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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IC CLOUD

실레,
나르시시즘에 빠진
위험한 재능

Egon Schiele
글 · 전원경 예술 전문 작가, 세종사이버대 교수
은둔자들, 에곤 실레, 1912년, 캔버스에 유채, 181×181cm, 레오폴트 미술관, 빈
유럽을 찾는 여행자들에게 오스트리아의 빈은 흔히 ‘클래식 음악과 클림트의 도시’로 기억된다. 적지 않은 여행자들은 쇤부른 궁이나 호프부르크 궁을 둘러보고, 벨베데레 미술관에 전시된 클림트의 ‘키스’를 본 것으로 만족하며 빈을 떠난다. 그러나 조금 더 시간을 할애해서 빈 국립오페라 하우스 근처, 레오폴트 미술관에 가본 이라면 빈을 다르게 기억할 것이다. 그들에게 빈은 에곤 실레(1890~1918)의 도시로 각인될 것이 분명하다.

문화·예술의 중심지였던
오스트리아 빈

이 미술관은 무서울 정도로 대담하고 혁신적인 실레의 자화상과 색다르고 개성 넘치는 풍경화들을 여럿 소장하고 있다. 이 천재적인 작품들이 실레의 나이 스무 살에서 스물 서넛 사이에 창작되었다는 점 그리고 그 천재성이 불과 28년의 삶 끝에 지상에서 사라졌다는 점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대체 재능이란 얼마나 신비한 것인지, 신은 어째서 이토록 놀라운 재능을 한 청년에게 주고, 그 청년의 생명을 불과 28년 만에 앗아간 것인지에 대해 말이다.

에곤 실레가 활동하던 당시의 빈, 지금으로부터 한 세기 전의 빈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이자 유럽 전체의 수도나 마찬가지였다. 인구가 이미 200만을 넘었고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가 거주하고 있었으며 문학, 음악, 미술, 건축, 심지어 의학에서까지 새로운 작품과 저서들이 쏟아져나왔다. 1899년 빈의 개업의 지그문트 프로이트가1) ‘꿈의 해석’을 출간해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예술에서는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2)와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3), 두 명의 ‘구스타프’가 빈의 예술가들을 이끌고 있었다. 영원할 것 같았던 빈의 영광은 그러나 오래가지 못했다. 1차 세계대전이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패배로 끝나면서 제국은 해체되었다. 제국이 영광의 마지막 끄트머리로 다가가던 시점에 시작된 실레의 전성기는 그 종말과 함께 덧없이 끝났다.

  • Sigmund Freud, 1856~1939, 오스트리아의 정신분석학자, 정신분석의 창시자
  • Gustav Klimt, 1862~1918, 오스트리아의 화가, ‘황금빛 화가’라 불린다.
  • Gustav Mahler, 1860~1911, 오스트리아의 지휘자이자 작곡가


클림트를 능가하는
천재적 재능

실레는 1890년 오스트리아 남부의 툴린에서 태어났다. 철도역장인 아버지 아돌프 유겐 실러는 아내 마리와의 사이에서 여섯 자녀를 낳았으나 셋은 사산되거나 일찍 사망했다. 멜라니, 에곤, 게르티. 두 명의 딸과 한 명의 아들만 무사히 성장했다. 아이들의 절반이 이렇게 죽어버린 이유는 아버지 아돌프가 매독 환자였기 때문이었다. 일곱 살 때부터 그림에 놀라운 재능을 보였으나, 다른 학과목들은 모두 낙제생이었던 실레는 열다섯 살에 아버지의 죽음을 겪었다. 매독으로 인한 광증이 아돌프의 죽음을 불러왔다. 자신이 숭배하던 아버지가 성병인 매독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은 사춘기 소년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그에게 이제 성(性)은 새 생명이 탄생하는 통로가 아니라 죽음으로 향한 길로 기억되었다.

