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 보면 G7(주요 7개국)에서도 미국만 잘 나가는 세상에서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구성된 브릭스(BRICS)는 그 저변을 확대하고자 했다.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 질서의 ‘대안’을 지향하는 브릭스가 설립 14년 만인 지난해 중대 전기를 맞았다. 기존 5개국에서 아르헨티나, 이집트, 에티오피아,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UAE)를 포함하는 11개국으로의 확장을 발표한 것이다. 이들은 일제히 국제사회에서 ‘미국 리더십의 실패’를 천명했고 중남미의 볼리비아와 베네수엘라는 브릭스 가입 의사를 표명했다. 다만 2023년 10월 하비에르 밀레이(Javier Milei)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 참모진의 의견을 반영해 브릭스 가입을 재검토하기로 했다.
점점 많은 국가가 미·중 패권전쟁에 지쳐가고 기후변화, 코로나 팬데믹 등을 겪으며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특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글로벌 공급망이 와해하자 미국-서방 동맹그룹과 중국-러시아 연합과는 별개의 목소리를 내기를 희망하는 개발도상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들은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남반구나 북반구의 저위도에 위치한 120여 개발도상국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차츰 정착하고 있다. 글로벌 사우스는 자국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서방 강대국(Global West), 중국-러시아 등 주요 국가 간 관계에서 벗어나 전략적 균형을 취하려는 움직임을 보여준다. 미국과 중국이 자국의 입장을 대변하지 않는다고 보고 국제질서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더 반영하기 위해 노력하려는 일련의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역시 국제관계에서 인식의 방향을 전환하고 이들과의 협력을 강화해야 하는 국면에 놓였다.
글로벌 사우스는 남반구나 북반구의 저위도에 위치한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중남미 카리브해 국가 등의 제3세계 개발도상국을 통칭하여 일컫는 용어다. 인도, 남아프리카공화국, 브라질 외에 멕시코를 위시하여 120여개 국가로 구성된 집합체다. 이는 북반구에 있는 미국, 유럽 등의 선진국을 가리키는 글로벌 노스(Global North)에 대한 자주성을 강조한다. 이들은 미·EU와 중·러 사이에서 전략적 균형을 추구하며 주목을 받고 있다. 어찌 보면 과거 글로벌 노스의 식민 통치와 현재의 국제 질서 지배에 대항하기 위한 개발도상국 집합체를 의미한다고 하겠다.
그간 인도는 인구와 경제력을 배경으로 글로벌 사우스 대표를 자임해왔다. 이들의 본격적인 부상은 2022년 2월 발발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이 있다. 이들은 러시아 제재와 관련하여 UN 총회의 결의안 표결에서 자주적으로 결의했다. 2023년 10월 발발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서도 하마스에 대한 비판은 자제했다.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봉쇄와 공습을 비판하는 중국, 러시아와 인식을 같이했다. 그리고 미국의 상이한 전쟁 자세를 비판했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를 비난하면서도 이스라엘에는 정반대 입장을 취한다며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아래 빨간색 부분이 ‘글로벌 사우스’에 해당한다. 출처 : 위키백과
우선, 글로벌 사우스는 경제성장률, 지정학적 블록화 대응, 글로벌 공급망 재편 차원에서 중시된다. 자원과 인구라는 두 가지 축을 발판으로 빠른 속도로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늘리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인구 상위 20개 국가 중 글로벌 사우스 국가는 15개국이다. 상당수 국가는 선진국보다 높은 경제성장률을 자랑한다. 이 외에도 젊은 인구, 정부의 인프라 투자 등에 힘입은 높은 성장 잠재력은 도외시할 수 없는 사실이다.
둘째, 이들 국가는 우방국을 중심으로 ‘프랜드쇼어링(Friend-Shoring)’ 현상을 늘리고 있다. 이는 미국에서 생산 시설을 운영하기 어려운 기업이 우방국(Friend)을 생산기지로 낙점하고 이전하는 것을 말한다. 믿을 만한 동맹끼리 뭉치면 상품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자칫 지정학적 블록화와 교역의 분절화 현상을 야기할 수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과 중국이 비관세 무역장벽을 강화하여 프렌드쇼어링할 경우를 가정하여 우리나라에 미치는 영향력을 추산한 바 있는데, 이런 블록화가 진행되면 우리나라 GDP가 약 4% 감소할 것으로 전망했다. 우리나라가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입지를 다져가는 글로벌 사우스를 중시해야 할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다.
셋째, 자원외교의 중요성이다. 이들 국가의 풍부한 자원을 감안할 때 각 지역의 수요를 정확히 알고 협력을 강구할 필요성이 증가하고 있다. 이들 국가는 자국의 산업 육성과 관련한 인프라 구축에 관심이 높다. 아세안(ASEAN)은 2차 전지 소재 핵심 광물자원, 중동은 도시 인프라와 플랫폼경제, 남미와 아프리카는 교통물류 인프라와 농업 및 식품 가공, 인도는 수소융합경제 등에 있어서 도약을 꿈꾸고 있다.
미국과 중국에 편중한 경제에서 수출·투자시장 다변화 노력이 요구되는 상황이다. 중장기적 관점에서 글로벌 사우스와의 포괄적 경제협력 채널을 구축하여 지정학적 불확실성에 제대로 대응할 필요성이 높다고 하겠다. 인도는 국익과 실용주의를 앞세워 이곳에서 다양한 진영과 손을 잡는 ‘다자(多者)동맹’ 외교를 펼쳐왔다. 글로벌 사우스의 목소리를 대변하겠다며 2023년, 2024년 두 차례에 걸쳐 ‘글로벌 사우스의 목소리 정상회담’을 개최했다. 중국이 일대일로 프로젝트(’13년), 글로벌 발전 이니셔티브(’21년), BRICS+로의 외연 확대로 이들과의 협력을 중요시해 온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러시아는 대외정책의 하나로 글로벌 사우스와의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미국은 다국적 인프라 투자 사업을 중점 추진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 중국의 일대일로가 가진 인프라 투자의 부채함정과 투명성 문제를 강조해 왔다. 여기에 일본도 한몫해 다양한 방식으로 중국의 영향력을 견제하고 있다.
세계 경제는 블록화를 통해 변화하고 있다. 지정학적 리스크가 증폭하고 있는 상황을 감안할 때 글로벌 공급망 재편은 일시적 현상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글로벌 사우스의 등장과 재편을 구조적으로 장기화될 축의 전환으로 인식해야 한다. 강대국 위주로 시행해 온 우리의 국제관계 협력에 있어서 인식의 전환을 추진해야 함은 물론이다. 중점 추진 방향은 공적개발원조(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 ODA)를 통한 국제협력 강화, 수출입 교역 확대, 자원투자 활성화등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다자 협력을 주도하며 경제 채널을 다각화하는 전략에 매진할 때다. 우리나라는 식민통치와 전쟁에 의한 가난, 독재의 어두운 경험에서 경제 성장과 민주화를 동시에 이루어 낸 예외적인 성공 사례이기에, 글로벌 노스와 글로벌 사우스를 연결하는 역할에 있어 적임자임을 강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