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봄에 우리 풀꽃문학관에 새롭게 일어난 변화가 있다. 분명 봄이 오고 정원에 꽃들이 가득 피었는데도 나비가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작년에는 꿀벌이 잘 보이지 않았는데 이러한 점은 매우 염려스러운 자연의 변화이기도 하다.
그리고 방문객들이 부쩍 늘었다. 가끔은 특별한 방문객들을 만나기도 한다. 멀리서, 젊은 여성이 혼자서, 우리 문학관을 찾아온다는 점이다. 여러 차례 그런 분들을 만나본 일이 있고 그럴 때마다 나는 왜 왔느냐고 버릇처럼 묻는다.
왜 왔느냐고? 이 소중한 휴일에 왜 그렇게 멀리서 혼자서 젊은 여성이 집에서 쉬지 않고 여기까지 왜 왔느냐고? 급하게는 정확한 답을 내놓지는 않지만, 천천히 답을 말하기도 한다. 힘들어서 지쳐서 왔노라고. 이건 실상 정당한 이유가 아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너무나도 그것은 정당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렇게 우리 문학관을 찾는 분들은 몸이 고달픈 것이 아니라 마음이 고달파서 온 것이다. 그렇다면 정당한 이유가 아니란 말은 정당해지지 않는다. 금세 오답이 되고 만다.
바로 이것이다. 마음이 고달프다는 것! 나는 이것을 매우 희망적인 것으로 본다. 이제 우리의 삶은 몸이 고달픈 세상에서 마음이 고달픈 세상으로 진입한 것이다. 그만큼 심리적인 보살핌이 있고 섬세해진 것이다.
예전에는 마음이 고달픈 것조차 느끼지 못하면서 살았다. 그저 허위허위 코앞에 닥친 삶을 이겨내고 물리치기에 바빴다. 나는 흔히 우리네 삶에는 ‘살아내는 삶이 있고, 살아가는 삶이 있고, 살아지는 삶이 있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살아내는 삶에서 살아가는 삶으로 바뀌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좋게 말하면 철든 것이고 자아 성찰의 단계에 이른 것이다. 이걸 우리는 무턱대고 부정적으로 고개 돌리고 나쁘다고 윽박지를 일이 아니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생각해야 하고 어디론가 좋은 쪽으로의 변화를 꿈꾸어야 한다.
이것은 모두가 공감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오늘날
우리들 세상이 매우 피곤한 세상이라는 점이다.
물질적으로 환경적으로는 좋은 쪽으로 바뀐 것이
분명한데 정서적, 정신적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그것을 다 함께 문제점으로 지적하면서
걱정한다.
왜 그럴까? 여러 가지 접근과 분석과 해결책이
있겠다. 철학 하는 분들은 그쪽으로, 사회학을
연구하는 분들은 그쪽으로의 답이 있을 것이다.
또 정치나 경제 쪽으로 능력 있는 분들은
그쪽으로의 접근과 해결책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시를 쓰는 사람이니까 심정적인
접근, 느낌으로의 접근으로만 말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렇다. 내 생각으로는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고달프고 힘들고 팍팍한 세상을 살게 되는
이유로서는 그 어떤 것보다도 심리적인 이유가 가장
크다고 본다.
사람들이 하도 힘들다, 힘들다고 그러니 정부에서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주 4일제 근무를 시험적으로
시행해보겠다고 하는데, 그건 매우 필요 적절하고
고마운 조치이긴 하지만 근원적인 해결책은
아니라고 본다.
가장 큰 문제와 원인은 물질이나 환경에도 있지만
보다 큰 것은 정신에 있다는 것이고,
정신 가운데서도 ‘느낌’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반적인 이야기가 아니고 내 나름의
생각인데 우리 인간의 마음은 세 가지 영역으로
나뉘어 있다고 본다.
가장 바깥 부분이 이성의 영역이고, 그 안
부분이 감성의 영역이고, 가장 중심 부분이 영성
부분이라고 본다. 이성 부분에서 지식과 생각이
나오고 감성 부분에서 감정이 나오고 영성 부분에
영혼이 깃든다고 본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가장 분명하면서도 실용적인
것은 이성 부분에서 나오는 지식과 생각이다. 그래서
이 지식과 생각만을 배우자고 하고 그것을 활용해서
살고자 한다. 교육이나 진학, 경쟁, 취직, 평가, 모든
차원에서 활용되는 근거가 지식과 생각이다.
그러나 만족과 불만족, 행복과 불행을 결정하는 건
이러한 지식이나 생각이 아니라 느낌이고 감정이다.
말하자면 감성 부분이 그렇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아무 데서도 이 감정, 감성 부분을
관심에 두지 않고 북돋우거나 도와주지 않는 데에
문제가 있다.
