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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피라이터 정철

글 · 강일서 사진 · 김경수
연필 들고 영감 만드는 일을 오래 하다 보니 서서히 흰 수염 영감이 되어 간다는 36년 차 카피라이터 정철. 오전에는 카피라이터, 오후에는 선생, 저녁에는 작가로서 끊임없이 쓸고 닦고 뒤집어엎으며 위로와 공감의 메시지를 건넨다.




Q

원래 소설을 쓰는 게 꿈이었다고 들었습니다. 35여 년 전 카피라이터라는 직업도 생소했을 텐데, 어떻게 카피라이터의 길을 걷게 되셨나요?

모 대기업에 가기로 결정하고 학교 정경대 사무실에서 오른쪽을 보며 걸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때 만약 왼쪽을 봤다면 제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을 겁니다. 오른쪽 벽에 포스터 하나가 붙어 있었습니다. 카피라이터 추천. 이 일곱 글자가 눈에 확 빨려 들어왔습니다. 카피라이터라는 말을 처음 본 순간이었습니다. 카피는 뭔지 모르지만 라이터는 뭔가 글 쓰는 일 같았습니다. 사실 그때 저는 글을 쓰며 살고 싶었는데, 글 써서 밥 먹고 사는 직업이 많지 않아 회사원이 되기로 결정한 터였으니까요. MBC애드컴이라는 광고대행사였는데 카피가 뭔지도 모르고 지원했습니다. 그런데 원래 가기로 한 곳 면접과 이곳 시험이 한날한시로 딱 겹쳤지 뭡니까. 다들 대기업에 가라 하는데, 저는 카피라이터가 자꾸 궁금한 겁니다. 저질러버렸지요. 결과는 꼴찌로 합격.
카피라이터 정철이라고 적힌 제 인생 첫 명함을 받았습니다. 사실 처음엔 낮엔 대행사에 출근해 돈을 벌고, 밤엔 집에서 소설을 쓰려 했습니다. 1년쯤 일해보고 알았습니다. 제 글이 소설보다 카피에 더 어울린다는 것을. 그때부터 왜 내가 꼭 소설을 써야 하지? 소설은 조정래 선생님이 쓰면 되지. 이런 생각으로 카피에만 35년 매달려 온 것입니다.

Q

대중들에게 위로를 주고, 공감되는 카피들이 많은데요. 카피를 쓰실 때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은 무엇인가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가장 힘 있는, 가장 울림이 큰 이야기는 사람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뒷담화할 때 무슨 이야기를 하죠? 늘 사람 이야기지요. 사람 이야기가 가장 흥미롭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가능하면 사람에게서 이야깃거리를 찾으려 합니다. 예전에 이런 글을 썼습니다. “술맛의 10%는 술을 빚은 사람입니다. 나머지 90%는 마주 앉은 사람입니다.” 술에 취하는 게 아니라 사람에 취하는 거라고 말하는 글입니다. 카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제품이나 기술에 10% 시선을 준다면 그 제품을 사용할 사람에게 90% 시선을 주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같은 말을 다르게 할 수 있습니다. 더 재미있는, 더 공감 가는 카피를 쓸 수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먼저다’라는 카피도 그렇게 나온 카피일 것입니다.


Q

작가님도 카피(글)가 안 써질 때가 있을까요? 그럴 땐 어떻게 하세요?

글이 밥알처럼 곤두서지 못하고 자꾸 뭉개질 때. 흐물흐물 흐느적거릴 때. 이럴 때 제 해결책은 일과 싸우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은 영 아니다 싶은 순간 퇴근입니다. 물론 일찍 퇴근한다고 일과 완전히 멀어지는 건 아닙니다. 제가 주섬주섬 퇴근을 챙길 때 하던 일 일부는 내 머릿속으로 들어옵니다. 저랑 함께 퇴근합니다. 술자리에도 동행합니다. 술에 몰입하고 싶은데 자꾸 말을 겁니다. 아까 그 문장, 이렇게 바꾸면 어때? 통째로 날려버리면 어때? 심지어 잠자리까지 따라와 꿈속에서 블라블라 제 귀에 대고 속삭입니다. 퇴근했지만 완전한 퇴근은 아닌 셈이지요. 제게 퇴근은 생각이 멈추는 시간이 아니라 발효되고 숙성되는 시간입니다. 오히려 퇴근 후에 더 좋은 문장을 건지기도 합니다.

