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 신병주 교수에 따르면 집현전은 ‘세종의 싱크탱크’였다. 실제로 세종은 왕위에 오른 후 집현전을 정식 국가 기관으로 승격시켰다. 집현전에 모인 젊고 우수한 인재에게 세종은 독서와 학문 연구, 이를 바탕으로 한 정책 결정과 국가 주요 간행물 편찬을 맡겼다. 그리고 집현전을 통해 농사, 의학, 역사, 의례, 국방까지 분야별로 <농사직설>, <향약집성방>, <삼강행실도>, <자치통감>, <국조오례의>, <역대병요> 등이 발행됐다. 세종 스스로 학문에 밝았지만, 홀로 정책을 결정하지는 않았다. 집현전 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반영했고, 다수의 의견을 존중했다. 집현전은 세종이 추구한 ‘함께하는 정치’의 구현이자, 그곳에서 등용한 인적 자원은 15세기 조선 문화의 진일보를 이룬 구심점이 됐다. 세종은 네트워킹을 이용할 줄 아는 군주였다. 집현전 학자들 외에 다양한 인재와 함께 공부했는데, 재위 기간 중 경연 횟수가 1,898회에 달한다. 경연은 임금이 경전을 공부하고 토론하는 자리로, 경연으로 일가견 있는 또 다른 왕은 정조다. 공부를 즐겨했던 세종은 왕위에 오른 후 굶주리는 백성, 농사 실패를 겪는 백성에 주목했다. 천민 출신과학자 장영실을 등용해 해시계 등 각종 과학 기구를 개발, 농업 발전을 꾀했다. 또 박연을 발탁하며 궁중음악을 완성했다. 이 밖에 황희, 신숙주, 정인지, 성삼문 같은 인재가 등장한 배경엔 세종의 인사 정책, 인재를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기용했던 선구안과 네트워크 능력이 있었다. 인재들은 기회를 준 세종에게 자신의 분야에서 빛나는 업적으로 화답했다. 한편 날씨를 예측하지 못해 좌절을 겪던 농업 현실을 개선하고자 농서 <농사직설>을 보급했지만, 백성들이 글을 읽지 못하자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했다. N잡러 세종을 움직이게 했던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원씽(One Thing)은 결국 ‘백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