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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K 컬쳐

발길 닿는 길(국내편)

속세 넘어
왕이 거닐던 길을 따라서

속리산 보은 오리숲길과 세조길

글 · 사진 진우석 
속리산처럼 오묘한 뜻을 품은 산이 또 있을까. ‘속을 버리고 불도에 입문한 산’이라는 의미이고, ‘산은 사람을 떠나지 않는데 사람이 산을 떠나는구나(山非離俗 俗離山)’란 고운 최치원의 시가 내려와 더욱 신비롭게 느껴진다. 속리산의 품에는 세조길이 나 있다. 세조가 요양차 자신의 스승인 신미대사가 머물던 복천암으로 순행 온 역사적 사실에 착안해 붙인 이름이다. 세조길 탐방은 법주사까지 이어진 오리숲길과 복천암까지 나 있는 세조길을 함께 걷는다.

법주사로 이어진 오리숲길

속리산은 한강 · 금강 · 낙동강의 물길이 나뉘는 분수령이 되는 중요한 산이다. 산세는 한마디로 기골이 장대하다. 최고봉 천황봉, 문장대, 입석대 등 장대한 바위봉이 가득 솟구쳤다. 험준한 산세지만 그 품에 유순한 길을 품고 있는데, 그곳이 세조길이다.

서늘한 공기에 잠이 깼다. 청아한 새소리와 진한 나무 향기가 텐트 속으로 밀려온다. 아침부터 ‘까르르’ 아이들의 노는 소리가 듣기 좋다. 간밤에 속리산사내리캠핑장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속리산 오리숲 옆에 자리한 캠핑장으로 사이트가 널찍하고 숲이 좋아 가족 캠퍼들이 많이 찾는다. 캠핑장의 아침은 느리고 평화롭다. 그 분위기에 젖어 느긋하게 아침을 지어 먹고 길을 나선다.

캠핑장을 나오면 법주사까지 오리숲길이 이어진다. ‘10리가 안 되고 5리만 이어진다’고 해서 오리숲길이다. 밑동 굵은 소나무들이 터널을 이룬 길이다. 자유롭게 가지를 뻗어 곡선을 그리는 소나무들은 성스럽게 느껴진다. 맑은 공기를 심호흡하며 되도록 천천히 걸었다. 법주사 매표소를 지나면 ‘세조길 자연관찰로’ 안내판이 반긴다. 세조길의 시작이다. 침엽수와 활엽수가 어우러진 오리숲길에는 신록과 꽃이 어우러져 장관이다.

오리숲길의 종착점에 법주사가 있다. 관음봉, 문장대, 천황봉 등 우람한 주봉우리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속리산 최고의 명당자리다. 법주사는 553년(신라 진흥왕 14년)에 의신이 창건했고, 776년(혜공왕 12년)에 진표와 그의 제자들에 의해 미륵신앙의 중심 도량으로 바뀌었다. ‘호서지방 제일가람’이란 별칭처럼 법주사 경내와 암자에는 국보 3점, 보물 12점, 지방유형문화재 22점 등 수많은 문화재를 흩어져 있다.

‘호서제일가람’ 현판이 붙은 법주사 일주문은 세조길로 가는 입구다.

법주사 금강문을 지나면 청동미륵대불과 천왕문이 보인다.


호서지방 제일가람, 법주사

경내로 들어서 금강문과 천왕문을 연달아 지나면 국보 제55호인 팔상전을 만난다. 5층 건물인 팔상전은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목탑이다. 팔상전이라는 이름은 팔상도를 모신 건물이라는 뜻이다. 팔상도는 부처님의 일생을 여덟 장의 그림으로 표현했다. 부처가 도솔천에서 내려오는 모습, 룸비니동산에서 탄생하는 모습, 세상을 관찰하는 모습, 성을 넘어 출가하는 모습, 설산에서 수도하는 모습, 보리수 아래에서 마귀의 항복을 받는 모습, 녹야원에서 첫 설교를 하는 모습, 열반에 드는 모습 등 8장면이다. 그중 열반에 드는 모습이 너무 편안하게 보여 한참을 쳐다봤다.

