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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에 의연하고 성공에 겸허한 산악인 엄홍길
히말라야보다 높은 용기로
새로운 역사를 쓰다- 글 임산하
- 사진 김범기, 엄홍길휴먼재단 제공
- 엄홍길 대장의 여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연의 냉혹함 앞에서도 강인하게 한 걸음을 내디뎠던 그의 용기는 분명 히말라야보다 높았다. 신화라 불리는 엄홍길 대장의 용감한 발걸음이 향하는 다음 목적지는 사람이다. * <with IBK> 12월호에 관련된 모든 촬영은 코로나19 방역수칙을 준수하여 진행하였습니다.
산이 마음에 배어들다
세계 최초 히말라야 8,000m 16좌를 완등한 신화적 인물, 엄홍길. 산악인의 대명사로 불리는 그의 이름 석 자에는 열정과 도전이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 그에게도 물론 시작은 있었는데, 3살 무렵부터 의정부의 원도봉산 자락에서 살았던 그에게 산은 그저 불편한 공간이었다. 등굣길마다 마주해야 하는 산길이 어린 그에게는 너무 험난했던 것. 그런데 학교를 오가는 길이 익숙해지면서 조금 더 주변을 둘러보게 된 그는 계절을 따라 옷을 갈아입는 산의 모습에 흠뻑 빠지게 되었다. 그렇게 산이 마음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산이 자연스럽게 그의 몸속에 배어들었고, 선명하게 느껴질 만큼 몸에 퍼지는 산에 대한 애정을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짐짓 천연덕스럽게 받아들였다.
“원도봉산에는 두꺼비 바위라는 암장(巖嶂)이 있습니다. 그 바위 절벽을 오르는 사람들을 보며 15살 무렵에는 암벽 등반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되었죠. 그때 저는 그야말로 물 만난 물고기 같았어요.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습니다.”
유년시절의 놀이터이자 삶의 터전으로서 산은 엄홍길 대장의 가슴에 웅장한 산세를 드리웠다. 그 후 1977년, 고등학생이던 엄홍길 대장은 우연히 신문에서 산악인 고상돈의 사진을 보게 되었다.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최초의 한국인 고상돈의 모습은 엄홍길 대장을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의 길로 인도했다.
“빨간색 다운 자켓과 팬츠을 입은 고상돈 선배님의 사진 속 모습이 여전히 생생합니다. 고글과 산소마스크를 쓰고 정상 위에서 태극기를 든 그 모습을 보며 언젠가는 에베레스트에 도전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엄홍길 대장의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냉혹한 실패 앞에 주저앉지 않다
냉혹한 추위와 험준한 산맥으로 가득했던 에베레스트는 1985년 엄홍길 대장의 첫 도전에 실패를 안겨 주었다. 막연히 한라산의 네다섯 배 높이라는 생각으로 겁 없이 도전했던 엄홍길 대장은 직접 그 안에 발을 디디고서야 자신이 기고만장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국의 산을 누비고 다니면서 자아도취에 빠졌던 거죠. 8,000m는 높이도 어마어마하지만 규모와 기후 등에서도 전혀 다른 세상이었어요. 그야말로 처음 대자연을 만났던 겁니다. 그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며, 부끄러움을 안고 내려와야 했습니다.”
대자연 앞에서 휘청이던 자신의 미약함을 절감했던 엄홍길 대장. 그러나 그는 실패를 발판 삼아 다시 준비하기 시작했다. 신체적으로 어떤 부분을 보강해야 하며, 현장에서 무엇이 필요한지 등을 철저히 분석한 그는 1년 뒤 두 번째 도전장을 내밀었다.
“첫 도전에서는 그저 이론으로만 알고 갔다면, 두 번째에는 한 번 실전 경험을 했기에 마음가짐도 달랐습니다.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베레스트는 완강했다. 쉽사리 기회를 내어 주지 않았고, 그곳에서 엄홍길 대장은 함께 등반하던 셰르파(히말라야 고산 등반 안내인), 술딤 도르지와 영영 이별을 하게 되었다. 1,200m 절벽 아래 크레바스(빙하가 갈라지며 생긴 좁고 깊은 틈) 속으로 추락하여 시신도 찾지 못한 채 하산해야 했던 그는 동료의 죽음이라는 충격과 스스로에 대한 원망으로 ‘산’을 인생에서 버리기로 결심했다.
