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영역

디폴트 옵션에 대한 이해와
적격상품 선택 전략

글 · 남재우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

앞선 연금 선진국에서는 DC 근로자 대부분이 디폴트 옵션으로 자신의 적립금을 운용해왔다.




디폴트 옵션을 이해하기에 앞서

국가가 퇴직연금이라는 이름으로 의무적으로 연금자산을 축적하도록 강제하는 근거는 개인의 제한된 합리성(rationality)이라고 한다. 100세 시대를 맞아 장수가 축복이 아닌 저주가 되지 않으려면 일정 규모의 연금자산은 필수적이다. 하지만 근시안적(myopic)일 수밖에 없는 개인이 먼 미래를 제대로 준비하긴 어려우므로 국가가 제도로 강제해야 한다는 논리다. 연금자산을 많이 쌓기 위해 빠짐없이 납부하고, 중간에 빼지 말고, 오랫동안 많이 불리면 된다. 이 가운데서 사각지대 해소와 중도인출 방지는 제도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개인이 장기적으로, 지속적으로 금융 자산을 제대로 운용할 수 있다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 또한 개인의 제한된 합리성 때문이다. 이것이 가능했다면 처음부터 퇴직연금이라는 강제 제도는 필요 없었을 것이다. DC형의 적립금 운용에 있어 이러한 제한된 합리성을 완화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수라는 의미다. 바로 DC형 퇴직연금 제도에서 디폴트 옵션의 역할이다. 앞선 연금 선진국의 DC 근로자 대부분이 디폴트 옵션으로 자신의 적립금을 운용하고 있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이러한 배경에서 국내 퇴직연금에 디폴트 옵션이 도입되었다. 디폴트(default)는 별도의 선택이 없을 때 자동으로 주어지는 값을 의미한다. 하지만 우리의 디폴트 옵션은 자동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을 때 적용될 상품을 미리 선택해 놓아야 한다. 디폴트 옵션이 ‘사전지정운용제도’라 불리는 이유다. 디폴트 옵션보다는 ‘대표상품제도’의 일환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대표상품제도는 자동으로 대신 선택해주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인증된 상품 중 근로자가 보다 쉽게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제도적 장치를 의미한다. 비록 이렇게 왜곡된 형태의 디폴트 옵션으로 출발했으나, 다수의 DC 근로자가 연금자산의 장기 운용에 적합하게 잘 설계된 사전지정운용 상품을 선택한다면 결과적으로 디폴트 옵션 본연의 도입 취지에 부합할 것으로 기대한다. 그만큼 사전지정운용제도에서 개인의 선택과 판단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디폴트 옵션 적격상품 선택 전략

그렇다면 어떤 상품을 선택해야 할까? 실적배당형은 저·중·고위험 등 3개 위험군으로 제시된다. 해외 사례를 보면 선택 없이 적용되는 디폴트 옵션은 대상 근로자의 평균적인 위험 성향보다 약간 보수적인 위험의 실적배당형으로 제시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근로자 개인의 위험 성향 수준, 내지는 그보다 한 단계 아래의 위험군에서 상품을 선택하면 될 듯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디폴트 옵션의 대상이 되는 근로자 중에서 자신의 위험 성향을 정확히 아는 경우는 드물다. 디폴트 옵션은 정해진 기한 내에 정상적인 운용 지시를 내리지 못한 근로자를 대상으로 하며, 자신의 위험 성향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을 정도로 투자에 관심 있는 근로자가 구체적인 운용 지시를 내리지 않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위험이란 투자에 있어 가장 중요한 개념이지만 일반인이 제대로 이해하기엔 가장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다. 따라서 위험군별로 제시되는 기대수익률을 참조해 상품을 선택할 것을 제안한다. 디폴트 옵션의 적격상품은 위험에 대한 보상, 즉 위험을 많이 취할수록 그만큼 기대수익이 올라가는 상품으로 승인되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때 수익률이 기대수익이지, 미래의 실현수익은 아니라는 점이다. 장기투자를 전제로 할 때 기대할 수 있는 평균수익률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이를 가늠하기 위해선 개별 상품의 장기 위험수익특성(Risk Return Profile)을 참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 원리금보장상품이라 불리는 단기 예금상품이 있다. 디폴트 옵션 제도의 도입 목적은 원리금보장상품 위주의 퇴직연금 운용을 실적배당형으로 전환하려는 데 있다. 원리금보장상품은 자금의 임시적인 보관 수단이지, 장기적인 운용 수단이 아님을 유념해야 한다. 해당 근로자의 90% 이상이 원리금보장상품인 초저위험으로 디폴트 옵션을 선택하는 것이 현실이다. ‘초저위험’으로 작명되었지만, 이 단기 예금은 초저위험이 아니라 무위험이다. 알아둘 것은 위험이 없으면 수익도 없다. 장기적으로 원리금보장상품의 수익률이 물가상승률을 넘기 힘든 이유이다.