Q

카피라이터는 대중들의 취향과 변화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데요. 이러한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요?

저는 지독한 아날로그 사람입니다. 아날로그 주제에 빠르게 변하는 세상을 따라잡겠다고 쫓아다니다간 십 리도 못가서 발병 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노력하지 않습니다. 제가 세상 모든 제품을 다 이해하고, 세상 모든 제품 카피를 다 쓰겠노라 나서는 건 욕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욕심은 무리를 낳고 결국 상처만 남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빠르게 변한다 해도 내 카피는 이 맛이야! 나는 이렇게 선언하고 제게 맞는, 제가 잘할 수 있는 일을 합니다.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것을 만드는 사람, 있는 것을 지키는 사람, 저는 후자입니다.



Q

일하시면서 힘들었을 때가 있으셨는지, 그 힘든 시기를 어떻게 이겨내셨는지 궁금합니다.

사실 일보다는 사람이 힘든 거지요. 사람 스트레스. 누구나 이게 가장 큰 스트레스일 것입니다. 저 역시 같이 일하는 사람 때문에 상처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겨냈을까요. 사람이라는 문제는 사람이라는 답으로 풀어야 합니다. 제 곁엔 저를 아껴주는 사람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그 사람들을 봤습니다. 스트레스 주는 사람을 한 번 볼 때, 그 따뜻한 사람들을 열 번 봤습니다.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결국 사람입니다.

Q

다양한 저서도 많이 내셨는데 IBK 독자분들에게 책 한 권 추천해 주세요.

<카피책>입니다. 짧은 글로 사람 마음을 훔치는 방법을 써놓은 책입니다. 누구나 카피라이터처럼 글을 쓰게 해주는 책입니다. 예전엔 한 사람을 판단할 때 그 사람의 외모나 말투나 명함을 봤습니다. 그러나 이젠 그 사람의 글이 곧 그 사람인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오프라인보다 온라인 만남이 잦아지며 글에서 도망칠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글 한 줄이 호감을 비호감으로 순식간 바꿔버리기도 합니다. 어차피 써야 한다면 잘 써야겠지요. <카피책>은 이 일에 도움을 주는 책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절판돼서 4월 중순 이후에 개정판이 나옵니다. 글을 잘 쓰고 싶다면 몇 주 기다릴 줄 아는 인내도 필요합니다(웃음).


Q

오랜 경력만큼 다양한 후배, 제자들을 만나셨을 텐데, 선배로서, 스승으로서 그들을 위로해 주신 적도 많으실 것 같아요.

그만하면 잘했어. 괜찮아. 힘내. 이런 공허한 말 몇마디가 위로될 수 있을까요? 위로는 입으로 하는 게 아니라 귀로 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 이야기에 귀를 활짝 열고 들어주는 것입니다. 아픔도, 슬픔도, 외로움도 내 안에 담아두지 않고 입 밖으로 내보내면 조금씩 풀리고 누그러집니다. 그러니 잘 들어줘야 합니다. 들어주는 눈빛과 표정과 태도에서 진심이 보여야 합니다. 저는 잘 듣는 사람이 되려고 애를 쓰는 편입니다.

Q

카피라이터로 35여 년, 대체 이 직업의 달고 쓴 매력은 무엇인가요?

아침엔 껌 팔고, 점심땐 옷 팔고, 저녁땐 술 팔고, 다음 날 아침에 다시 집 팔고··· 팔고 팔고 팔고가 정신없이 이어지는 것이 카피라이터의 삶입니다. 누군가에겐 이것이 카피라이터를 그만두는 이유가 되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이것이 카피라이터로 사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껌장수가 되었다가, 옷장수가 되었다가, 술집 주인이 되었다가, 건설회사 과장이 되었다가··· 세상 모든 직업을 경험할 수 있는 일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카피라이터의 가장 큰 매력은 지루할 틈이 없다는 것.



정철이 IBK 매거진 독자분들에게 보내는 메시지
이번 호 주제가 ‘괜찮아, 한 번 더’라고 들었습니다. 주제에 걸맞은 글 하나를 내려놓는 것으로 인터뷰를 마무리할까 합니다. “실패했다. 앞에 있는 두 글자를 보지 마세요. 뒤에 있는 두 글자를 보세요. 했다는 것 만으로도 박수받을 일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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