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정환 선생은 어린이날과 어린이에 대한 남다른 인식을 심어준 고마운 인물이다. 실제로 1918년 경성청년구락부를 조직하며 청소년운동을 전개했고, 1920년 ‘어린이 노래’를 번역하며 ‘어린이’를 ‘늙은이’, ‘젊은이’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등한 용어로 만든 장본인이다.
사실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 여성과 어린이는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받지 못했다. 그중 어린이 는 평균 수명이 짧다는 몰이해로, 성인이 된다는 보장이 없다는 깎아내림으로, 여기에 여전히 조선을 지배한 유교이념까지 압박하며 최하층으로 평가절하했다. 방정환은 지나친 상하관념과 나이를 중시하는 유교사회의 최약자인 어린이들이 천시와 억압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안타까움은 그를 일본 유학길에 오르게 했고, 학문적으로 아동심리학을 공부하게 한 결정적 계기가 됐다.
어린이들이 읽을 책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사랑의 선물>이라는 외국책을 번역하는가 하면, 1923년에는 소년운동을 확산하기 위해 국내 최초 순수 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하기도 했다. 어린이 단체 ‘색동회’를 조직, 5월 1일 서울 시내 소년단체들의 연합조직인 ‘조선소년운동협회’ 주최로 우리나라 최초의 ‘어린이날’ 행사를 성대하게 치르는 등 소년운동을 주도했다.
‘하늘 같은 어린이를 위해 평생을 바치리라’ 하고 생각한 방정환은 어린이에게 ‘존댓말 쓰기운동’을 펼치는 등 ‘작은 물결, 소파(小波)’로서의 굵직한 행보를 이어갔다. “무기를 만들고 싸우는 것만이 독립운동이 아니고 어린이를 올바르게 자라게 하는 것이 독립운동”이라는 신념은 그를 끊임없이 강연회와 동화대회 그리고 어린이의 지위를 높이는 일에 전념케 했다. 한평생 어린이를 위해 살다 간 방정환 선생의 어린이 사랑과 깊은 뜻에 절로 찬탄과 존경의 마음이 솟아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