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다닐 때 한 후배가 내게 물었다. 학교에 다니는 게 힘들어서 휴학을 결정했는데, 그동안 아무것도 안 하면 자기만 뒤처질까 너무 두렵다고.
대체 어떡하면 좋겠냐고. 그는 휴학하고서도 무언가를 공부하거나 일을 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토익이라든지, 인턴이라든지 하는 ‘건실한’ 활동들.
100세 시대에 고작 6개월 쉬는 것이 이렇게나 두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이상하다. 과학기술이 발전할수록 우리의 수명은 길어지는데, 그 긴 인생이 결정되는 시기는 왜 점점 더 앞당겨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걸까. 살날은 많이 남았는데 그것이 너무도 이르게 결정되는 바로 그 상황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피로해지고, 모든 것에 조급해지는 건 아닐까? 그러니까, 우리가 휴학 한번을 할 때도 그렇게 망설이고 주저하는 이유는 어쩌면 모든 것이 너무도 빠르고, 더 빨라지는 사회, ‘가속사회’ 때문은 아닐까?
우리는 너무 빠른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계속해서 발전하는 통신 기술과 이에 따라 빨라지는 소통에 맞추어 우리는 다양한 일을 수없이 번갈아 가며 수행할 수 있는 속도를 요구받는다. 사람의 몸과 정신은 외부 환경의 영향을 굉장히 많이 받는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하지만, 그건 전적으로 주체적이거나 능동적인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 많은 경우에 인간은 수동적으로 환경에 맞춰진다.
세상이 빨라지면,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그 속도에 맞추어 살아가곤 한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우리가 ‘가장 보통의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청년기, 그러니까 20대 정도부터 늦어도 30대 초반에는 꽃피우길 요구한다. 그렇다면 ‘가장 보통의 삶’은 대체 뭘까.
수험생활 도중에 희귀 난치질환인 크론병을 진단받고 대부분의 ‘정상적인’ 진로가 막힌 나에게 그것은 언제나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내가 공부하고 관찰한 바에 따르면 사회에서 요구하는 가장 보통의 삶은 다음과 같다.
학창시절에는 착실하게 공부하고, 대학에 진학하고, 대학에서는 사랑에 빠지고 여행을 다니며 경험을 넓히면서 대외활동과 인턴십 등을 통해 취업의 가능성을 높인다(여행조차도 자기소개서의 소재로 활용될 때가 많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안정적인 직장에 들어가고, 괜찮은 사람을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가정을 꾸리고, 육아를 하고, 은퇴 이후에는 직장 생활 중에 쌓아둔 돈과 자식의 용돈으로 살아가는 그런 삶.
그런데 이런 삶을 누리는 사람이 지금 사회에서 정말 다수일까? 이것이 ‘가장 보통의 삶’이라면, 취업에 실패하고, 연애와 결혼을 포기한 청년들에 대한 그 많은 뉴스는 무엇일까? 어느새 ‘보통’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묘사하는 단어보다,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규정하는 단어가 되어 있는 것만 같다. ‘보통의 삶’에서 벗어난 사람이 그렇게나 많다면, 우리는 지금 사회에서 ‘보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시 물어야만 한다.
이런 사회에서 청년들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보통’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는 딜레마에 빠진다.
가속사회에서 수많은 청년들은 ‘보통’에서 튕겨 나온다. 무언가를 차곡차곡 쌓아나가는데 실패하는 삶들이 있다. 그런 삶들이 점점 더 많아진다. 그래서 당장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청년들은 다시 공무원이 되기 위해 수험생이 되거나 피투자자(investee)*가 된다.
* 피투자자 : 자신의 포트폴리오를 꾸미고 투자자를 찾아 헤매는 사람
당장의 생계를 직접 유지해야 한다면 배달 라이더나 택배 상하차, 편의점 아르바이트와 같은 일시적이고 불안정한 일자리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런 와중에 비트코인과 주식으로 한탕을 노리며 경제적 독립과 조기 은퇴를 꿈꾸는 ‘파이어족’ 청년들이 많아지는 건 무언가를 쌓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특권의 한 형태가 되어 버린 가속사회의 일면이다.
얼른 무엇이라도 되길 요구하고, 얼른 무엇이라도 되지 못하면 패자부활전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 가속사회에서 청년들은 가장 안정적인 길과 가장 불확실한 길들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여기서 가장 보통의 삶은 가장 어려운 과제가 되어버린다.
