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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K 컬쳐

발길 닿는 길(국내편)

치욕의 역사 딛고 거듭난
산성의 걸작

광주 남한산성

글 · 사진 진우석 
역사상 남한산성만큼 치욕스러운 상처를 간직한 곳도 드물다. 1637년 병자호란의 굴욕을 겪었고, 조선 후기에는 천주교인 박해 사건이 있었으며, 군사정권 시절엔 육군교도소가 들어서기도 했다. 지금의 남한산성은 숲과 문화유산이 어우러진 서울근교의 대표 명소 자리잡았다. 2014년 6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그 가치를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 남한산성 트레킹은 사계절 좋지만, 특히 이 무렵 단풍과 산성이 어우러진 모습은 깊은 울림을 준다.

조선시대 한양을 지키는 동쪽 요새

조선시대에 한양을 지키는 4대 요새는 북쪽의 개성, 남쪽의 수원, 서쪽의 강화, 동쪽의 광주였다. 그중 경기도 광주는 남한산성을 말한다. 남한산성은 뼈아픈 패배의 역사를 담고 있는데, 1637년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47일간 항전하다가 항복하고 만다. 남한산성의 성문을 열고 송파의 삼전도(三田渡)로 나가 청태종에게 무릎을 꿇었다.

남한산성은 백제 온조왕 당시의 성으로도 알려졌다. ‘백제 온조왕 13년에 산성을 쌓고, 남한산성이라 부른 것이 처음’이라는 구절이 <고려사>와 <세종실록지리지>등에 나온다. 학계에서는 673년(신라 문무왕 13) 한산주에 쌓았다는 주장성(晝長城, 일명 일장성)을 지금의 남한산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남한산성은 인조가 작정하고 정비한 천혜의 요새다. 당시 국제적으로는 후금의 위협이 고조되는 상황이었고, 안으로는 이괄이 일으킨 반란으로 인조가 한양을 빼앗기고 충남 공주에 있는 공산성으로 피하는 수모를 겪었다. 남한산성은 1624(인조 2)년부터 축성 공사를 시작해 2년 만인 1626년 완공했다. 성은 스님들이 쌓았는데, 당시 승병을 총괄하는 승도청(僧徒廳)에서 벽암대사 각성(1575~1660)을 중심으로 모인 전국의 승병들이었다.

트레킹의 출발점은 산성로터리다. 출발에 앞서 남한산성행궁을 둘러보는 게 좋다. 산성로터리 일대는 나들이객과 산꾼으로 북적이지만, 의외로 행궁 안에는 사람이 적다. 본래 행궁은 임금이 거처하는 상궐 73칸, 하궐 154칸의 행궁과 행궁을 지키는 수어청 등을 포함한 227칸 규모였다.

일부 복원된 건물과 후원 등을 구경하고 나오니 발걸음이 저절로 행궁 오른쪽 골목으로 간다. 주변으로 단풍이 빼어나기 때문이다. 그 길 끝에 좌전(左殿)이 자리한다. 건물 뒤로 기품 있는 소나무들이 둘러싸고 있다. 좌전은 왕실 사당인 종묘다. 유사시에 종묘의 역할을 대신한다. 서울의 종묘처럼 왼쪽에 영년전, 오른쪽에 정전을 두었다. 좌전의 뒤편 담벼락에서 바라보는 행궁의 모습이 근사하다.

장대 중 유일하게 남은 수어장대. 투박하고 단단한 느낌을 준다.


남한산성 유일한 장대, 수어장대

좌전 뒤쪽으로 산길이 나 있다. 알려지지 않은 호젓한 길이다. 조금 오르면 침괘정에 닿는다. 침괘정 주변에 무기고나 무기 제작소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며, 이 자리가 온조왕의 왕궁이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이어 아래어정 약수터에서 목을 축이고, 숲길을 휘휘 돌면 울창한 솔숲을 만난다. 이렇게 울창한 솔숲은 우리나라에선 좀처럼 보기 드물다. 솔숲을 지나면 수어장대(守禦將臺)에 닿는다. 2층 구조로 층간 높이는 낮지만, 야무지게 버티고 선 모습이 위풍당당하다. 수어장대는 남한산성 축성과 함께 축조된 동·서·남·북 4개 장대 중 유일하게 남은 것이다. 본래 단층 건물로 서장대라 불렀는데, 영조 27년(1751)에 2층 누각을 증축하며 외부 편액은 수어장대, 내부편액은 무망루(無忘樓)라고 이름을 붙였다.무망루 편액은 따로 떼어 수어장대 오른쪽에 전시했다. 무망루 이름은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갔던 효종의 원한과 비통함을 잊지 말자는 뜻이다.

수어장대에서 서문으로 가는 길은 성곽의 오묘한 곡선과 울창한 소나무가 어우러져 발걸음을 즐겁게 한다. 소나무 사이로 단풍나무가 보인다. 모퉁이를 돌면 성 밖의 도심 지대가 펼쳐지고, 모퉁이를 되돌면 울창한 숲이 번갈아 나타난다.