실적배당형 디폴트 옵션의 위험 수익 특성

디폴트 옵션의 적격상품으로 제시된 212개 상품의 위험수익 특성을 분석한 결과, 1년 수익률에선 앞서 언급한 위험에 상응하는 기대수익률의 관계가 명확하게 보이지 않았다. 중위험상품의 위험 정도는 저위험상품보다 큰 데도 불구하고, 특정 연도에서는 중위험상품의 수익률이 오히려 낮게 나타나기도 했다. 하지만 3년(2020.6~2023.5) 동안의 연평균 수익률을 비교해 보면 위험과 수익 간의 관계는 보다 뚜렷해진다. 저위험군이 3.45%의 위험량에 3.41%의 수익률을 보인 데 비해 고위험군은 10.19%의 위험량에 7.22%의 수익 성과를 시현하는 식이다. 이를 위험조정수익률 지표 중 하나인 샤프지수로 보면 고위험으로 갈수록 0.30에서 0.47까지 높아지는 구조이다. 따라서 이러한 기대수익률의 적립식 펀드를 은퇴 시점까지 유지했을 때 어느 정도의 연금자산을 기대할 수 있는가를 기준으로 위험군을 선택한다. 이렇게 자신에게 적합한 위험군이 선택되면, 그 안에서 어떤 상품을 고를 것인가(개별 상품의 특성과 이를 운용하는 자산운용사의 역량과 안정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디폴트 옵션은 운용 기간 중 적극적인 포트폴리오 조정이나 관리가 이뤄지지 않고 은퇴까지 그대로 간다고 생각해야 한다.

현재 디폴트 옵션으로 제시되는 실적배당형 적격상품 대부분은 TDF(Target Date Fund) 조합이란 특성을 띤다. TDF는 은퇴 시점이 다가올수록 포트폴리오에서 위험자산 비중을 점진적으로 줄여가는 자산배분형 펀드의 일종이다. 특정 위험량을 목표로 하는 TRF(Target Risk Fund)와는 다르게 특정 날짜(은퇴 시기)에 맞춰 위험량을 스스로 조정한다는 특징이 있다. 개인이 신경 쓰기 힘든 사후 관리, 즉 포트폴리오 조정(rebalancing)이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자산배분형 펀드라는 점이 디폴트 옵션의 속성에 부합한다. 하지만 위험군별로 특정 위험량이 유지되어야 하는 사전지정제도에서는 이러한 특성이 부적절할 수 있다. 특히 단일 TDF가 아닌 서로 다른 은퇴 시점 TDF의 조합으로 제시되는 적격상품에서는 TDF 고유의 특성과 장점이 희석될 수 있다. TDF는 단일 빈티지로 제시되는 것이 바람직하며, 이러한 TDF 상품은 기존 위험군 분류 체계와는 별도로 승인될 필요가 있다. 즉, 전체 상품을 BF(Balanced Fund)와 TDF로 구분하고, 가입자의 적합성 원칙이 적용되는 위험군 분류는 BF에만 적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퇴직연금사업자의 수탁자 책임

적격상품을 설계하고 제시하는 금융 기관 ‘퇴직연금사업자’에는 가입자 최선의 이익에 부합해야 한다는, 이른바 수탁자 책임(Fiduciary Duty)이 주어진다. 우리나라에서는 수탁자 책임이 선언적 의미로 인식되는데, 오랜 신탁의 역사를 가진 서구에서는 퇴직연금사업자가 그 책임을 다하였는가를 두고 법적 소송이 야기될 만큼 엄중한 책무이다. 퇴직연금사업자가 디폴트 옵션을 설계하는 과정에서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따라서 개별 근로자의 선택을 전제로 하는 국내 디폴트 옵션 제도에서는 적격상품의 경쟁력이 퇴직연금사업자의 경쟁력임을 기억하자.




남재우 자본시장연구원 펀드연금실 연구위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