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기간을 초·중·말기로 3등분해 자산을 배분해야 한다.
초기에는 현금성 자산을 중심으로 운용하고, 갈수록 주식 비중 높이는 것이 좋다.
그리고 ‘마법의 3분법’을 마저 읽어둘 것.
3년전 국내 중견 기업에서 정년퇴직한 정 모 씨는 올해 64세로, 베이비부머 세대다. 남들은 명예퇴직이다 뭐다 해서 정년 이전 회사를 떠나는 마당에 비교적 ‘천수’를 누린 셈인 그는 주위의 부러움을 샀다. 그러나 정작 노후 생활은 어쩐지 편치 않다. 현역 때 충분한 노후 자금을 만들어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노후 자금을 퇴직금과 함께 은행에 넣어두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쓰고 있는데, 언제 바닥날지 몰라 불안한 나날이다.
은퇴자 중 정 씨와 같이 노후 자금을 은행에 넣어두고 생활비에 보태 쓰는 사람이 많다. 주식은 위험하고 다른 투자 대상은 잘 모른다는 이유로 은행예금을 선택하는 것이다. 은행예금은 안전하긴 하지만, 수익성과는 거리가 멀다. 단순 계산으로 은퇴 기간 25년, 노후 자금 100으로 봤을 때 매년 4%씩 쓸 수 있어야 생활비가 모자라지 않는다. 은행예금 금리는 3%대인데, 앞으로 더 내려갈 가능성이 있고, 물가 상승을 감안하면 은퇴 기간 도중에 노후 자금이 고갈될 수 있다.
노후 자금이 적어도 나보다 오래 살게 하는 인출 작전은
은퇴 설계의 핵심 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은퇴 전에는 대개 노후에 쓸 돈을 모으는 데 힘을 쏟고, 은퇴 후에는 그렇게 모은 돈을 쓰면서 살아간다. 전 생애를 놓고 볼 때 은퇴 전을 ‘적립의 시기’라고 한다면 은퇴 후는 ‘인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노후 생활의 질은 적립 못지 않게 인출이 큰 영향을 미친다. 어쩌면 갈수록 수명이 길어지는 고령화 시대에는 적립보다는 인출이 더 중요해질 수 있다.
그런데 대개 모아 놓은 돈을 오래 쓰는 데는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다 퇴직 시기가 임박해서야 얼마 되지 않는 돈으로 장구한 세월을 살아야 한다는 현실에 고개를 떨군다. 만약 노후 자금이 나보다 먼저 죽는다면 나머지 생은 빈털터리로 살아야 한다 걸 의미한다. 노후 준비에서 ‘인출’ 개념을 중시해야 하는 이유다. 노후 자금이 적어도 나보다 오래 살게 하는 인출 작전은 은퇴 설계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노후 자금의 장기 인출 작전을 가로막는 훼방꾼이 있다. 바로 ‘물가’다. 돈이라는 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가치, 다른 말로 구매력이 떨어진다는 속성을 포함한다. 돈은 위대하지만, 물가 앞에선 맥을 못 춘다. 경제 성장에 따라 물가가 오르고 시중에 돌아다니는 통화량이 늘어나게 되므로 돈의 가치는 하락한다. 이를 ‘인플레이션’이라고 한다. 돈의 가치는 기간이 길수록, 물가 상승이 심할수록 하락세에 속도가 붙는다. 주어진 물가 상승 아래 현재 돈의 가치가 절반이 될 때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쉽게 알아보는 ‘72 법칙’이 있다. 72란 숫자를 연간 물가상승률로 나누면 원금의 가치가 반토막 날 때까지 걸리는 햇수를 쉽게 계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연간 물가상승률이 3%라면 24년 뒤 화폐 가치는 절반이 된다. 현재 노후 자금 1억 원을 모아 놓았다면 그때 가서는 5000만 원의 가치밖에 안 된다는 이야기다.
물가를 이겨내면서 돈을 오래 쓰려면 주식 투자를 활용한 자산 관리가 필요하다. 주식은 물가 방어력이 뛰어날 뿐 아니라 다른 어떤 투자 자산보다 수익성이 좋기 때문이다. 투자 자산 각각의 수익률을 따져보자. 10년 만기 국고채 금리가 3.65%이니 채권 수익률은 연 3.65%다. 부동산은 연간 월세 수입을 시세로 나눈 임대수익률로 평가할 수 있다. 대표적인 수익형 부동산인 오피스텔의 전국 평균 임대수익률은 5%다. 부동산이 채권보다는 수익률에서 한 수 위인 것은 분명하다.