서문은 남한산성 4대문 중 하나다. 4대문 외에도 16개의 암문, 4개의 장대를 만들었다. 암문(暗門)은 대문을 달지 않고 정찰병들을 내보냈던 문이다. 예전에는 돌로 막아 뒀다고 한다. 16개나 되는 암문은 얼마나 철저하게 전쟁에 대비했는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서문은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하러 나갔던 문이다. 성문이 낮아 머리를 숙여야 했고, 길이 가팔라 말에서 내려야 했다고 전한다. 서문을 나와 성벽을 따라 오른쪽 언덕에 오르면 서울이 한눈에 잡히는 전망대가 있다. 왼쪽으로 청계산에서 관악산이 펼쳐지고, 중앙에는 한강이 흐르며, 남산·인왕산·북악산이 옹기종기 붙어 있다. 그 오른쪽으로 서울의 수호신인 북한산과 도봉산이 흘러간다.

서문을 지나면 작은 암문이 나오는데, 그곳으로 나가면 연주봉옹성이 나타난다. 옹성은 성문을 보호하고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하기 위한 돌출 형태의 방어시설이다. 보통 평지 읍성에 주로 설치하는데, 산성으로는 남한산성이 유일하다. 연주봉 옹성 정상에 서면 하남시 일대와 도도히 흐르는 한강 풍경이 펼쳐진다. 반대로 고개를 돌리면 산속에서 유장한 곡선을 그리는 성곽이 모습이 장엄하다.

옹성을 나와 다시 본성을 따르면 북장대 터에 올라선다. 이 일대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빽빽하다. 산성안의 나무들은 마을 주민들이 ‘금림조합’을 만들어 순산원을 두고 도벌을 막아 보호한 덕택에 지금까지 건장하게 살아남았다. 북문을 지나면 길은 호젓해지고 인적도 뜸해진다.

여러 옹성의 존재가 남한산성의 특징 중의 하나다. 조망이 일품인 연주봉옹성.
서문 앞의 전망대에서 바라본 서울의 모습.

수어장대에서 서문 가는 길에 만나는 산성의 S라인.


남한산성의 숨은 보물, 봉암산성과 벌봉

옥정사지를 지나면 오래전 군인 초소인 2군포 터가 나온다. 이 앞에 4암문이 있다. 여기서 동장대암문(3암문)까지 급경사 오르막으로, 남한산성을 통틀어 가장 가파르다. 벌봉으로 가려면 동장대암문 밖으로 나가야 한다. 성 밖 오른쪽 산성길을 따르면 12암문이 나온다. 이곳을 통과하면 본성을 벗어나 봉암산성을 따르게 된다.

남한산성의 둘레는 11.76㎞, 총면적 2.3㎢에 이른다. 본성 외에도 외곽 산성인 봉암산성과 한봉산성이 있었다. 벌봉으로 이어진 이 길이 남한산성의 숨은 절경이다. 인적이 뚝 끊기고 길은 순하다. 길섶 양쪽으로 허물어진 봉암산성이 쓸쓸한 분위기를 돋운다.

벌봉 가는 길은 울창한 활엽수 지대다. 바닥에 묵은 낙엽이 가득하고, 나무들마다 화려한 단풍을 매달고 있다. 가을철에 이 길을 놓칠 수 없다. 벌봉 정상에 큰 바위가 우뚝 서 있다. 여기에 올라서면 하남시 일대와 검단산과 한강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병자호란 당시에 청 태종은 조선의 정기가 이 바위에 서려 있음을 간파하고, 깨뜨려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바위 가운데가 쩍 갈라져 있다.

다시 동장대암문으로 돌아와 15분쯤 내려가면 작은암문이 보일 듯 말 듯 숨겨져 있다. 이 암문을 나오면 장경사신지옹성이 펼쳐진다. 유장하게 흐르는 옹성의 곡선미가 일품이다. 옹성 너머로 잘생긴 광주의 산세가 드리운다. 이어지는 급경사를 조심조심 내려오면 장경사를 만나고, 이윽고 동문에 다다른다. 동문에서 도로를 따라 조금 오르면 산성로터리를 만나면서 트레킹이 마무리된다.

남한산성에서 가장 단풍이 멋진 벌봉 가는 길.


남한산성 가이드

남한산성 트레킹은 취향과 체력에 따라 코스를 짤 수 있다. 산성로터리를 기점으로 수어장대~서문~벌봉~동문에서 돌아오는 원점 회귀 코스는 8.7㎞, 3시간 40분쯤 걸린다. 걷기 좋아 가을철 가족이나 연인의 단풍 트레킹 구간으로 제격이다. 좀 더 길게 잡으려면 5호선 마천역에서 출발해 서문 쪽으로 들어올 수 있다.

숙소

자가용 이용 시 송파대로 또는 중부고속도로 하남IC를 통해 산성로터리에 이른다. 8호선 산성역에서 52번 또는 9번 버스를 타고 종점(산성로터리)에서 하차한다.

맛집

수타사에서 차로 6분 거리인 민선식당(033-436-1452)은 직접 농사지은 콩으로 두부 요리를 내오는 40년 전통의 숨은 맛집이다. 두부전골과 두부지짐을 잘하며 손수 차린 반찬들도 다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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