보통의 삶을 고민하게 된 것은 보통의 삶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크론병으로 인해 나는 많은 걸 포기했다. 재수학원에서 담임선생님은 사범대 진학을 권유했지만, 나는 경제학과에 진학했다. 발견도, 진단도 꽤 빠른 편이었던 나는 진단 후 몇 달 만에 만성적인 두통, 관절통, 복통과 같은 주요 증상이 거의 사라졌다. 내 몸으로 할 수 있는 것보다는 내가 좀 더 하고 싶은 일에 도전해 보고 싶었다. 아니, 그때만 해도 나는 내 몸으로 꽤 많은 걸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가장 아픈 시기의 증상들은 몸에 만성적인 피로와 체력 저하를 가져왔고, 이제는 내 몸에 생기는 문제가 질병 때문인지 아닌지 분간조차 하기 어려운 단계에 이르렀다. 크론병과 같은 자가면역질환을 겪는 이들에게는 생각보다 흔한 감각이다. 아파서 힘든 건지, 지쳐서 힘든 건지, 게으른 건지 나 자신도 정확히 알 수 없다. 이런 몸으로 견딜 수 있는 업무 강도에는 한계가 있다.
짧게 준비하던 로스쿨 진학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기업의 입사지원서에는 하나같이 군 복무에 대한 항목이 있었고, 나는 군 면제 사유를 적어야 했다. 그렇게 ‘정상적인’ 진로들을 포기하며 뒤늦게 깨달았다. 재수학원 담임선생님이 사범대를 권한 게 단지 일정한 생활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주변 친구들이 취업이나 창업을 위해 무언가를 차곡차곡 쌓아나가고, 로스쿨에 진학하고, 대기업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건 그저 몇 안되는 아픈 사람만의 현실이 아니다.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이 더욱 ‘보통’의 고민이다.
내가 가속사회를 조금이나마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는 이유는 내가 표준에서 조금 벗어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다른 삶의 방식을 모색해야 했다. 남들처럼 무언가를 차곡차곡 쌓기 어려운 상황에서, 내가 차분하게 나의 삶을 고민할 방법은 일단 내가 지금 처한 상황을 묵묵히 견뎌내는 것이었다. 청년이라는 과도기, 질병의 완화라는 과도기를 충분히 견뎌내는 것.
우리는 지금 사회에서
‘보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시 물어야만 한다.
크론병을 겪는 ‘아픈 청년’으로 살아가면서 배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견디는 일에 관한 것이었다. 언제 통증이 찾아올지 모르는 불안, 언제 끝날지 모르는 통증을 견디는 것뿐 아니라, 어쩌면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를 안정된 삶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견디는 것. 결과가 무엇이 되든지, 그 결과로 나아가는 과정을 있는 힘껏 살아내는 것. 그것은 가속사회에서 나를 지키고, 아픈 나를 받아들이며, 내 나름의 삶을 만들어나가는 일이었다. 그 자체로는 어떤 것도 보증해주지 않고, 자신이 무엇을 쓰고 무엇을 하는지로 계속해서 정의되는 ‘작가’라는 직업을 갖게 된 것은 그 때문이었을까.
최근 케이팝 아이돌 논란과 그 안에서 팬들이 겪는 분투에 관한 책 《망설이는 사랑》을 쓰며 만난 팬들에게서 배운 것은, 망설임 그 자체로 하나의 선택지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학교폭력이나 갑질, 혹은 인성 논란처럼 증거가 뚜렷하지 않아서 경찰도 법원도 제대로 된 판단을 내려주지 않는 논란들 앞에서 팬들은 계속해서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계속해서 되묻는 치열한 과정이었다. 이러한 기나긴 과정이 있어야만 우리는 비로소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일찍 끝날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과도기’나 ‘과정’에 충분히 머무를 수 있어야 그것을 잘 끝낼 수도 있다. 이런 팬들은 재빠르게 판단하고 결론을 내리길 요구하는 대중 앞에서 자기 나름의 속도를 찾아 나가고 있었다.
가속사회 안에서 조금 느린 속도로 다른 삶을 고민하는 데에도 필요한 것은 망설임이다. 우리는 보통의 삶이 무엇인지 되묻고, 우리에게 맞는 속도를 찾아야 한다. 가속사회에 휩쓸려 과도기를 빠르게 지나쳐 보내는 대신,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충분히 과도기를 살아내야 한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세상이 요구하는 삶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삶을 찾을 수 있다. 그러니 우리, 선택의 기로에서 망설이기를 망설이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