인출 초기 주머니에는 안정성이 높은 자산을 담고,
시간이 갈수록 주식 같은 위험 자산의 비중을 높이는 게
노후 기간별 자산 배분의 요체다.
주식의 수익률은 PER(주가 수익 비율)로 환산할 수 있는데, 채권이나 부동산에 비해 다소 복잡하다. PER는 주당순이익을 주가로 나눈 것이다. 현재 국내 증시의 PER는 16이다. 증권시장 상장기업들의 주당 수익 창출력이 1인데 비해 주식은 이의 16배 값에 거래된다는 의미다. 국내 증시 투자자는 16을 투자해 1년에 1의 이익을 얻는다고 말할 수 있다. 수익률로 환산하면 6.2% 정도 된다. 그러니까 PER의 역수를 주식 투자 수익률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수년간 경기 불황으로 기업들의 이익이 줄었음에도 수익률이 이 정도이니 앞으로 경기가 회복된다면 주식의 투자수익률 역시 상승할 가능성이 크다. 자산 운용 포트폴리오에 주식을 반드시 포함시켜야 하는 이유다.
그러나 주식에게는 원금 손실이란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수익성이 좋은 만큼 위험이 크다는 건 투자에 있어 상식이다. 특히 은퇴 초기에 주식으로 노후 자금을 관리하다가 주식 시장이 폭락하기라도 하는 날에는 은퇴 기간 내내 상당한 재정적 어려움을 각오해야 한다. 노후 생활 초기의 자산 상태가 죽는 날까지 삶의 질을 좌우한다. 그 시기에는 인출이 많을 수밖에 없는데 수익률이 저조하면 자산의 고갈 시점이 앞당겨지게 되고 나머지 세월을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
그렇다고 주식을 포기할 수 없다. 원금 손실 위험을 누그러뜨리는 방법은 주식을 시간 속에 묻어두는 것이다. 장기 투자를 하라는 이야기다. 세계적인 주식 투자 전략가인 제러미 시걸은 미국 주식과 국채의 보유 기간별 변동성과 수익률을 실증 분석했다. 그 결과 주식을 10년간 보유하면 변동성이 국채보다 현저히 낮아지며, 17년을 넘게 되면 주식 투자로 손실을 볼 확률이 제로에 가까워진다는 결론을 얻었다. 30년 가까이 되는 은퇴 기간은 주식이나 펀드 같은 위험 자산에 투자해 성과를 내기에 충분한 세월이다. 설사 원금이 깨진다 해도 원금이 회복되길 기다려볼 만한 시간이기도 하다. 은퇴 후 짧은 여생을 보내던 과거에 투자는 권장할 만한 대안이 아니었다. 원금 손실의 위험을 녹일 수 있는 시간이 충분치 않았기 때문이다.
시간 이외에 주식의 안정성을 보강하는 또 다른 방법은 자산 배분이다. 한곳에 ‘몰빵’하지 않고, 가진 돈을 쪼개 여러 자산에 분산 투자하는 기법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산을 이것저것 섞어 ‘하이브리드’를 만들어 주식에 안정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자산끼리 ‘상관 계수’를 이용하면 위험을 낮출 수 있다. 상관 계수란 가격이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정도를 말하는데, 낮을수록 자산 배분 효과가 크다. 예를 들면 주식과 부동산은 상관 계수가 높고, 주식과 채권은 제로에 가깝다. 다만 장기적으로는 자산 가격이 모두 우상향해야 한다. 이런 자산으로 주식, 채권, 부동산, 금, 원자재 등이 있으며, 가장 널리 활용되는 배분 조합은 주식과 채권이다.
한 증권사가 2004년부터 2022년 말까지 미국 S&P500을 추종하는 ETF(상장 지수 펀드)와 미국 국채 ETF를 조합으로 투자한 결과, 연 복리 수익률은 8.94%, 고점 대비 최대 손실률은 24.64%로 나타났다. 만약 각각의 자산에 ‘몰빵’했다면 주식의 경우 연 복리 수익률 9.32%, 고점 대비 최대 손실률 50.80%로, 반토막이 났을 것이다. 채권은 연 복리 수익률 4.98%, 고점 대비 손실률 32.37%였다. 결론적으로 자산 배분은 주식에만 투자하는 경우와 비슷한 수익을 올리면서도 원금 손실 위험을 대폭 낮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자산 주머니를 쓰는 경우
주머니별 자금 배정은 용도에 맞게 달리할 수 있다.
