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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엔드와 클래식,
요즘 트렌드 이야기

글 · 한다혜 소비자학 박사

“저 오늘 플렉스(Flex)했어요!”
몇 년 전부터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플렉스’라는 말이 유행했다.
사전적 의미로는 ‘구부리다’, ‘몸을 풀다’라는 뜻이지만, 일상에서는 주로 돈이나 차, 명품 등을 통해 자신의 부를 과시할 때 사용된다.







플렉스 시대에서 스텔스 시대로

SNS상에서는 ‘하루 1,000만 원 쓴 원데이 플렉스’, ‘명품 플랙스했어요’ 같은 콘텐츠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렇게 플렉스하는 이유는 남들과 나를 구별하고 싶은 구별짓기의 심리 때문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소비물을 통해 자신을 보여주고 타인과 구별하고 싶어 한다. 이것이 바로 구별짓기, 즉 과시의 욕망이다.

그런데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지나면서 최근 구별짓기의 풍속도가 급속도로 바뀌고 있다. 고물가·고환율 등 불안한 경제 상황이 지속됨에 따라 자신의 부를 직접적으로 과시하는 것에 대한 부담이 커지면서, 드러내는 플렉스의 시대는 저물고, 바야흐로 조용한 과시를 즐기는 스텔스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스텔스’ 소비란 소비재를 자랑하며 자신의 부를 대놓고 표현하기보다는 하이엔드 라이프 스타일이나 클래식한 소비물을 통해 자신의 취향을 간접적으로 나타내는 트렌드를 의미한다. 최근 한국 시장에서의 스텔스 소비는 여러 가지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지금부터 요즘 사람들의 조용한 구별짓기 방법을 살펴보자.







조용한 명품으로 드러내는 진정한 안목

클래식한 것이 곧 트렌디한 것이다. 한동안 유행하던 빅 로고는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고, 실용적인 로고리스(Logoless, 상표가 보이지 않는) 디자인 명품들이 각광받고 있다. 기존에는 누가 봐도 명품임을 한눈에 알 수 있는 로고와 자유분방한 패션이 인기를 끌었다면, 최근에는 단정하고 미니멀한 절제된 디자인의 조용한 명품(Quiet Luxury)이 더욱 사랑받고 있다. 사실 이런 명품들은 상표가 눈에 띄지 않기 때문에 의류 안감이나 택을 보거나 가방을 열기 전까지는 어떤 브랜드인지 한눈에 파악하기 어렵다. 그 대신 고급스러운 소재를 사용하고 특정 브랜드만의 시그너처 디자인으로 아는 사람들만 알아보는 가치를 표현한다. 한 마디로 아는 사람들만 아는 명품인 것이다. 이런 조용한 명품 트렌드가 어찌 보면 다소 심심할 수 있지만, 일시적인 유행이 아닌,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클래식이 곧 유행이 되었다는 점에서 반기는 분위기다.

조용한 명품이 화제가 되면서 심지어 ‘올드 머니(Old Money) 룩’이라는 용어도 생겨났다. 이는 명품 브랜드의 로고나 패턴을 강조하는 벼락부자들의 뉴 머니(New Money) 룩과는 정반대로, 태어날 때부터 부유한 삶을 살아온 전통적인 상류층 부자의 느낌을 살린 스타일을 뜻한다. 올드 머니 스타일은 미국 MZ세대에서부터 그 인기가 시작되었는데, 최근 국내에도 급속도로 확장되고 있다. 일례로,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 등 SNS상에서는 꼭 명품을 사지 않아도 쉽게 따라할 수 있는 올드 머니 룩 코디법을 알려주는 콘텐츠가 등장했다. 이뿐만 아니다. 심지어는 AI 아트를 통해 구현한 올드 머니 스타일의 가상 인플루언서 역시 인기다. 고풍스러운 금발의 헤어스타일에 올 화이트 룩을 입고 승마와 요트를 즐기는 가상 인플루언서는 이미 SNS의 핫한 셀럽으로 등극했다.