이어 팔상전 뒤의 국보 제5호 쌍사자 석등을 감상하고, 법주사의 중심 법당인 2층 대웅보전에서 부처님께 인사를 올렸다. 법주사 경내에는 원통보전, 석연지, 철당간, 무쇠솥, 마애여래의상 등 많은 유물이 있으니 시간을 넉넉하게 잡고 살펴보자. 법주사를 나와 다시 세조길을 잇는다. 세조길과 나란히 있는 도로는 예전부터 있던 길이다. 이 길은 주말이면 등산객과 부속 암자를 찾는 차량이 뒤엉켜서 혼잡함이 심했다. 이런 이유로 국립공원에서 새로운 탐방로 세조길을 열었고, 덕분에 호젓한 숲길을 따라 걸을 수 있다.

길은 계곡을 막아서 생긴 널찍한 저수지 옆을 따른다. 저수지 안에는 하늘이 잠겨 있고, 물고기들이 살랑거린다. 휴게소를 지나면 계곡을 따라 데크길이 이어진다. 수량이 적지만, 물소리가 제법 크게 들린다. 계곡으로 크고 작은 바위들이 흩어져있는 까닭이다. 귀를 열고 한 걸음 한 걸음 걷다 보면 물소리가 번뇌와 망상을 씻어주는 느낌이다. 이윽고 도착한 목욕소. 피부병을 얻은 세조 임금이 이곳에서 목욕을 하다가 월광태자를 만나 피부병이 깨끗하게 나았다는 이야기가 내려온다.

법주사 매표소를 지나면 세조길 자연관찰로가 시작된다.
시종일관 완만한 숲길이 이어지는 세조길

법주사 삼거리부터 세조길이 이어진다.
세조가 신미대사를 찾아갔던 복천암은 세조길의 종착점이다.


신미대사가 머물던 복천암

세심정휴게소를 지나 ‘이 뭣고 다리’를 건너면 복천암으로 들어선다. 복천암은 세조가 마음의 병을 고친 곳으로 알려졌다. 삼일을 기도하고, 삼일 신미대사의 설법을 들은 후 복천암 샘물을 마시고 병이 나았다고 한다. 샘물을 떠 마셔본다. 달고 진한 맛이 일품이다. 왠지 복 받을 것 같아 벌컥벌컥 들이켠다.

복천암에서 세조길은 끝나지만, 오른쪽으로 난 데크길을 따라 올라가 보자. 이정표도 없는 이 길이 복천암의 숨은 보물이다. 설렁설렁 이어진 오솔길을 십 분쯤 오르면 고갯마루에 이르는데, 여기에 신미대사와 그의 제자 수암화상의 승탑이 자리한다. 승탑 뒤 소나무 사이로 속리산의 우람한 암봉 능선이 보인다.

승탑에서 내려오면 산꾼들의 명소인 비로산장이 나온다. 계곡을 낀 산장은 주변으로 큰 바위들과 키 큰 나무가 어우러져 분위기가 그만이다. 고 김태환 씨가 지은 개인 산장으로 52년 역사를 자랑한다. 지금은 대를 이어 가족이 운영하고 있다. 산장 마당에 들어서면 무료로 녹차를 건네며 쉼터를 제공한다. 따뜻한 차를 마시며 산장을 바라보는 맛이 그윽하다. 밤새 계곡 물소리 들으며 하룻밤 묵어가고 싶은 마음이 절로 난다.

법주사 입구의 정이품송. 속리산의 상징이다.


속리산 오리숲길과 세조길 가이드

세조길은 법주사 삼거리에서 종착점인 복천암까지 는 3.2㎞, 넉넉하게 1시간 30분쯤 걸린다. 시종일관 쉬운 길이라 가족과 연인이 느긋하게 걷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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