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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K 특집

슬기로운 생각

Aging Challenge
Study Refresh Gift

삶을 성장시킬
새로운 도전
글 · 김민식
고난과 시련 없이 성장하는 사람은 없다. 도전이 찾아왔다는 건, 내 삶이 성장할 새로운 기회가 왔다는 뜻. 그러니 온몸으로 반겨주자. 포기할 수 없는 내 인생이니까.
그리고 외로움이 찾아오면 반갑다고도 해주자. 나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이 온 것이니까.

김민식 PD · 작가
재미난 직업을 찾다가 1996년 MBC 공채에 지원해 예능 피디로 입사했다. 태생이 남을 웃기기 좋아하는 딴따라인 탓에 매일같이 신나게 연출했더니 청춘 시트콤 ‘뉴논스톱’으로 백상예술대상 신인상, 드라마 ‘내조의 여왕’으로 백상예술대상 연출상을 공동 수상하기도 했다. 해마다 200여 권의 책을 읽고 매일 아침 블로그에 글을 올렸다. 그때 쓴 글들을 모아 《나는 질 때마다 이기는 법을 배웠다》, 《매일 아침 써봤니?》, 《공짜로 즐기는 세상》, 《외로움 수업》 등을 펴냈다.


기회는 망했을 때 찾아온다

스무 살에 나는 ‘이번 생은 망했다’고 느꼈다.
대학에서 자원공학을 전공했는데, 원래 이름은 광산학과였다. 석탄채굴학과 석유시추공학을 배웠는데, 1990년에 이미 탄광업은 사양산업이고, 석유 한 방울 안 나오는 나라에서 광산학을 공부해서 뭐 하나 싶었다. 그래서 대학 전공 공부 대신,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었다.
당시 내가 읽은 책 중에는 앨빈 토플러의 3부작 《미래 충격》, 《제3의 물결》, 《권력 이동》이나 존 나이스비트의 《메가트렌드》 같은 책이 있었다. 하나같이 하는 말이 21세기에는 세계화와 정보화라는 두 가지 커다란 변화가 온다는 것이었다. 가만히 생각해 봤다. 세계화와 정보화의 시대가 온다면, 나에게 유용한 도구는 무엇일까?
나는 그게 영어라고 생각했다.
‘세계화 시대에 영어를 잘하는 사람은 글로벌마켓에 나가 메이드 인 코리아 제품을 팔 수도 있다. 정보화의 시대에 최신 정보는 영어로 나오니까, 영어를 잘한다면 통역이나 번역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최신 정보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겠지?’
그래서 혼자 영어 공부에 도전했다.
군 복무하던 시절, 매일 아침 30분씩 문장 열 개를 소리 내어 반복해서 읽었다. 그런 다음 작은 쪽지에 문장을 적어 낮에 짬 날 때마다 외웠다. 그렇게 종일 외운 문장은 밤에 잠들기 전 복습을 했다. 다음 날 새로운 10개 문장을 외우면, 자기 전에 전날 외운 10개 문장부터 다시 복습했다. 이렇게 매일 10개의 문장씩 누적 암송을 하니 6개월이 되자 회화책 한 권을 통째로 외울 수 있게 됐다.
영어 회화를 할 때 단어를 떠올리고 문법에 맞추어 문장을 조립하려고 하는데, 그렇게 하면 자신감이 없어 입이 잘 열리지 않는다. 문장을 통으로 암기하는 게 말문을 여는 지름길이다.
회화책을 한 권 통째 외운 결과 영어의 달인이 될 수 있었고, 복학한 후 전국 대학생 영어 토론대회에 나가 2등 상을 탈 수도 있었다. 이후 외국계 기업에서 영업사원으로 일하다 한국외대 통역대학원에 입학했다.
한편 1995년 나는 제레미 리프킨이 쓴 《노동의 종말》을 읽었다. 19세기, 20세기, 산업혁명의 결과, 인간의 육체노동을 기계가 대신해 주고, 21세기 정보혁명의 결과 인간의 정신노동을 컴퓨터가 대신해 주는 시대가 온다는 내용이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그렇다면 내가 살아갈 21세기는 유토피아일까, 디스토피아일까?
인류가 역사상 최초로 노동으로부터 해방되어 로마시대 귀족들처럼 예술과 문화를 즐기고 철학을 논하며 살 수 있는 시대. 인공지능을 장착한 기계나 로봇이 로마 시대 노예들처럼 생산을 담당하기에 인간은 마음껏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유토피아가 될까, 아니면 소수의 자본가가 자동화된 생산설비를 독점한 채 대다수 인류는 실업 상태에 빠지는 디스토피아가 될까?


