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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OBAL TOPIC

달콤살벌한 설탕값

‘슈거플레이션’이 온다 …!

글 · 이태경 토지+자유연구소 부소장
전대미문의 ‘슈거플레이션(Sugar+Inflation)’이란 말이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 생소하기 이를데 없는 이 용어는 설탕 가격의 폭등이 인플레이션을 견인한다는 의미인데, 주지하다시피 설탕은 거의 모든 식음료에 들어가는 데다 빵, 과자, 아이스크림, 음료 등 가공식품에 꼭 필요한 재료다.
폭등을 거듭 중인 설탕 가격이 인플레이션 전선에 근심을 더하고 있다.

원당(설탕 원료) 선물 가격
자료 : 유럽연합집행위원회
12년 만에 최고점을 찍은 설탕 가격

지난 4월 28일(현지시간) 미국 국제선물거래소(ICE)에서 설탕의 원료인 원당(비정제 설탕) 선물 가격은 파운드당 26.99센트로, 올해 연저점(19.50달러) 대비 무려 38% 상승했다. 로이터통신은 “지난 27일 한때 파운드당 27.41센트까지 올라 11년 반 만의 최고치를 기록했다”라고 전했다. 설탕의 원료인 원당만이 아니다. 설탕 가격 역시 12년 만에 최고치로 뛰어올랐다. 또한, 지난 4월 12일 영국 런던 국제금융선물거래소(LIFFE)에서 백설탕 선물 가격은 2011년 이후 12년 만에 t당 700달러를 넘어섰다.

한편, 지난 4월 16일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지난달 세계 설탕 가격지수는 127.0으로 1월(116.8)에 비해 약 9% 폭등한 것으로 나타났다. 가격지수는 2014~2016년 평균 가격을 100으로 두고 비교해 나타낸 수치다. 최근 6개월간의 변동을 보면 세계 설탕 가격지수는 지난해 10월 108.6에서 11월 114.4, 12월 117.2로 상승했고, 올해 1월 116.8로 잠시 주춤했다가 다시 2월 125.2, 3월 127.0으로 상승 중이다. 올해 3월 설탕 가격지수는 지난해 10월 지수와 비교해 무려 약 17%p 높다. 이는 2016년 10월 이후 최고치이기도 하다.

설탕 가격 폭등, 그 원인은?

최근 수개월간의 설탕 가격 상승은 브라질 등 주요 산지의 이상기후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공급이 줄어든 탓이 압도적이다. 전 세계 사탕수수 생산 1위 국가인 브라질에서는 폭염과 가뭄 등으로 생산량이 격감했고, 2위 수출국인 인도는 주요 생산지인 중서부 마하라슈트라주에 닥친 폭우 등으로 인해 지난해 5월부터 설탕 수출을 제한했으며, 4위 수출국인 태국도 작황이 악화돼 생산량을 줄였다. 거기에 더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국제 에너지 가격이 상승하자 사탕수수 가공공장에서 사탕수수를 설탕 대신 에탄올 생산에 투입한 점도 공급 감소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공급이 격감한 대신 전 세계가 ‘엔데믹’에 접어들며 외식 수요가 폭증한 것도 설탕 수요 증가 요인이 됐다. 문제는 유럽 사탕무 경작지의 여름 가뭄, 5~6월 사이에 형성될 가능성이 큰 엘니뇨 등의 요인이 수급 불균형을 지속시킬 확률이 높다는 점이다.

