립시키려 하고 있다. 미국 등 반도체 선진국이 보유한 반도체 첨단 기술이 중국으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반대로 2015년 시진핑 정부는 중국 제조 2025를 선포하고 10년간 1조 위안(160조 원)을 투자해 2025년까지 반도체 자급률 70%를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고, 최근에는 미국의 집중 견제 속에서도 반도체에 대한 투자 지원을 5년 더 연장해 마찬가지로 1조 위안을 추가로 투입하는 방안을 논의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은 이미 첨단 제조업에서 세계 정상 수준으로 성장한 중국을 지금 견제하지 않으면 세계 1위 경제 대국이라는 위상을 뺏기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위기감을 가지고 있고, 중국은 산업의 ‘쌀’을 넘어 ‘공기’로 부상한 반도체에서 자립하지 않는 한 대국으로 성장할 수 없다는 절실함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드는 의문은 미국이 세계 D램 시장에서 점유율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한국은 물론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시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대만에 대해서는 견제하지 않는데, 왜 유독 중국에 대해서만 과민반응을 하는지다.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하다. 전략적 동맹국이라는 점도 있지만, 한국과 대만은 미국이 보유한 원천기술에 대한 로열티를 제대로 지급하고 있으며 미국은 수출 위주인 두 나라가 이를 어길 시 견제할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대한 내수시장을 보유한 중국에는 미국의 힘이 잘 닿질 않는다. 중국 기업이 미국뿐 아니라 한국 기업이 보유한 기술을 무단으로 도용하더라도, 중국 정부가 강력하게 자국 기업을 보호하고 있기에 이를 제재할 방법이 없다. 한 마디로 중국은 미국이 만들어 놓은 시장 질서를 전부 무시해도 내수시장으로 버틸 수 있기에 기본적으로 신뢰가 생기질 않는다.

그럼에도 미국과 중국 모두 경기침체를 감수하면서까지 이 같은 대치를 너무 길게 끌고 가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 혹자는 최근 대만 등을 두고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극한에 치닫고 있는 것이 오히려 종전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신호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이미 전반적인 국력 면에서 체급이 비슷해졌기 때문에 완전한 승리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서로가 잘 알고 있을 터다.

DRAM 기업별 점유율
NAND 기업별 점유율
자료 : VLSI Research, 교보증권 리서치센터

미국은 이미 첨단 제조업에서 세계 정상 수준으로 성장한 중국을 지금 견제하지 않으면 세계 1위 경제 대국이라는 위상을 뺏기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위기감을 가지고 있고, 중국은 산업의 ‘쌀’을 넘어 ‘공기’로 부상한 반도체에서 자립하지 않는 한 대국으로 성장할 수 없다는 절실함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어떠한 태세를 취해야 할까

미·중 반도체 패권 다툼은 한국 반도체 기업에 큰 고민을 안겨주고 있다. 미국의 손을 잡지 않으면 지금의 메모리반도체 초격차 경쟁력을 유지하기 어렵지만, 반도체 최대 수출국인 중국을 등지면 당장의 피해가 극심하다. 통상과 반도체를 잘 모르는 이들은 실리외교로 줄타기를 잘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오히려 다수의 전문가들은 현시점에서는 고민할 필요 없이 미국의 편에 서는 것이 옳다고도 말한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아직 중국의 반도체 자급률이 15% 수준에 불과한 현시점에서 한국산 반도체를 공급받지 못하는 중국이 한국보다 더 아쉬운 상황이라는 점이다. 두 번째는 우리나라가 가장 취약한 분야가 시스템반도체 설계 역량인데, 이 분야에서는 미국이 세계 최강이라는 점이다. 국내 반도체 기업이 미국의 리쇼어링 요구에 응해 현지에 짓는 공장이 메모리가 아닌 파운드리와 R&D 중심인 점도 이 같은 점을 고려한 전략적 판단이다.

그보다 더 큰 숙제는 미국과 유럽 등의 반도체 리쇼어링 정책인데, 이 역시 우려만큼 큰 영향을 주진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공장 하나를 짓는 데 수십조 원이 들어가는 반도체 산업의 특성상 자국 생산, 자국 소비 방식으로는 수익성을 확보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메모리반도체는 소품종 대량생산 구조이고 기본적으로 작아서 거점공장의 위치가 세계 각국의 수요에 대응하는 데 큰 지장이 없다. 다만 파운드리에서는 주로 자율주행이나 의료용 등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지는 주문형 시스템반도체가 생산되기 때문에, 수요처와 가까이 있는 것이 나름 중요하다. 삼성전자가 미국에 파운드리 공장을 짓는 것은 미·중 반도체 패권 다툼과 관계없이 후발주자이기에 밟아야 하는 당연한 수순인 것이다.

삼성전자가 미국에 파운드리 공장을 짓는 것은
미·중 반도체 패권 다툼과 관계없이 후발주자이기에 밟아야 하는 당연한 수순이다.

반도체 시장 회복 시점은?

그렇다면 수출은 물론 경제회복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반도체 시장의 회복 시점은 과연 언제일까. 국내 반도체 기업 모두 최근 1분기 실적발표 컨퍼런스콜에서 이르면 하반기, 늦어도 내년에는 반등할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았다.

메모리반도체의 경우 통상 스마트폰과 서버용이 전체 수요의 40% 안팎을 각각 차지하고, PC용이 20% 수준이다. 이 가운데 스마트폰의 경우 중국의 코로나 봉쇄가 풀리면서 생산이 활발해지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벌써 국내 반도체 기업들의 주가를 견인하고 있다. 서버용의 경우 마이크로소프트(MS), 구글, 아마존웹서비스(AWS), 메타 등 북미 주요 클라우드 서비스 공급 업체들이 이미 상당한 인력을 구조 조정했다는 점이 오히려 호재로 작용하고 있다. 경기침체에 선제 대응해 비용지출을 최소화한 만큼, 다시 공격적인 서버 증설 투자를 할 수 있는 힘을 비축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최근 챗GPT의 등장 이후 IT 업계에 생성형 인공지능(AI) 경쟁이 불붙은 만큼, 예상보다 더 빠르게 메모리 시장이 회복세를 보일 것이라는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 위기는 기회라는 말처럼, 최근 우리나라의 반도체발 경기침체는 정치권에 첨단 산업이 국가 경쟁력에 직결된다는 사실을 체감하게 해주었다. 이번 위기가 민관이 힘을 모아 반도체와 같은 첨단 산업의 기초체력을 더 단단하게 할 수 있는 터닝포인트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