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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풍을 넘어 이야기가 있는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들.
우리가 쉽게 마주했던 익숙한 작품부터 조금은 낯선 그의 작품까지 다양하게 감상해 보는 것은 어떨까.
writing. 이소영(소통하는 그림연구소 대표)
반 고흐가 그림에
담은 이야기들
미술관에서 우리가 만나는 화가들 중 작품의 제목과 작가의 이름을 보지 않고도 이 작품이 누구의 작품인지 맞힐 수 있다면? 그 화가는 성공한 것이라고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어떠한 화가만의 독특한 개성이 있는 그림 형식을 우리는 흔히 ‘화풍(畫風)’이라고 한다. 대표적으로 그림만 보고도 ‘어? 이 작품 누구 건데?’라고 맞출 수 있는 화가는 늘 사람의 목을 길게 그리는 아마데오 모딜리아니, 사람의 모습을 여러 각도에서 전개도처럼 펼쳐서 그린 파블로 피카소, 마치 돌 위에 그림을 그리는 듯한 질감을 늘 표현하는 박수근 등이 있다. 내가 만난 어떤 젊은 화가는 자신만의 화풍을 찾고 유지하면서도 자신의 작품을 복제하지 않고 꾸준히 발전하는 것이 자신의 영원한 꿈이라고도 말했다. (한 화가의 화풍이 확고해지면 한 화풍 안에서 반복적으로 같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있는데 그런 경우 우리는 스스로를 ‘자가 복제’하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화가에게 있어 ‘화풍’은 곧 개성이다. 가수에게도 특유의 창법이 있듯이 화가에게 ‘화풍’은 신분증이며, 이력서이며, 자기 자신이다. 한국의 많은 미술 애호가들이 좋아하는 화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화가, 태양을 닮은 화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 역시 그만의 화풍이 있다.
케이크에 생크림을 얹듯이 두텁게 쌓아올린 물감, 리드미컬하게 느껴지는 다소 긴 점으로 만들어진 붓 터치 등이 반 고흐가 가진 그만의 화풍이다. 하지만 전 세계인들이 모두 아는 반 고흐에게도 유명한 작품 못지않게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이 있다. 오늘은 반 고흐의 익숙한 작품과 낯선 작품을 순서대로 만나 보며 미술 작품과 대화하는 시간을 갖자.
반 고흐?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들은 대부분 자화상, 해바라기 꽃병, 별이 빛나는 밤 이 세 가지일 것이다.
반 고흐는 자화상을 많이 그린 화가로 유명하다. 1886년 2월부터 1890년 5월까지 반 고흐는 총 30점이 넘는 자화상을 그린다. 솔직히 말하면 그는 친구도 애인도 주로 없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가장 많이 그렸다. 그의 자화상 중 가장 유명한 자화상은 <귀에 붕대를 감고 있는 자화상>일 것이다. 1889년 1월에 그려진 이 작품 속에서 그는 스스로 귀를 자른 사람 치고는 상당히 차분하고 강직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되레 그의 눈동자에는 귀를 자른 기행을 해 마을 사람들이 걱정시켰던 ‘광기’보다는 ‘우직함’이 느껴진다. 자신의 등 뒤로 깊이 흥미를 가졌던 일본의 목판화 우끼요에가 걸린 것이 인상 깊다.
‘나의 꽃’ 해바라기 빈센트 반 고흐, 꽂병에 꽂힌 열두 송이 해바라기,
1888~1889, 91×72cm
자화상 못지않게 유명한 작품은 <해바라기>다. 반 고흐는 1887년 프랑스 파리의 몽마르트를 걷다가 마당에 핀 해바라기를 본다. 그리고 그 후 꾸준히 해바라기에 관심을 가진다. 그는 해바라기를 늘 ‘나의 꽃’이라고 표현했다. <해바라기>는 반 고흐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작품이 되었다. 반 고흐는 1888년 프랑스 파리에서 남부 아를 지방으로 스튜디오를 옮겨 작업을 시작했고, 이곳에서 해바라기 꽃병 연작이 탄생한다.
“캔버스 세 개를 동시에 작업 중이다. 첫 번째는 초록색 화병에 꽂힌 커다란 해바라기 세 송이를 그린 것인데, 배경은 밝고 크기는 15호 캔버스다. 두 번째도 역시 세 송이인데, 그중 하나는 꽃잎이 떨어지고 씨만 남았다. 이건 파란색 바탕이며 크기는 25호 캔버스다. 세 번째는 노란색 화병에 꽂힌 열두 송이의 해바라기이며 30호 캔버스다. 이것은 환한 바탕으로, 가장 멋진 그림이 될 거라고 기대하고 있다.” -<반 고흐 영혼의 편지> 중-
해를 향해 늘 고개를 돌리는 해바라기의 순종심과 열정이 반 고흐를 감동하게 한 것일까? 매일 팔리지 않는 그림들을 두고 물질과 자신의 삶이 평행선이라고 말하던 그에게 해를 바라보는 해바라기는 예술을 한없이 사랑하는 모습이 자기 자신 같았을 것이다. 아래 작품은 반 고흐의 작품 중 가장 사랑받는 작품이다. 그는 고갱과 다툰 뒤 스스로 귀를 자른 후 생레미의 요양원에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이 작품을 그렸다. 반 고흐는 밤 풍경을 좋아했다. 모든 것이 드러나는 낮보다 조금은 숨고 싶은 밤이 고흐에게 더욱 편안한 시간이 아니었을까? 밤하늘을 가득 채운 율동감 있는 붓 터치는 구름이 춤을 추는 듯하다. 이 작품을 볼 때마다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음악이 있다. 가수 돈 맥클린(Don Mclean)은 이 작품에 감동받아 음악을 만들었는데 그 곡이 바로 <Vincent>다. 돈 맥클린은 반 고흐에 대한 책을 읽고 그를 추모하기 위해 1971년 이 곡을 만들었다. 스트레스가 많은 날 이 음악과 함께 반 고흐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많은 사람들이 반 고흐를 다소 감정적이고, 어느 정도의 우울증이 있고, 다혈질적이었을 것이라고 (귀를 자른 사건 때문에) 생각할 테다. 하지만 그에게는 차분하고 집중하는 성격이 더 많았다. 자연을 오랜 시간 관찰한다거나, 평생 독서를 하는 습관을 가졌다거나… 이런 그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 바로 <프랑스 소설 더미>다. 반 고흐는 독서광이었다. 이 작품을 보면 공간 안에 책이 마구잡이로 흐트러져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책에 빠져 사는사람처럼 독서를 했었다.