치솟는 설탕 가격이 가공식품 가격과 외식비 부담을 더욱 무겁게 만들 듯

상황이 심각한 건 설탕 가격 상승이 단지 설탕 가격 상승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세계 설탕 가격이 계속 상승하면 빵, 과자, 아이스크림, 음료 등 국내 가공식품에 가격 상승분이 전가될 수밖에 없고, 자장면, 떡볶이, 김치찌개, 백반 등을 포함한 외식비도 오를 수밖에 없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연간 외식 물가 상승률은 7.7%로 1992년 10.3% 이래 30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는데, 외식물가지수는 4월 7.6%를 기록해 전월의 7.4%를 상회했다. 난공불락의 철옹성 같은 외식물가지수에 설탕 가격 폭등세가 더해지면 외식물가지수의 상승세가 더욱 가팔라지지 않을까 걱정이다. 시중에서는 이미 ‘런치플레이션(Lunch+Inflation)’이란 말이 입에서 입으로 퍼지고 있다. 가공식품 물가도 고공행진을 거듭 중이다. 4월 가공식품가격지수는 7.9%를 기록해 전달(9.1%)보다는 상승폭이 줄었지만, 가장 많이 소비되는 가공식품인 빵(11.3%)과 스낵과자(11.1%) 등은 무서운 오름세를 보였다. 인상된 설탕 가격이 본격적으로 가공식품류에 반영되기 시작하면 가공식품의 오름세도 더 가팔라질 가능성이 있다.

난공불락의 철옹성 같은
외식물가지수에 설탕 가격 폭등세가
더해지면 외식물가지수의 상승세가
더욱 가팔라지지 않을까 걱정이다.

슈거플레이션이 물가 하락세에 찬물을 끼얹진 않을지

슈거플레이션의 습격이 무엇보다 염려되는 까닭은 정점을 지나 내려오고 있는 인플레이션에 악영향을 주지 않을까 해서다.

대한민국의 경우, 지속적인 석유류 가격 하락의 영향으로 4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14개월 만에 3%대로 내려갔다. 2일 통계청이 발표한 ‘2023년 4월 소비자물가동향’에 따르면 지난달 소비자물가지수는 110.80(2020년=100)으로 작년 같은 달보다 3.7% 올랐다. 소비자물가는 확실히 정점을 찍고 내려오는 추세가 역력하다. 그런데 이런 하락추세에 슈거플레이션의 본격적인 등장이 악재가 될 수도 있다. 특히, 우리가 인플레이션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단정하기 어려운 이유가 있다. 물가의 기조적 흐름을 보여주는 근원물가(농산물 및 석유류 제외 지수)가 4.6% 올라 전월(4.8%)보다 상승 폭이 둔화됐다고는 하지만 소비자물가상승률을 멀찌감치 앞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근원물가가 꺾이지 않으면 인플레이션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선언할 수 없다. 미국은 대한민국보다 사정이 더 나쁘다. 4월 28일(현지시간) 미국 상무부에 따르면 지난 3월 PCE 가격지수는 전년 동월 대비 4.2% 상승했는데, 이는 직전 월인 2월 당시 상승률(5.1%)보다 하락한 것이다. 한 달 전과 비교한 PCE 지수는 0.1% 상승했는데 이 역시 전월 수준(0.3%)을 하회했다. 문제는 변동성이 큰 에너지, 식료품 등을 제외한 근원 PCE 가격지수가 전년 동월 대비 4.6% 상승하면서 월가 전망치(4.5%)를 상회했다는 것이다. 더욱 충격적인 건 근원 PCE 가격지수가 2021년 2월 이후 처음으로 헤드라인(전체)지수 상승률을 추월했다는 사실이다. 근원 PCE지수는 연준이 인플레이션 목표(연 2%)를 언급할 때 참고하는 물가지수다.

또한, 미 연준의 기준금리 인상 드라이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고용시장은 아직까지 견조한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5월 3일(현지시간) 민간 고용정보업체 ADP가 공개한 전미고용보고서에 따르면 4월 민간 부문 고용은 29만 6천 개가 늘었다. 이는 다우존스가 집계한 전문가 전망치(13만 3천 건)를 아득히 상회하는 것이며, 전월 증가 폭(14만 2천 개)의 두 배가 넘는 수치다.

4월 민간 부문 신규고용은 지난해 7월 이후 최대 규모다. 완강히 버티는 근원 PCE와 불가사의할 정도로 견고한 미국의 고용지표를 볼 때 인플레이션과의 전쟁이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란 예감이 드는 건 합리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