라이프 스타일 취향으로 드러내는 특별한 나

스텔스 소비의 대상이 초고가 명품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은근히 드러내는 고급 라이프스타일이 진정한 스텔스라고 할 수 있다. 미국에서는 몇 년 전부터 고가의 유기농 슈퍼마켓 ‘에러완(Erewhon)’이 큰 인기다. 최고의 유기농 식재료를 보유한 이곳은 유명 스타들이 장을 보는 곳으로도 유명한데, 이 슈퍼마켓에 다니는 것만으로도 선망의 대상이 된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미국 중산층 라이프 스타일의 바로미터라 불리는 웰니스 브랜드 ‘구프(Goop)’도 마찬가지다. 일시적으로 유행하는 상품이 아닌 남다른 라이프 스타일을 제안하는 상품을 큐레이션하는 콘셉트로 많은 이들이 동경하는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최근 국내에서도 이와 비슷한 라이프스타일 편집숍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보마켓’은 감각적인 생필품에서부터 해외 식료품까지 판매하며 복합 문화 공간으로 성장하고 있으며, 메종 드 구르메, 드로게리아, 먼치스앤구디스 등 다양한 수입 식료품을 취급하는 그로서리 마켓들도 주목받고 있다. 심지어는 하나의 식재료만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원 푸드 그로서리(One Food Grocery)를 방문하며, 자신의 취향을 과시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치즈에 진심인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보았을 치즈 전문 그로서리, 이외에도 해산물 전문 그로서리, 버터 전문이나 소스 전문 그로서리 등 다양한 식재료의 원푸드 그로서리가 오픈하는 족족 인기를 누리고 있다. 식문화에 대한 식견이 나를 표현하는 과시의 원천이 되면서, 그로서리 마켓은 라이프 스타일 구별짓기의 주된 수단으로 기능하고 있다.




운동, 자기 관리 그 이상의 활동

운동도 단순히 체력 증진이나 건강 관리의 영역을 넘어 라이프 스타일의 주요 영역이 되면서, 구별짓기의 주된 수단으로 자리 잡고 있다. 특히 대표 고급 스포츠로 불리는 골프와 테니스의 인기가 뜨겁다. 골프와 테니스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면서 관련 스포츠용품과 패션 시장 역시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장비에서부터 멋진 복장까지 모든 것을 갖추고 운동을 즐기는 모습은 다른 이들의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하다. 비슷한 이유에서 최근에는 스쿠버다이빙이나 윈드서핑 역시 떠오르는 럭셔리 스포츠로 주목받고 있다.

심지어는 휴가를 떠나서도 운동을 즐기는 ‘스포츠케이션(Sportscation)’이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다. 호텔에서 헬스장을 가는 것은 물론이고 프라이빗한 룸에서 체험하는 명상 프로그램이나 요가 클래스를 신청해 즐기는 것이다. 이러한 트렌드에 발맞추어 여가 시장에서도 다양한 운동 프로그램을 선보이고 있다. 일례로, 신라호텔은 물 위에서 요가를 즐기는 플로팅 요가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그랜드 하얏트는 야외 잔디 테니스 코트를 갖추고 있어 사전 예약을 통해 레슨을 받을 수도 있다.




다시 돌아온 클래식 시대

경험해보지 못한 옛 시절의 낭만을 동경하는 젊은 세대가 많아지면서 클래식한 고전 아이템을 통해 취향을 과시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요즘 소비자에겐 최고 성능이나 최신 사양을 갖춘 상품보다 빈티지 상품이 더욱 인기다. 일례로, 최근 7080 세대의 전유물 같았던 아날로그 음악의 매력에 빠진 2030 세대가 늘고 있다. 이들은 LP와 턴테이블 집을 꾸미기도 하고, 주말에는 벽면 가득 빽빽하게 음반이 가득 꽂힌 LP바에 가서 음악을 감상하기도 한다. 캠코더나 디지털 카메라 역시 인기다. 흐릿하고 불완전하게 나오는 낡고 오래된 느낌의 이미지는 이 시대를 경험해보지 못한 세대에겐 새롭고 낯선 느낌으로 다가온다.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컴퓨터나 휴대전화로 일일이 옮겨야 하는 귀찮은 과정 역시 이들에겐 신선한 경험이다. 다양한 취향을 경험하고 이를 과시하는 것이 중요한 요즘 소비자에게 클래식함만이 줄 수 있는 아우라는 전에 느껴본 적 없는 특별함으로 다가오고 있다.

다시 돌아온 스텔스 소비, 클래식의 시대는 우리에게 많은 의미를 선사한다. 대놓고 드러내기 보다는 아는 사람만 아는 조용한 명품으로 자신의 부를 과시하고, 하이엔드 라이프 스타일로 자신의 취향을 표현하는 스텔스 소비는 나만의 취향과 본질에 집중하는 소비로 흐름이 전환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무엇보다도 하루가 다르게 빠르게 발전하는 디지털 시대에 다소 비효율적이고 불편한 아날로그를 유연하게 넘나드는 소비자의 여정은 앞으로의 행보가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한다혜 <트렌드코리아> 시리즈의 공저자이자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 연구위원이다. KBS1 라디오 ‘성공예감’ 고정 출연을 비롯해 다수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했으며, 삼성·LG·SK 등 기업 소비 트렌드 기반 미래전략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