1995년 나는 제레미 리프킨이 쓴 《노동의 종말》을 읽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그렇다면 내가 살아갈 21세기는 유토피아일까, 디스토피아일까?



답은 답을 하는 사람의 태도에 달려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사람마다 다르다. 나는 답하는사람의 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미래가 유토피아라고 낙관하는 사람은 ‘이제 힘들고 귀찮은 일은 기계나 컴퓨터가 대신해 주는 시대니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즐겁게 살겠노라’ 마음먹을 것이다. 디스토피아가 온다고 절망하는 사람은 일이 안 풀릴 때 세상의 변화를 탓하며 낙담하게 될 터고.
1995년에 읽은 《노동의 종말》에서 앞으로 3~40년 내로 컴퓨터의 언어 정보 처리 기술이 발달하면 자동 통역기나 자동 번역 프로그램이 나오리라 전망했다. 당시 나는 이제 막 통역대학원에 입학해서 열심히 통번역을 공부하고 있는데 말이다. ‘이번 생은 또 망한 건가?’ “정보화 기기가 발달하면 언젠가 소설을 번역하는 건, 컴퓨터가 대신하는 날이 올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컴퓨터가 발달해도 사람 대신 소설을 쓰는 건 힘들 거다. 그러므로 21세기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일자리를 원한다면 창작자가 되어라.
20세기가 활자 문명의 시대라면 21세기는 영상 문명의 시대가 될 것이다. 그러니 미디어 산업의 창작자가 되는 편을 권한다.” 그 책을 읽고 나는 1996년 MBC 피디 공채에 도전했다.
세계화의 시대에 영어가 필요할 거로 생각해 통역사가 되었고, 정보화의 시대에 언론사가 정보의 흐름을 독점하니 방송사에 입사했다. 나름 세계화와 정보화 시대에 잘 대비했다고 생각했는데, 위기는 의외의 지점에서 닥쳐왔다. 1996년 입사했을 때, MBC의 경쟁자는 KBS나 SBS였다. 그런데 세계화가 계속 진행되자 경쟁사는 어느새 넷플릭스, 유튜브, 페이스북과 같은 세계 유수의 미디어 기업들이 줄을 서 있었다. 게다가 예전에는 온 가족이 둘러앉아 TV를 시청했는데, 정보화의 여파로 각자 스마트폰으로 콘텐츠를 소비하는 시대가 왔다. MBC가 누려오던 광고 시장의 독과점도 깨지고, 매년 천억 원에 가까운 적자를 기록하면서 결국 회사는 구조조정을 단행하게 됐다.
물론 독하게 마음먹고 버티면 정년까지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가만히 고민을 해봤다.
미래학자들이 예견한 21세기의 커다란 변화가 세계화와 정보화라면, 전문가들도 예측하지 못한 건 바로 고령화라고. 우리나라가 이렇게 빨리 초고령 사회로 진입할 줄 아무도 몰랐다. 알았다면 1970년대에 산아 제한 운동은 하지 않았을 테니까.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게 세상일이다. 나는 세계화와 정보화보다 고령화가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세계화와 정보화는 기업의 차원에서 대응할 수 있지만, 고령화는 각자 개인이 알아서 대비해야 하는 몫이기 때문이다.
만약 100세까지 사는 시대라면, 나이 50에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다시 공부해야 한다고 느꼈다. 나이 70, 80에도 일하려면 나이 50, 60에도 공부해야 한다. 나이 50에 할 수 있는 최고의 공부는 독서고, 최고의 학교는 도서관이다. 그래서 나는 쉰둘의 나이에 명퇴를 신청하고 도서관에서 본격적으로 노후 대비를 시작했다.