그렇다면 노후 자금은 어떤 방식으로 자산 배분하면 좋을까? 전문가들은 노후 기간별 자산 배분을 하라고 조언한다. 노후 기간을 3등분해 기간별로 알맞은 자산 주머니를 만드는 것이다. 배분 대상 자산은 주로 현금, 채권, 주식, 주식형 펀드다. 경제 상황 변화에 따른 영향이 자산별로 다르기 때문에 이들을 분산시켜 놓으면 시장 위험을 줄이면서 포트폴리오의 변동성도 낮출 수 있다. 인출 초기 주머니에는 안정성이 높은 자산을 담고, 시간이 갈수록 주식 같은 위험 자산의 비중을 높이는 게 노후 기간별 자산 배분의 요체다.
노후 기간별 자산 배분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은퇴 후 10년 동안은 자금의 안정성과 유동성이 중요하므로 양도성예금증서(CD)라든가 국채 같은 현금성 자산으로 주머니를 채운다. 원금을 지키면서 나머지 다른 주머니 속 자산이 불어나는 시간을 벌게 해주는 게 첫째 주머니의 임무다. 다음으로 둘째 주머니에는 은퇴 후 10년부터 20년까지 10년간 쓸 자산을 담는다.
은퇴 후 10년 사이에는 이 주머니를 사용할 일이 없으므로 좀 더 공격적인 자산 운용이 가능하다. 둘째 주머니엔 채권 비중을 크게 해 주식과 섞어 담는다. 시장의 변동성을 누그러뜨리는 시간적 여유를 갖게 할 뿐 아니라 원금을 키우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은퇴 20년 이후를 위한 주머니다. 은퇴 후 20년까지는 이 주머니를 건드리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매우 공격적인 투자가 가능하다. 주식이나 주식형 펀드 위주의 포트폴리오로 주머니를 꾸린다. 20년이란 세월은 시장 변동의 위험을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 만약 첫째 주머니의 자산을 10년 안에 써버렸을 경우 둘째 주머니에서 자산의 일부를 옮겨 충당하고, 그 자리에는 셋째 주머니의 자산을 이전시켜 메우는 식이다. 다행히 시장이 좋아 각 주머니의 자산 크기가 커진다면 이런 재분배는 불필요할 것이다.
예컨대 노후 자금 1억 원을 모았다고 치자. 해외여행을 하는 등 재량적 지출이 많은 초기 10년의 ‘활동기’에는 배분 비중을 높여 전체 노후 자금의 45%에 해당하는 4500만 원을 현금이나 현금성 자산 형태로 첫째 주머니에 담는다. 또 은퇴 10년부터 20년까지 10년 동안은 전체 노후 기간 중 돈이 가장 적게 드는 ‘회상기’다. 초기 활동기의 지출보다 적은 2500만 원을 쓰기로 하고, 채권과 주식을 사 둘째 주머니에 배분한다. 후기는 재량적 지출은 줄지만 의료비가 늘어나는 ‘간병기’에 해당하는데, 회상기보다 돈이 많이 들어가므로 나머지 3000만 원으로 주식이나 주식형 펀드를 구매해 셋째 주머니에 넣는다. 자산 주머니는 자금 용도별로도 이용할 수 있다. 첫째 주머니는 해외여행 등 여유 있는 ‘생활 자금용’, 둘째 주머니는 ‘생활 부족 자금 충당용’, 셋째 바구니는 ‘의료·간병 비용’ 같은 식이다. 이처럼 자산 주머니를 쓰는 경우 주머니별 자금 배정은 용도에 맞게 달리할 수 있다.
서명수 30년 넘도록 은퇴 설계와 자산 리모델링 전문 기자로 활동했고, <중앙경제신문> 증권부와 <중앙일보> 경제부를 거쳐 <이코노미스트> 편집장을 지냈다. 현재 <중앙일보> 편집국 ‘더오래’ 팀 기획위원으로 있으며, 책 <누구나 5년 만에 노후 월급 500만 원 만들 수 있다>, <이솝 우화로 읽는 경제>, <거꾸로 읽는 1% 금리> 등을 펴낸 노후 재테크 베테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