그가 독서를 상당히 좋아한 것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생활습관이기도 했다. 반 고흐의 부모님은 그가 화가가 되는 것을 못마땅해했지만 어린 시절부터 교육에 열성적이라 저녁마다 아이들에게 책을 읽도록 했다.성인이 된 반 고흐는 어릴 적 이 습관 덕분인지 책을 상당히 사랑한다. 특히 그는 소설을 좋아했다. 그가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에는 책에 대한 이야기가 참 많이 나온다. 한국에 출간된 책 중에서 신성림이 옮기고 엮은 <반 고흐 영혼의 편지>라는 책을 보면 금방 알아차릴 것이다.
“우리는 졸라의 소설 <대지>와 <제르미날>을 읽은 사람들이잖아. 우리가 캔버스에 농부를 그린다면 그 소설들이 우리 몸의 일부가 되어 그림에 나타날 수 있다면 좋겠구나.”
프랑스 소설들이 마구잡이로 쌓여 있다. 지금 우리 집 서재 바닥을 보는 듯하다. 반 고흐가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한 말이다. 그는 사람들에 대해 이해하려면 소설을 읽어야한다고 강조했고 문학은 반 고흐에게 그림만큼이나 중요한 영감의 창고였다.
반면 반 고흐가 책을 그린 작품 중 이 작품은 의외로 사랑스럽다. 화면의 주를 이루는 주조 색상은 ‘분홍’이다. 많은 사람들이 반 고흐 하면 노란색을 많이 사용했다고 생각하는데 반 고흐 삶의 전체적인 작품을 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내가 이 작품에서 가장 흥미롭게 느낀 부분은 아몬드 나무의 색과 책의 색을 어울리게 배치했다는 점이다. 풍족하게 살지 못했던 반 고흐의 삶을 생각해 볼 때 그에게 책과 마을 어딘가에서 가져온 꽃으로 꽃병을 만든 것은 가장 소중하고 아끼는 자산이었을 것이다. 앞의 작품에서 보여 줬던 독서광적인 측면과 다소 대비되는 단정하면서도 편안한 느낌의 작품이다.
성경책이 주인공인 오른쪽 작품은 반 고흐아버지의 직업과 관련이 있다. 그의 아버지인 테오도루스 반 고흐의 직업은 목사였다. 아버지는 아들이 목사가 되길 바랐다. 하지만 반 고흐는 아버지의 바람에 부응하지 않았고, 나이 서른이 넘어서도 작품을 제대로 팔지 못하는 인기 없는 화가로 생을 연명해 나갔다. 심지어 동생 테오의 지원을 받으면서 말이다. 반 고흐는 이 그림을 1885년 10월에 완성하는데 같은 해 3월 그를 끝내 이해하지 못하던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
이 그림은 다른 작품에 비해 다소 어두운 경향을 띈다. 어둠 속에서 성경책이 펼쳐진 부분에만 포인트 조명을 비춘 듯해서 마치 성경책과 그 옆의 책들을 무대 위의 주연과 조연처럼 배치했다. 화면의 중앙에 크게 그려진 책은 아버지가 좋아했던 성경책이다. 아버지를 상징하는 성경책이 있는 이 그림은반 고흐가 끝내 소통하기 어려워하던 아버지의 또 다른 초상화 같다. 자세히 보면 성경책 앞에 작은 소설책이 놓여 있는데 이 책은 작가 에밀 졸라(Emile Zola)가 쓴 <산다는 것의 즐거움>이다. 이 그림은 결국에는친해지지 못했던 고흐와 그의 아버지 두 사람의 초상화인지도 모른다.
빈센트 반 고흐는 자주 의기소침해졌고, 때로는 과격했고, 꾸준히 선량했다. 무엇보다 세상의 작은 요소까지 에너지를 담아 볼 줄 아는 화가였다. 그의 그림들 속에는 그가 화가로 얼마나 열정적으로 살아가기를 원했는지 담겨 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반 고흐의 그림에서 매번 삶을 대하는 그의 태도를 보는 것이다. 돈 맥클린이 작사, 작곡한 <Vincent>의 한 구절로 글을 마감한다. 그는 적어도 반 고흐를 온전히 이해한 듯하다.
“이제서야 난 이해하죠. 당신이 내게 무엇을 말하려고 한 건지, 당신이 온전한 정신을 찾기 위해 어떻게 했는지,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어떻게 노력했는지, 사람들은 들으려 하지도 않았고, 어떻게 들어야하는지도 몰랐죠. 아마도 지금은 들으려고 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