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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아라비아
오일달러가 일으킨
골프 플랫폼 전쟁
세계 골프는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미국)를 비롯한 골프 스타들이 활약하는 미국 프로골프(PGA) 투어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유러피언 투어를 비롯한 다양한 투어들이 그 변방에서 각각 자신의 영토를 갖고 있었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이런 질서를 뿌리째 흔드는 도발이 일어났다. 거침없는 사우디아라비아(이하 사우디)의 오일달러가 세계 골프계에 플랫폼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지난 몇 년간 천문학적인 상금을 내건 미 PGA투어에 대항하는 슈퍼 골프리그(SGL) 또는 프리미어 골프리그(PGL)를 창설한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는데 이제 본격적인 총성이 울린 것이다.
writing. 민학수(조선일보 스포츠전문기자)
내년 ‘슈퍼 골프리그’ 출범 목표…
스타 선수에 수백억~수천억 원 계약금 제안
올해 2월 1일 영국 신문 데일리그래프는 독점 보도라며 슈퍼 골프리그를 출범시키려는 사우디 국부펀드(PIF)가 이안 폴터(잉글랜드)에게 약 2,200만 파운드(약 357억 원)을 제안했다고 전했다. 그리고 하루 뒤 같은 신문은 전 세계 1위였던 리 웨스트우드(잉글랜드)가 비슷한 금액에 슈퍼 골프리그와 계약을 맺었다고 보도했다. 선수들은 비밀 유지 계약서에 서명했다며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 더욱 놀라운 소식도 있다. 몸집 20kg을 불려 400야드 초장타에 도전하는 ‘필드 위의 괴짜 물리학자’ 브라이슨 디샘보(미국)가 1억 파운드(약 1,623억 원)를 제안받았다고 영국 신문 미러가 전했다. 1억 파운드는 PGA 투어 최다승 타이기록인 82승(메이저 15승 포함)을 거둔 타이거 우즈의 PGA투어 통산 상금 1억 2,085만 달러(약 1,447억 원)를 훌쩍 뛰어넘는 금액이다. 올해 29세로 PGA투어에서 8승(메이저 1승)을 거둔 디샘보에게 계약금으로 47세의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가 20년 넘게 벌어들인 상금보다 더 준다는 보도에 세계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구체적인 액수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상상을 뛰어넘는 금액의 제안이 오고 가는 것은 분명하다는 게 전문가들 의견이다.
사우디 국부펀드가 출범시키려는
슈퍼 골프리그의 정체
국내 영화 ‘타짜’에서 유행어가 된 “묻고 더블로 가”를 떠올리게 하는 어마어마한 돈 잔치를 바탕으로 PGA투어를 밀어내고 세계 최고의 골프 리그를 만든다는 구상이다.
2023년 1월 출범을 목표로 하는 슈퍼 골프리그는 남자 골퍼 톱스타 48명만 출전해 8개월간 18개 대회를 개최한다는 구상이다. 12개 대회는 미국에서, 나머지 6개 대회는 아시아와 유럽에서 연다는 계획이다.
48명만 참가하는 대회인데도 총상금 2,000만 달러를 내걸었다. 우승자는 400만 달러(약 48억 원), 최하위도 15만 달러(2억 원)를 받게 된다. 올해 마스터스 우승 상금 207만 달러의 배에 가까운 액수다. 개인전 외에 골프에서 아주 독특한 포맷인 단체전을 함께 하는 방법으로 열린다. 자동차 경주대회인 포뮬러1(F1) 형식의 팀 경쟁 포맷을 참고했다. 개인전을 치르면서 4명이 한 팀으로 전 세계를 돌며 투어를 한다. 팀 캡틴은 리그 오너십도 받게 된다. 이들은 메이저 대회나 미국과 유럽의 골프대항전인 라이더컵 일정과는 충돌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2부 투어 전략 우려로
PGA투어 상금 증액 맞불
하지만 미 PGA투어는 상당수 대회 일정이 겹치게 돼 자칫 2부 투어나 다름없는 신세가 될 수 있다. 미 PGA투어의 제이 모나한 커미셔너는 결사항전 의지를 밝힌 상태다. “슈퍼 골프리그에 참가하는 선수들에게 영구 징계를 하고 라이더컵 출전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경고를 날렸다. 그리고 파격적인 당근책을 제시했다. 지난해부터 ‘플레이어 임팩트 프로그램’을 통한 새로운 보너스 제도를 시작했다. ‘플레이어 임팩트 프로그램’ 은 4,000만 달러를 성적순이 아닌 팬들의 인기를 기준으로 선수들에게 나눠 주는 것이다. PGA투어 대회의 상금 규모도 대폭 키웠다. 제5의 메이저 대회로 불리는 플레이어스챔피언십이 올해 총 상금 1,500만 달러에서 2,000만 달러로 500만 달러를 올렸다. 우승 상금도 지난해 270만 달러보다 90만 달러가 많은 360만 달러(43억 원)다. PGA투어에 우승 상금 40억 원 시대가 열린 것이다. 거의 모든 대회가 상금을 수십만 달러에서 수백만 달러까지 증액했다. 그리고 시즌 전체 성적에 따라 30명만 출전하는 최종전 투어 챔피언십도 엄청난 돈 보따리를 푼다. 이 대회는 지난해 출전 선수 30명에게 우승 1,500만 달러를 포함 보너스 6,000만 달러를 주었으나 올해는 우승 1,800만 달러를 비롯해 모두 7,500만 달러를 지급하기로 했다.