그래서 외롭고 우울하고 지루하고 따분하고
끝내는 피곤하고 불행감, 상실감에까지 이르는
것이다. 문제는 이 감성 부분에 나오는 감정, 즉
느낌을 어떻게 잘 간직하고 보존하며 성장시키고
활용하느냐에 있다. 그렇지 않는 한 우리는 오늘의
피곤과 불행과 상실감에서 헤어 나오기 어려울
것이다.
요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예전의 세상과 많이 다른
세상이다. 좋아지려면 달라진 세상을 읽어야 한다.
그걸 누가 모르나. 그걸 좀 더 구체적으로 세심하게
들여다보자는 얘기다. 농경에서 유목과 도시적
삶으로 바뀐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붙박이 삶이 아니다. 떠돌이 삶이고 변화하는
사람이다. 그것도 시시각각 너무나도 빠르게
변화하는 삶이다. 우선은 이걸 따라가야 하는데
그게 힘들고 벅찬 것이다. 그래서 낙오가 생기고
고립이 생기고 정서적인 상처가 싹트는 것이다.
내가 보기로 요즘 세상은 오로지 젊은이의
세상이다. 어린 사람의 세상일수록 좋은 세상이다.
금기가 사라진 세상이고 방임과 자유 만끽의
세상이다. 무엇이든지 가능한 세상이고 무한히
열린 세상이다. 이 얼마나 소망스런 일이고 좋은
현상인가.
하지만 거기에도 함정이 있다. 열려 있기에
길이 사라진 것이요, 방향이 흔들리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거기에 혼돈이 있고 방황이 따른다.
이러한 이율배반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이것도 내 생각인데 오늘날 우리의 세상은 무한한
가능성과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본다. 무엇이든지
하지 말라는 말이 사라지고 무엇이든지 네 맘대로
해 보라고 한다. 그것도 마음껏 해 보라고 한다.
그런 대신 기준이 사라지고 모범이 없어졌다.
또한 패착이다.
무한 속도, 무한 경쟁, 무한 자유, 무한 소비,
무한 정보. 그것이 오늘날 우리들 삶을 조정하는
요소들이다. 이것은 좋은 것 같지만 실은 아주
무서운 것이고 독소조항이다. 보다 큰 함정이
거기에 있다. 그걸 이겨낼 능력이 우리에게는 미리
준비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이것이 열려진 세상이
갖는 가장 큰 문제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말할 것도 없이
조금씩 줄여야 한다. 속도를 줄이고 두리번거림을
줄이고 떠돎을 줄이고 다툼을 줄이고 미움을 줄이고
불평을 줄이고 불화를 줄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
스스로 제한을 두어야 한다. 그럴 줄 알아야 한다.
끝없는 질주 앞에 합당한 대안은 그 무엇도 없다.
다음으로는 자기 자신을 살필 줄 알아야 한다.
구체적 삶의 현장이나 몸을 살피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상태를 살피는 일이다.
그리하여 자기 자신의 본질을 알아야 하고 자신의
몫을 분별해야 하고 드디어 고요해지기도 하면서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젊은이들에게 가끔 물어보기도 한다. 왜 살기가
힘든가? 현명한 젊은이들은 답을 내놓기도 한다.
오늘의 젊은 세대들은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기가 두렵고 내면을 들여다보기가 겁이 난다고
한다. 그래서 남들이 사는 대로 그냥 편하게 따라서
산다고 한다.
그래서 삶이 점점 공허해지고 따분해지고
피곤해지는 것이다. 절대로 남을 따라서 살 일이
아니다. 흉내 내기로 살 일이 아니다. 하루 한
시간을 살아도 내 삶을 살아야 한다. 세상이, 세상의
삶의 물결이 그걸 방해하더라도 기필코 그것을
이루어내야 한다.
자발적 고독이란 말이 있다. 스스로 혼자의 방에
자신을 가두고 고독해진다는 이야기다. 그것을
오늘의 우리는 겁내고 있는 것이다. 지나치게
휴대전화나 컴퓨터나 SNS의 관계망에 몰입되어
사는 것이다. 이걸 조금씩 줄이고 자기 자신을
돌보는 데에 자신의 열정을 나누어주어야 한다.
휴식이니 힐링이니 그러는데 몸으로만 하는
물리적인 그것 가지고는 많이 부족하고 또
부적절하다. 마음의 그것이어야 하고 더더욱
정서적인 그것, 느낌의 그것이야 한다. 마음으로
눈을 떠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거기서
휴식을 찾고 치유를 얻는 일이 무엇보다도 급하고
중요하다.
마음으로 눈을 떠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거기서 휴식을 찾고
치유를 얻는 일이
무엇보다도 급하고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