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에 앞서 광화문사거리에 자리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8층 옥상정원(황토마루정원)에 들르는 것이 순서다. 옥상에 오르면 시야가 넓게 열리면서 경복궁이 한눈에 들어온다. 기품 넘치는 북악산과 수려한 인왕산이 경복궁을 따뜻하게 품고 있다. 경복궁의 자리는 가히 이 도시 최고의 명당이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전격적으로 한양 천도를 결정했다. 이후 한양 어느 곳에 경복궁이 자리하느냐가 가장 큰 관심사였다. 정도전, 하륜, 무학대사 등 풍수지리를 겸비한 당대 최고 학자와 승려의 치열한 논쟁을 거쳐 지금의 북악산 아래에 경복궁이 들어섰다. 그 결과 내사산(內四山)으로 주산 북악산, 좌청룡 낙산, 우백호 인왕산, 안산으로 남산을 배치했고, 그곳에 무려 18.6㎞ 길이의 도성을 쌓았다. 조선 왕조는 경복궁과 한양도성을 건설하며 비로소 실체를 갖췄다.
광화문 앞에서 늠름한 해태상과 눈을 맞춘다. 해태는 ‘부정한 기운을 물리치는 상상 속의 동물’이고, ‘불을 다스리는 물의 신’이다. 광화문을 통해 경복궁 영역으로 들어선다. 홍례문을 지나면 조선 왕실의 상징인 근정전을 만난다. 1395(태조 4)년에 경복궁이 창건되면서 지어진 근정전은 역대 국왕의 즉위식이나 대례 등이 열렸다. 근정전 앞에선 과거시험을 봤으며, 명나라 사신을 위해 불꽃놀이 이벤트를 열기도 했다. 근정전 내부를 보면 왕이 앉았던 옥좌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뒤편의 일월오악병는 옥좌의 위엄을 더해준다.
유심히 봐야 할 것은 근정전 보개천장에 새겨진 황룡 한 쌍이다. 근정전 황룡의 특이한 점은 발톱이 일곱 개인 칠조룡이라는 점이다. 황룡은 용 중의 으뜸이며, 칠조룡은 황룡 중에서도 가장 높은 품격을 자랑한다. 여기에 칠조룡을 넣은 것에 대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경복궁 재건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경복궁은 선조 2년인 1592년 임진왜란 발발로 전소돼 270여 년간 방치됐다. 이후 고종 4년인 1867년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중창됐다. 흥선대원군은 당시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했고, 중국의 권위에 벗어나고자 했다.
최근 서울의 궁궐을 더욱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한복 패션이다. 학생들이 한복 매무새를 자랑하며 한껏 뽐내고 사진을 찍는 풍경은 참 곱다. 하늘하늘 한복을 입고 걸어 다니는 모습이 궁궐과도 잘 어울린다. 외국 여행자들은 연신 기념사진을 사진을 찍으며 흐뭇해한다. 한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외국인의 모습마저 궁궐다운 풍경이 된다.
경회루는 왕이 신하들과 연회를 주재하던 누각이다. 국내 누각 중 규모가 가장 크다. 조선시대 왕들은 경회루를 둘러싼 사각형의 인공 연못에서 뱃놀이를 즐겼다. 경회루는 단종이 숙부 수양대군에게 옥새를 넘겨준 아픈 현장이기도 하다. 경회루 옆의 향원정은 고종이 1873년 세운 건청궁의 전용 휴식처다. 왕과 그 가족들의 사적 휴식 공간이었던 탓에 분위기가 아늑하다.
국립중앙박물관 출입구로 경복궁을 나오면 최근에 개방한 송현 열린 녹지광장이 나온다. 이곳은 과거 미국대사관 직원 숙소로 사용되다가 비로소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광장에서 열리는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덕에 너른 땅을 배경으로 다양한 설치 미술을 즐길 수 있다.