인생의 터닝 포인트는 언제인가

그런데 퇴사하니 참으로 외로웠다. 매일 다니던 직장이 사라지고, 매일 만나던 사람이 사라지고, 매월 나오던 급여가 사라지니 나이 50에 인생이 또 망했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드라마 감독으로 일하며 현장에서 늘 수십 명의 제작진과 배우들을 진두지휘하며 살던 내가 퇴직 후, 혼자 조용히 칩거하며 살자니 너무 외로웠다. 그런데 나만 외로운 게 아니었다. 고령화 시대란 결국 모두가 외로워지는 세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직장을 나온 은퇴자들은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아진다. 부부가 같이 해로하면 좋겠지만 초고령 시대에 둘 중 하나는 배우자를 먼저 보내고 남은 인생을 홀로 살아야 한다. 비혼을 선택하고 평생 혼자 사는 사람도 많다. 이러한 시대에 외로움을 고통이라 느낀다면 개인적으로는 불행이요, 국가적으로는 손실이다. 외로움은 어쩌면 우리 앞에 찾아온 새로운 도전이다.
외로움을 괴로움으로 받아들이는 건, 외로움이 잘못 산 인생에 대한 벌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관점을 바꿔보면 어떨까? 퇴직은 평생 성실하게 일해온 내가 자신에게 준 선물이다. 아이들이 다 자라서 이제 나를 찾지 않는 것은 내가 아이들을 그만큼 잘 키웠기 때문이다. 독립적인 성인으로 잘 자라난 덕에 부모의 손을 타지 않는 것이다.
직장생활을 잘하고 육아를 잘 해낸 결과, 우리는 노후에 외로워진다.
그러니 외로움이 찾아오면 반갑다고 해주자. 이제 나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이 온 것이다. 다른 사람 눈치 살피고 세상의 평가에 휘둘리느라 나를 잊고 살았는데, 그런 내가 나를 찾아온 것이다. 이젠 나를 좀 돌봐줘, 하고.
세계화는 처음 우리에게 커다란 도전이었다. IMF는 우리에게 종신고용 대신 국제 기준에 맞추어 노동시장을 유연화하라고 요구했다.
인구가 적고 내수시장이 작은 우리나라가 WTO 국제 무역기구가 안겨준 글로벌 마켓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루기 어려웠을 것이다. 1960년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던 한국은 수출 덕분에 중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었고, 2000년대 불어닥친 정보화 바람에 발맞추어 산업 재편을 한 덕분에 IT 강국이자 문화강대국이 될 수 있었다.
세계화와 정보화를 통해 경제가 발전했고, 그 결과 고령화가 찾아왔다. 고령화 사회는 우리에게 새롭게 찾아온 도전이다. 인생에서 전환점은 언제 올까? 위기가 닥쳐올 때 온다. 살면서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우리는 굳이 바뀌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사실 그냥 살던 대로 사는 게 제일 편하다. 하지만 위기가 왔다는 건 무언가 바꾸지 않으면, 내가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이 왔다는 것이다.
은퇴 후를 선물로 여기는 사람은 하루하루 즐겁게 살 것이고, 실업자로 사는 게 고통이라 여기는 사람은 기나긴 노후를 두려워하며 지내게 된다.
은퇴가 내 삶에 찾아온 새로운 도전이자 기회라 여기고, 행복한 노후를 위한 출발선이라 여겼으면 좋겠다. 100세 시대, 여러분의 멋진 도전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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