파열음이 터지고 있는 PGA투어
올해 2월 6일 필 미켈슨(미국)이 PGA투어를 비난하는 발언을 쏟아냈다가 역풍을 맞는 사건이 벌어졌다. 미켈슨은 자신이 여러 차례 우승한 PGA투어의 유서 깊은 대회 페블비치 프로암(2월 3~6일) 대신 같은 기간 사우디에서 열린 아시안투어 PIF 사우디 인터내셔널에 참가했다. 사우디인터내셔널은 슈퍼 골프리그를 추진하는 사우디의 국부펀드가 개최하는 대회다. 미켈슨 외에도 더스틴 존슨, 브라이슨 디샘보, 버바 왓슨(미국) 등 정상급 선수들이 페블비치 프로암을 외면하고 이 대회에 출전했다. 이들은 거액의 초청료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미켈슨은 사우디 자본이 준비하는 슈퍼 골프리그와 오래전부터 만난 이력이 있고 여러 차례 긍정적인 발언을 해 왔다.
사우디 대회를 마친 미켈슨은 “PGA투어는 선수에게 지급해야 할 돈을 제대로 주지 않고 선수가 가져야 할 미디어 권리를 챙기고 있다”며 “PGA투어의 탐욕은 역겹다”고 했다. 올해 52세인 미켈슨은 2021년 PGA챔피언십에서 사상 최초로 50대 메이저 챔피언에 오른 전설이다. PGA투어에서 45승을 올렸고 50세 이상 선수들이 뛰는 챔피언스 투어에서도 4승을 거두었다.
거센 반론이 쏟아졌다. PGA투어 선수 출신인 미국 골프 채널의 해설가 브랜들 챔블리는 “사실 관계부터 틀렸다. 어떤 스포츠 리그도 선수 개인에게 미디어 권리를 주지 않는다. 그러면 스포츠 리그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며 “미켈슨은 자신의 권리는 중요하게 여기면서 인권에는 관심이 없다”고 꼬집었다. 사우디 정부가 인권 운동을 펼치던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를 살해한 것을 세계 골프 스타들이 출전하는 스포츠 이벤트로 희석시키는 ‘스포츠 워싱’에 미켈슨이 동조한다는 지적이다. AP칼럼니스트인 짐 러스키는 “PGA투어 덕분에 8억 달러의 자산을 쌓은 미켈슨이 할 말은 아닌 것 같다. PGA투어가 없었다면 미켈슨을 비롯한 많은 선수가 100만 달러가 넘는 상금을 주는 대회 대신 회원제 골프장에서 돈을 걸고 경기했을 것”이라고 했다.
사우디 국부펀드의 우회전략, 아시안투어
이런 플랫폼 전쟁에서 묻지마 투자로 돈벼락을 맞은 곳이 바로 아시안투어다. 코로나로 존폐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영향력이 줄고 있던 세계 골프의 변방 아시안투어에 호주의 그레그 노먼이 대표를 맡은 LIV 골프 인베스트먼트가 2억 달러를 투자해 올해부터 10년간 대회 10개를 새로 개최하기로 한 것이다. 신설 대회는 올해 3월 태국에서 첫 대회를 치르고 이후 잉글랜드, 한국, 베트남, 중동, 중국, 싱가포르, 홍콩 등에서 대회당 총상금 150만 달러에서 200만 달러 규모로 열기로 했다.
아시안투어에 투자를 주도하는 LIV 인베스트먼트는 사우디 국부펀드가 대주주인 회사다. PGA투어와 유러피언 투어가 단합해 슈퍼 골프리그에 참가하려는 선수들을 제명하겠다고 하자 우회전략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화이트 샤크(백상아리)’란 애칭으로 세계 곳곳에서 88승을 거둔 레전드 노먼은 이미 미 PGA투어 체제에 반기를 든 적이 있다. 1990년대 중반 노먼은 월드 골프투어(WGT)란 기치 아래 세계 톱 랭커 30~40명이 출전하는 8개의 챔피언십 대회를 구상했지만, 스타 선수들의 참가를 이끌어 내지 못했다. 세계 1위 욘 람과 로리 매킬로이(북아일랜드) 등 많은 선수가 아직은 사우디 오일달러가 추진하는 슈퍼 골프리그에 회의적이다. 타이거 우즈도 역사와 전통을 중시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여기에 최근 디샘보와 존슨이 슈퍼 골프리그 합류를 포기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미켈슨이 PGA투어에 대한 자신의 비난 발언을 사과하며 당분간 골프를 떠나 자성의 시간을 갖겠다고 밝히는 등 상황이 급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