이제 북촌으로 접어든다. 정독도서관과 재동초등학교를 지나 작은 언덕을 오른다. 언덕 아래로 창덕궁건물들이 펼쳐진다. 여기서 바라보는 풍경이 북촌팔경의 1경이다. 창덕궁은 1405(태종 5)년 완공된 이궁이지만, 경복궁보다 오랜 세월 정궁 역할을 했다. 경복궁이 복원이 너무 늦었던 탓이다.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은 현존하는 궁궐의 정문으로는 가장 오래됐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09년(광해군 원년)에 완공해 기특하게도 이때의 모습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 돈화문을 들어서 금천교를 건너니 인정전이다. 엄숙하고 고풍스러운 인정전의 모습에 감탄이 터져 나온다. 여기서 효종·현종·숙종·영조 등 조선 왕조 임금들이 즉위식을 거행하고 왕위에 올랐다. 창덕궁은 봄철 매화가 만개할 때 특히 아름답다. 연분홍 홍매화가 구름처럼 펴면 향기가 온 궁궐을 진동한다.
창덕궁 관람은 후원을 빼놓을 수 없다. 조선시대 궁궐의 후원 가운데 가장 넓고 경치가 아름다워 일찍부터 왕실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지금은 누각 18채와 정자 22채가 남았다. 후원의 최고 덕목은 자연스러움이다. 자연의 구릉과 계곡에 최소한의 인공을 가해 가다듬고 여기에 어울리게 연못과 건물을 배치했다. 후원은 정조의 꿈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정조는 후원에 규장각을 세우고 여러 서고를 지어 왕실도서관을 마련하면서 새로운 정치와 문화를 꿈꿨다. 후원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이 무렵 늦가을이다. 활엽수들은 저마다 단풍을 내뿜으며 후원을 붉게 물들인다.
후원을 나오면 창경궁으로 들어가는 문이 보인다. 창경궁은 1418년 왕위에 오른 세종이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해 지은 궁이다. 창덕궁의 부족한 기능을 일정 부분 보완하는 궁궐로서 자리 잡았다.
창경궁이 결정적으로 훼손된 것은 일제가 창경궁의 전각을 헐고 그 자리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면서부터다. 1911년에는 궁궐의 이름도 창경원으로 바꾸어 궁궐이 갖는 왕권과 왕실의 상징성을 격하시켰다. 창경궁은 해방 후 1970년대까지 줄곧 서울의 대표적 유원지로 이용되었다. 일명 ‘야사쿠라’라는 벚꽃 놀이터로 널리 알려졌다.
춘당지를 둘러본 후엔 작년에 개방된 궁궐담장길을 통해 종묘로 들어선다. 종묘는 조선 왕실에서 가장 신성한 공간이다. 유교를 지배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시대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봉안하고 국가적인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에서 “임금은 하늘의 명을 받아 나라를 열면 반드시 종묘를 세운 다음 조상을 받드는 법이다. 이것은 자신의 근본에 보답하고 먼 조상을 추모하는 것이니 후한 도리이다”라고 했다. 이처럼 종묘는 국가적인 제례를 올리며 왕권의 존엄성을 내외에 과시하고 왕조의 근간을 확립했던 최고의 사당 건축이다.
종묘는 숭고하면서도 엄숙하다. 종묘의 중심 건물인 정전과 박석이 깔린 광장은 보는 사람이 저절로 옷깃을 여미게 한다. 정전 맞배지붕 위로 참나무들의 우듬지가 보이는데, 마치 설치미술처럼 조화롭다. 자연과 어우러진 건축물이 이처럼 엄숙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종묘를 마지막으로 도심 고궁나들길이 마무리된다.
도심 고궁나들길은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생태문화길 중 하나다. 코스는 경복궁-창덕궁-창경궁-종묘 순으로 다니는데, 거리 8.6㎞, 3시간 30분쯤 걸린다. 세 개의 고궁과 종묘를 둘러보다 보면 생각보다 오래 걸리니 시간을 넉넉하게 잡자. 입장료는 4대궁 및 종묘 통합관람권(어른 1만 원, 구입일로부터 3개월 사용)을 이용하면 조금 저렴하다. 창덕궁과 창경궁은 월요일, 경복궁과 종묘는 화요일은 휴무다.
경복궁은 3호선 경복궁역 5번 출구로 나온다. 종묘는 종로3가역과 가깝다.
종묘에서 멀지 않은 ‘광장식당’에는 빈대떡과 육회를 파는 맛집이 즐비하다. 통큰누이네 육회빈대떡(02-2268-3344)은 저렴하고 푸짐해 인기가 좋다. 종묘의 왼쪽 골목인 서순라길에서 가까운 잘빠진메밀 익선점(070-4531-1214)은 막국수와 만두전골이 일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