1906년 실레는 빈 미술 아카데미에 합격했다. 학교의 보수적인 가르침은 실레에게 그리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실레는 ‘악마의 재능’이라는 교수들의 한숨 섞인 찬탄을 들으며 건성으로 학교에 다니다 1909년에 자퇴를 선택했다. 그러나 재학 중에 만난 28년 연상의 선배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 세계는 그에게 새로운 예술의 길을 보여주었다. 클림트 역시 실레의 탁월한 재능에 찬탄을 감추지 못했다. “선생님, 제가 재능이 있다고 보시나요?”라는 실레의 질문에 클림트는 이렇게 대답했다. “많아. 그런데 너무 많아.” 실레가 자신의 드로잉을 클림트의 드로잉과 교환하자고 제안하자 클림트는 “왜 자네 드로잉과 내 걸 바꾸려고 하지? 자네 것이 훨씬 더 나은데?”라고 되묻기도 했다. 클림트의 주선으로 1909년 실레는 오스트리아 최대의 전시 행사인 ‘쿤스트쇼’에 참가할 수 있었다.



너무 빨리
사라진 천재

어쩌면 실레 본인도 자신의 재능이 클림트의 그것을 뛰어넘는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실레가 스물두 살에 그린 ‘은둔자들’이란 작품은 수도사의 의상을 입은 두 남자를 그리고 있다. 젊은 수도사는 순교자처럼 가시 면류관을 쓴 채 날카로운 시선을 던진다. 그 남자에게 기댄 중년의 수도사는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다. 젊은 수도사는 실레의 얼굴, 중년의 수도사는 클림트의 얼굴과 흡사하다.

실레의 재능은 넘치지만 동시에 위험한 것이었다. 그의 드로잉들, 누드의 자화상들에는 말라비틀어진 남자, 남녀의 구별이 불분명한 나약한 남자의 모습이 거듭 등장한다. 실제의 실레는 큰 키에 마른 체격을 가진 멋쟁이였다. 그는 자신의 외모를 마음에 들어 했고 잘생긴 만큼이나 이기적인 남자였다. 자신을 헌신적으로 살펴주던 여성 발리 노이첼과 동거하다 그녀를 미련 없이 버리고 양갓집 규수 에디트 하름스와 1915년 결혼했다. 결혼 직후 실레가 1차 대전에 징집되어 프라하의 병영으로 떠나자 에디트는 주저 없이 남편을 따라 프라하로 갔다. 실레는 운 좋게 전방이 아닌 후방에서만 근무했고 징집 중에도 계속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1918년 2월, 뇌출혈로 쓰러졌던 클림트가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빈을 대표하는 화가의 죽음이었다. 스물여덟 살의 실레가 빈 분리파의 리더로 추대되었다. 이 해에 열린 49회 분리파 전시회에서 실레의 그림 48점은 모두 높은 가격에 팔려나갔다. 오스트리아 정부가 에디트의 초상을 사들였고 취리히, 프라하, 드레스덴에서 전시 요청이 왔다. 실레는 성공과 부를 움켜쥐었다. 그가 그토록 갈망하던 것들이었다. 이제 실레는 위험한 누드, 불길하도록 빼빼 마르고 비틀어진 자화상에서 벗어나 ‘가족’과 같이 안전한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성공한 화가가 되어 가족과 함께 안락하게 사는 꿈을 꾸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까지 실레에게 호의적이던 운명은 그가 안전한 길을 택하려 하자 삽시간에 태도를 바꾸었다.

1918년 가을, ‘스페인 독감’이라 불리는 정체불명의 전염병이 세계를 덮쳤다. 1차 세계대전의 사망자가 900만 명이었던 데 비해, 스페인 독감의 사망자는 2천만 명에 달했다. 10월 28일, 임신 중이던 에디트가 스페인 독감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로부터 사흘 뒤인 10월 31일에 실레 역시 독감으로 사망했다. 겨우 28년의 짧은 생이었다. 영광은 순식간에 실레를 찾아왔고, 또 이렇게나 덧없이 그를 버리고 말았다.

가족, 에곤 실레, 1918년, 캔버스에 유채, 150x160cm, 벨베데레 미술관, 빈
자화상, 에곤 실레, 1915년, 펜과 유채 드로잉, 49x31.5cm, 레오폴트 미술관, 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