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들어와 인구의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우리의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혼란스러워졌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인구의 고령화가 유사 이래 제일 빠르게 진행되는 현실에서는 기존의 익숙했던 도식이 바뀌어야 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변화의 흐름은 탄생에서 죽음까지의 전생애(全生涯)를 기존의 시기보다 더 세분화해야 하는 것이다. 그동안 익숙했던 중년기 다음에 노년기가 오고 죽음으로 생애가 끝난다는 기존의 시각으로는 길어진 삶을 정확하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각 시기는 저마다의 심리적 특징과 발달과제가 존재한다.
중년기와 노년기를 바라보는 시각도 마찬가지이다. 중년기는 청년기와 노년기의 가운데(中)에 있는 시기이다. 다른 말로 하면 청년기의 발달과제를 성공적으로 마쳐야 하고 동시에 노년기의 발달과제를 수행할 준비를 해야 하는 시기이다. 청년의 발달과제는 한마디로 하면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양육하는 것이다. 동시에 직업을 갖고 독립적으로 경제생활을 하는 것이다. 정신분석가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말을 빌리면 행복한 삶의 두 기둥 “Lieben(사랑하고) und Arbeiten(일하다)”의 기초를 튼튼히 하는 것이다. 그리고 중년은 두 기둥을 잘 쌓아 올리고 완성하는 것이다. 즉 자녀들을 잘 키워 독립된 성인으로 키우고 안락한 노년을 위한 제반 준비를 철저히 하고 현직에서 퇴임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중년기를 이해하는 것은 20세기 전반에서나 효과적일 수 있었다. 왜냐하면 20세기 후반부터 인류의 수명이 길어지고 결혼율과 출생률이 떨어지고 직업관이 바뀌는 등 다양한 변화가 급속히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동시에 결혼과 자녀의 출생을 경험하는 시기 자체가 다양할 뿐만 아니라 직장에서 퇴임하는 시기도 사람에 따라 다양해졌다.
일반 회사의 경우 대부분 정년이 60세로 정해져 있지만 정년을 다 채우고 퇴임하는 경우는 10% 안팎에 불과한 형편이다.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 직장인들은 평균 49세에 첫 직장을 그만두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두 번째 직장을 찾는다. 그렇기에 50세부터 노년기로 들어간다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이제는 퇴임한 후 제2, 제3의 경력을 가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본인이나 주위에서 오히려 권장할 정도로 생애 주기가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중년기와 노년기 사이에 ‘숙년기(熟年期)’라는 새로운 시기가 있어야 한다.
이 새로운 시기를 ‘숙년기’라고 부르는 이유는 인생에서 심리적으로
제일 무르익은 시기라는 특징과 동시에 과제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50세 이후 새로운 직장을 찾아 자기 자신을 가꾸고 인생을 행복하게 살기 위해 제2의 경력을 가지는 젊은 중년들이 새롭게 생겨났다. 그렇기에 이들에게 걸맞은 발달단계를 규정하고 그 특징을 연구하는 것이 시급해지고 있다. 전생애발달을 공부하는 필자의 소견으로는 중년기와 노년기 사이에 ‘숙년기(熟年期)’라는 새로운 시기가 있어야 한다. 생물학적 나이로 언제 숙년기가 시작되는지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다. 인생의 중반 이후부터는 생물학적 나이가 큰 의미가 없을 정도로 개인차가 크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시기를 ‘숙년기’라고 부르는 이유는 인생에서 심리적으로 제일 무르익은 시기라는 특징과 동시에 과제가 있기 때문이다. 숙년기는 인생에서 제일 무르익은 시기이자 절정에 다다른 시기라는 의미이다. ‘자기실현’을 삶의 목표라고 설명한 정신의학자 융(Carl Gustav Jung)은 우리 삶에서 중년이 돼서야 비로소 자기실현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인생 후반기 삶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그에 따르면, 자기 실현은 그동안 별로 빛을 보지 못한 우리 성격의 억눌렸던 부분들이 힘을 얻어 삶의 전면에 나타나는 것이다. 즉 젊었을 때는 무의식으로 억압되어 있던 욕구가 표면으로 표출되고, 이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면서 무르익는 삶을 사는 시기가 된다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심리적 변화 중의 하나는 남성이 점차 여성화되어 가고 동시에 여성은 남성화되어 가는 현상이다. 태어날 때 우리는 남성성과 여성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양성(兩性)적 성향이 있다. 하지만 성장해가면서 남자는 남자답게 또는 여자는 여자답게 성장하라는 사회적 압력에 따라 젊은 남자에게는 상대적으로 남성성이 두드러지고 여성성은 억압되는 경향을 보인다. 하지만 중년 이후에는 남자에게도 억압되어 있던 여성성이 표면에 나타나게 되고 여자에게도 억압된 남성성이 표현된다. 그래서 남자는 여성화되고 여자는 남성화되는 경향을 띠게 되는 것이다. 융에 따르면 성숙한 성격은 어느 한 면도 억압되지 않고 다 같은 강도(强度)로 나타나 원(圓) 모양을 띠게 된다. 그래서 성숙한 성격을 다른 말로 ‘원만(圓滿)하다’고 표현한다. 모든 특성이 동일한 강도로 표현되는 것이 모가 나지 않은 것이고, 그 결과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좋아진다.
또 숙년기는 자녀 양육의 책임에서 점차 벗어나는 시기이기도 하다. 자녀들이 청소년기에 도달하면 부모로부터 심리적으로 독립해야 하므로 자녀의 양육에 투자하던 많은 양의 심리적 에너지를 이제는 다시 원래 자신의 참모습으로 돌아가는 데 사용하려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게 된다. 물론 숙년기 초기에는 여성에게 ‘빈 둥지 증후군‘이 나타나 우울증을 겪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일반적인 것이 아니고 또 극복될 수 있는 증상이기도 하다.
숙년기에는 일의 의미가 단순히 경제적 소득이나 사회적 인정의 욕구를 뛰어넘어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하면서 자신을 표현하고 싶어 하는 욕구가 강해진다. 숙년기에서 일은 자신을 표현하는 중요한 도구가 된다. 중년 이후에 이직(移職)을 많이 하고 자신의 사업을 하려는 욕구가 강해지는 것도 자기실현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나도 이제는 남 좋은 일 그만하고 내 사업을 하고 싶어”라는 이야기를 주위에서 많이 들을 수 있다.
숙년기는 진정한 자기실현을 하는 시기이므로 ‘나’,
즉 ‘자기(自己)’를 만나야 한다. 그동안 별로 관심을 두지 않고
마음속 깊이 묻어두었던 진정한 ‘나’를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
매 시기는 이루어야 할 심리적 과제가 있다. 예를 들면 청소년기에는 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 그렇다면 숙년기에 달성해야 하는 심리적 과제는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다. 한 번밖에 없는 인생에서 이제는 책임과 의무에서 벗어나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찾아 몰두하고 싶은 마음을 돌봐야 한다.
각 시기의 발달과제를 효율적으로 달성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대상과 좋은 만남이 있어야 한다. 숙년기에도 당연히 만나야 할 대상이 있다. 숙년기는 진정한 자기실현을 하는 시기이므로 ‘나’, 즉 ‘자기(自己)’를 만나야 한다. 그동안 별로 관심을 두지 않고 마음속 깊이 묻어두었던 진정한 ‘나’를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진정으로 자신이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것을 하는 삶의 절정(絶頂)의 시간을 맛볼 수 있다. “이제야 내가 누구이고 인생이 무엇인지 알 만한” 시기가 되는 것이다. 숙년기는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을 능숙하게 하라는 자연(自然)의 배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