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파리에 들어서면 센강의 다리 위를 거닐며 상념에 젖는다. 많은 예술가가 오가던 다리나 골목에서 보내는 달콤한 휴식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다. 우디 앨런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Midnight in Paris)>에서는 주인공 오웬 윌슨(길 역)이 센강을 산책하며 파리의 예술가들을 추억하는 장면이 나온다. 스크린 속 환영처럼 센강은 파리에 대한 기억의 매개이고 탐닉의 대상이다. 피카소, 사르트르, 카뮈, 랭보 등 숱한 대가들이 도시와 강변 곳곳에 흔적을 남겼다.
센강은 파리의 동서를 가로지르면서 유유히 흐른다. 강변으로는 걷기 좋은 길이 이어지고, 수십 개교각이 미술관, 건축물, 공원을 연결한다. 좁은 강폭은 투박하지 않고 일상과 가깝게 소통한다. 센강에 연결된 파리의 길들은 폭에 따라 ‘뤼’, ‘아브뉘’, '불르바르‘로 다채롭게 불린다.
센강변의 산책로와 다리에는 가슴 뛰는 스토리가 담겨 있다. 카뮈, 사르트르, 랭보 등이 작품을 구상하기 위해 즐겨 찾았던 다리는 퐁데자르 다리다. 나무로 바닥을 채운 퐁데자르는 센강 교각 중 보행자를 위한 전용 다리로, ‘예술가의 다리’라는 별칭을 지녔다. 낮에는 사진 등 미술 작품이 전시되고, 밤이면 집시들의 뜨거운 노래가 흐른다.
시떼섬 초입의 퐁네프 다리는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로,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의 소재가 됐다. 18세기 파리의 교각들은 다리 양쪽에 복층 가옥이 들어선 서민들의 삶터였다. 건물 없이 지어진 최초의 교각이 퐁네프 다리다.
시테섬의 노트르담 대성당은 애니메이션 영화 <라따뚜이>에 나왔고, 시테섬에서 퐁생루이를 건너 닿을 수 있는 작은 섬 생 루이 섬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의 배경이었다.
시테섬을 에둘러 연결되는 센강 길은 중세의 고풍스러운 건축물로 채워진다.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감옥인 콩시에르쥐르, 카미유 클로델의 가옥들을 스쳐 지난다.
이에나 다리 옆 에펠탑과 상 드 마르스 공원은 아티스트들의 대형 콘서트가 열리는 장소다. 비라켕 다리는 2층 구조로, 메트로가 지나며 1층으론 사람들과 자동차가 오간다. 파리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이 다리는 영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서 주인공들의 첫 만남을 촬영했다. 강 서쪽의 미라보 다리에서 시인 아폴리레르는 연인 마리 로랑생과의 이별을 노래했다. 알마교는 영국 다이애나 황태자비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슬픈 얘기를 담고 있다.
센강변의 오래된 서점이나 고서적 판매점 역시 강의 풍취를 더한다.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는 소설가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가 즐겨 찾던 서점으로, 영화 <비 포 선셋>에 등장했다. 생 루이 섬 주변에 늘어선 길거리 노점 서점인 부키니스트들만 구경해도 퇴색한 강변은 충분히 빛난다.
아티스트의 사연들은 센강과 연결되는 거리와 골목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생 제르망은 시테섬 남쪽에서 콩코르드 광장까지 아우르는 지역으로, 파리와 센강을 향유하는 심장부와 같다. 파리의 많은 문인과 음악가가 인생을 논했던 카페들은 가을볕이 드는 큰 도로에 차곡차곡 늘어서 있다.
1686년 개장한 카페 ‘르 프로코프’는 루소, 볼테르 등이 거쳐 갔으며, 30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도 같은 자리에서 성업 중이다. 카페 ‘드 플로르’는 랭보, 사강, 앙드레 지드 등 프랑스의 작가와 화가가 작품과 인생을 논했던 문학 카페인데, 시간이 흘러 알랭드롱, 카트린느 드뇌브, 조니 뎁, 알 파치노 등 영화배우들이 즐겨 찾았다. 카페 ‘레 되 마고’는 카뮈와 피카소가 단골손님이었으며, 1880년대 문을 연 식당 ‘브라스리 립’에서 헤밍웨이는 <무기여 잘 있거라>를 집필했다. 생 미셸 거리로 연결되는 소르본느 대학 정문 앞 카페는 사르트르와 그의 연인 시몬드 보부아르의 데이트 장소였다.
센강에서 콩코르드 광장, 상젤리제를 거쳐 개선문까지 이어지는 길은 파리지앵이 즐기는 대표적인 조깅코스이자 산책 구간이다. 그 길에 루브르 박물관, 튈르히 가든, 엘리제궁 등이 두루 담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와 밀로의 <비너스>를 감상하려면 루브르 박물관을, 밀레의 <만종>이나 고갱의 <타히티의 여인들>을 보려면 강 건너편 오르세 미술관을 선택하면 된다. 튈르히 가든을 산책하는 도중이라면 오랑주리 미술관이나 죄드폼갤러리에 들려 명작을 음미할 수 있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도 주인공은 산책과 작품 감상을 아우르며 옛 예술가들과 몽상속에서 조우한다.
샹젤리제는 파리 사람들이 사랑하는 우아한 산책로다. 불모지였던 땅은 17세기 ‘왕비의 산책로’를 조성하며 외관을 갖추기 시작했다. 플라타너스와 마로니에 나무가 심어졌고, 도로 한쪽으로는 공원이 마련됐다. 샹젤리제에 대통령궁 엘리제가 들어섰는데, ‘엘리제’는 신과 영웅이 죽은 뒤 가는 낙원, ‘샹젤리제’는 엘리제의 뜰이라는 의미가 깃들어 있다. 낙원의 뜰은 밤이면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으로 불야성을 이룬다.
파리의 해질 무렵 야경은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더욱 찬란하다. 도심과 센강이 내려다 보이는 몽마르트르의 테르트르 광장에서 피카소, 위트릴로 등 화가들은 밤을 여흥 삼아 산책과 담소를 나눴다. 고흐가 머물며 작품 활동을 펼쳤던 동생 테오의 가옥 역시 이 언덕 위에 남아 있다.
샹제리제와 에펠탑, 몽마르트르는 매년 세계에서 수십만 명의 인파가 몰려드는 새해맞이 명소다. 그리고 새해가 되면 파리에서는 2024년 올림픽이 열린다. 센강으로 연결되는 우아하고 멋스러운 길들은 예술의 숨결 위에 군중들의 열기로 가득 채워질 것이다.
파리를 동서로 관통하는 센강의 길이는 약 13km에 달한다. 베르시 공원이 있는 동쪽 톨비악 다리에서 서쪽 아발교까지 걷는데 3~4시간이 소요된다. 센강의 다리는 인도교 4개를 포함해 총 37개이며, 노트르담 성당의 시테섬에서 서쪽으로 이동하며 미라보 다리까지 명소를 품은 강변과 다리들만 거쳐도 훌쩍 2시간이 넘는다. 센강 옆으로는 보행자용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유람선 바토무슈를 타고 전체강 산책로의 윤곽을 살펴볼 수 있다.
센강 옆으로 자전거만 탈 수 있는 길이 나란히 이어지며 자전거 이용자만을 위한 소형 신호등이 마련돼 있다. 센강과 연결되는 생제르맹, 샹제리제 거리를 구경하며 걸으려면 꼬박 하루를 할애해야 한다. 최근에는 가로수가 어우러진 강변 산책로이자 센강의 지류와 만나는 지점에 조성된 생 매트렝 운하가 인기를 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