실로 잔인한 죽음이었다. 한국에 돌아온 뒤에도 엄홍길 대장은 일상 회복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1988년 서울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염원하는 산악 국가대표팀이 구성되면서 엄홍길 대장도 태극마크를 달게 되었다. 동료를 잃은 고통 속에서 엄홍길 대장은 이를 악물고 일어섰고, 결국 8,848m 높이에서 태극기를 들어올렸다.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는 세계 최고봉에 선 그때의 감동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히말라야 대자연의 아름다움이 발아래에 펼쳐지면서 지난날이 전광석화처럼 스치는 동시에 폭발하는 환희로 마음이 가득 찼습니다.” 두 번의 실패 앞에 완전히 고개를 돌렸더라면 그는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감격을 결코 누릴 수 없었을 것이다.
실패 앞에 의연하고 성공 앞에 겸허한 사람만이 내일을 빛낼 수 있다. 에베레스트 등반에 성공을 한 뒤에도 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다음 등정을 준비한 엄홍길 대장. 그는 그렇게 16좌 완등의 신화를 쓰게 된다.
히말라야를 배경으로 환히 웃고 있는 엄홍길 대장포기, 그러나 용기 있는 선택
마지막 고봉은 에베르스트의 동쪽에 위치한 로체샤르였다. 그런데 로체샤르는 엄홍길 대장에게 쉽게 머리를 내어 주지 않았다. 세 번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도전을 계속한 엄홍길 대장은 2007년 ‘내 인생에 마지막 심판대’라는 생각으로 로체샤르 등반 여정에 올랐다.
엄홍길 대장은 8,000m 이상은 신의 영역이라 말한다. 그 이상에서는 신이 이끌어 주어야만 정상을 밟을 수 있다. 로체샤르를 네 번째 도전했던 그때 비로소 로체샤르 신이 길을 열어 주었다.
“당시 6,000m가 넘는 지점에서 대원의 추락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추락지점에서 눈이 완충작용을 해 주어 다리에만 골절상을 입었죠. 무전기 너머 대원의 목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것 같습니다. 그때 로체샤르 신이 마음을 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두 번째 등반에서 엄홍길 대장은 두 명의 동료를 잃는 고통을 겪었다. 갑자기 눈사태가 일어났고 끝도 보이지 않는 절벽 아래로 두 명의 동료가 떨어졌다. 그곳은 정상을150m 앞둔 곳이었다. 세 번째 도전 때에는 동료를 잃은 사고지점에서 그 스스로 돌아 내려오기도 했다. “그때는 날씨도 완벽했습니다. 그런데 동이 트면서 설산에 해가 비치는데 로체샤르 꼭대기가 물결치듯 움직이는 것이 보였습니다.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았어요. 로체샤르 신의 경고였습니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대원들에게 돌아가자고 말했습니다.” 당시는 엄홍길 대장의 16좌 완등에 대한 기대로 한국 방송사와 언론사도 함께 베이스캠프를 지키고 있었다. 대원들도 쉽게 납득하지 못했지만 그는 선택을 번복하지 않았다. 그것은 포기가 아닌 용기였다.
또다시 역사를 쓰며 나아가다
무수한 실패와 두려움 그리고 중압감 속에서도 다음 걸음을 내디뎠던 엄홍길 대장. 산의 정상을 바라보며 살아왔던 그에게 어느 순간 산 아래에 있는 사람의 세상이 눈에 들어왔고, 히말라야 아래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의 삶과 환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며 깨달은 봉사 정신은 엄홍길휴먼재단 설립으로 이어졌다. 네팔 등의 개발도상국가를 위한 교육 및 의료 지원 사업, 국내외 소외계층 지원 사업, 환경보호 사업 등을 진행하고 있는 ‘엄홍길휴먼재단’. 지금까지 네팔의 오지마을에 16개의 휴먼스쿨과 셰르파를 위한 병원을 설립하였는데 첫 휴먼스쿨을 완공한 곳은 에베레스트에서 이별해야 했던 셰르파, 술딤 도르지의 고향 팡보체였다.
휴먼스쿨에서 아이들은 더 풍성한 희망을 품고, 더 큰 꿈을 꾸며 자란다. 이제는 1,000여 명의 학생이 함께할 수 있는 상징적인 교육 타운을 짓고 있는 중인 엄홍길 대장. 그의 다음 목표는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아우르는 종합학교에 마을회관, 도서관, 실내체육관 등이 있는 ‘딸께 휴먼스쿨 타운’ 건립이다. 또다시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는 엄홍길 대장은 분명 히말라야보다 더 큰 사람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