엇비슷하게 그려진 네 장의 초상은 모두 남자의 옆모습을 담고 있다. 그런데 그 얼굴과 옷, 머리 모양이 보면 볼수록 특이하다. 뭉툭한 코는 서양배로, 붉은 볼은 잘 익은 복숭아로, 입술은 체리로 그려졌다. 또 다른 초상에서는 고목의 울퉁불퉁한 가지와 나무뿌리들이 각기 목과 머리카락을 구성하고 있다. 세 번째 초상은 머리카락과 코의 모양을 불타오르는 숯덩어리와 달아오른 쇠붙이들로 그려놓았고 네 번째 초상의 얼굴은 흐르는 물의 요소들을 본떠서 그려졌다. 멀리서 보면 사람의 옆모습, 가까이서 보면 여러 사물의 집합체인 이 네 장의 초상은 이탈리아 화가 주세페 아르침볼도(1526/7~1593)가 그린 ‘사계절’ 중 여름과 겨울 그리고 ‘4원소’ 중 불과 물이다.
엄숙한 고전주의 미술관과 영 어울리지 않는 이 괴상한 그림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결정적으로 우리를 놀라게 만드는 사실은 이 초상들이 그려진 연도가 1560년대, 지금으로부터 500년 가까운 과거라는 점이다. 기술이나 주제보다 남다른 아이디어가 더 중요해진 현대미술의 요소를 골고루 갖춘 이 그림들이 근대도 아닌 500년 전에 그려졌다는 사실은 우리를 다시금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아르침볼도의 그림을 소장한 미술관들은 대부분 큰 전시실이 아닌 곁방에 아르침볼도의 그림만 따로 전시해 놓고 있다. 그의 그림이 하도 유별나서 같이 전시해둘 만한 작품들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현대의 우리 시각으로 봐도 이처럼 특이한데 500년 전에는 터무니없는 그림만 그리는 미치광이 화가로 매도되지 않았을까 싶지만 의외로 아르침볼도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궁정화가였다. 궁정화가의 주된 임무는 국왕과 왕비의 초상을 그리는 일이다. 자연히 궁정화가의 직분은 보수적이고 위엄 있는 그림을 주로 그리는 화가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남아 있는 작품들이 말해주듯 아르침볼도는 보수적 경향이나 위엄과는 한참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아르침볼도는 16세기 초반, 밀라노의 화가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자연히 아버지의 직업인 화가를 물려받았는데 초창기의 이력 중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성당 스테인드 글라스의 디자이너로 자신의 커리어를 시작했다는 점이다. 스테인드글라스의 중요한 기능은 부분으로 떼어 보아도, 또 전체적으로 보아도 조화로운 장면을 재생하는 데에 있다. 그리고 스테인드글라스는 회화가 아니라 장식이다. 이러한 스테인드글라스의 특성은 화가로 방향을 전환한 후에도 아르침볼도의 개성으로 고스란히 남았다.
1562년 아르침볼도는 합스부르크가 페르디난트 1세의 궁정화가로 임명되었다. 궁정화가로서 그린 그림들은 대부분 시간이 흐르면서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그러나 그의 기상천외한 그림들은 화가 당대부터 큰 인기를 얻었다. 특히 예술품 수집광인 황제 루돌프 2세가 그의 그림을 좋아했다. 아르침볼도의 초상은 대부분 동일한 남자의 옆모습을 담고 있는데 이 초상의 주인공이 루돌프 2세다. 개성 넘치는 예술 작품을 선호했던 루돌프 2세가 아르침볼도에게 자신의 초상을 기발한 아이디어로 구성해 보라고 지시했을 가능성이 크다.
아르침볼도가 활동하던 16세기 후반은 일종의 과도기적 경향인 마니에리스모 스타일이 유행하던 시기였다. 마니에리스모는 조화와 비례로 이상적인 세계를 보여주는 르네상스와 역동적이고 활달한 바로크 사이에서 돌출한 경향으로, 비례를 고의로 무시하거나 화가 개인의 기이한 상상력을 발휘하는 장르였다. 기이한 상상력 하면 아르침볼도를 따라올 화가는 없었다. 더욱이 아르침볼도의 그림은 자연의 요소들을 초상에 응용했다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자연의 사물을 하나하나 정교하게 그리고, 그 결과물의 조합으로 인간의 초상을 만들어낸 아르침볼도의 그림은 자연과 인간 사이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는 철학적 가르침을 주기도 한다. 아르침볼도의 그림은 후대 화가들, 특히 살바도르 달리를 비롯한 초현실주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아르침볼도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들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네 장의 초상으로 그린 ‘사계절’과 물, 불, 흙, 공기의 ‘4원소’다. ‘사계절’의 모델은 루돌프 2세, ‘4원소’의 모델은 화가 자신이라고 한다. 마드리드 미술 아카데미, 루브르 박물관, 빈 미술사 박물관 등에 나뉘어 소장된 ‘사계절’은 각기 꽃, 과일과 곡식, 열매와 낙엽, 고목과 나무뿌리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표현한 초상이다. 네 장의 초상은 단순히 계절만 그린 것이 아니다. 튤립 귀와 애벌레 눈썹을 가진 봄의 남자는 장미꽃 입술을 벌리며 미소 짓는 젊은이이고 곡식 색깔과 열매 모자로 한껏 치장한 여름의 남자는 원기 왕성한 장년으로 보인다. 그에 비하면 포도와 낙엽 머리카락, 버섯 귀의 가을 남자는 완연히 나이 든 중년이다. 거칠거칠한 나무껍질 피부의 겨울 남자는 누가 봐도 노인의 모습이다. ‘사계절’은 기발한 초상인 동시에 계절의 변화, 인생의 유장한 흐름까지도 보여주는 그림이다. 아르침볼도를 단순히 유별한 아이디어를 가진 괴짜 화가라고만 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