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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의 달고나를 들고 메타버스로 날아간
2021년- 글 이명석(문화비평가)
- 아무리 곡식을 무성히 거두어도 자루를 제대로 매듭짓지 않으면 한 해의 고생이 헛수고가 된다. 온갖 실수와 실패로 범벅이 된 시간일지라도 서로를 다정히 안으면 소중한 배움의 기억으로 남을 수도 있다. 우리는 이 한 해 동안 무엇을 만나고 어떤 일을 해 왔나? 우리가 함께 기록한 2021년의 일기장을 넘겨 보며 가장 눈에 띄는 단어들을 찾아보자.
흰색의 세상에 황금의 희망을 주다
흰색. 올해의 사진들을 되돌아볼 때 우리의 얼굴 대부분은 하얀 천으로 가려져 있을 것이다. 그래도 모두의 노력 덕분에 입과 코를 내놓고 숨 쉴 때가 가까워지고 있다.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들의 도움이 아주 컸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들이 우리에게 놓아준 ‘백신(vaccine)’은 한자어가 아니지만 어쩐지 ‘흰 백(白)’ 자를 쓸 것만 같다. 인구 전체 접종률 80%, 성인 접종률 90%를 넘어가고 있으니, 하얀 눈이 그치고 봄이 올 때쯤에는 하얀 마스크의 세상과 작별할 수 있지 않을까?
황금 트로피. 미국 아카데미상의 수상자에게 주어지는 트로피는 브리테니엄 합금에 24K로 도금을 해서 만든다. 세계 영화인이 우러러 보는 그 영광의 상징을 영화 <미나리>의 윤여정이 한국 배우 최초로 받았다. 편안한 드레스 차림에 거침없는 입담으로 수상 소감을 말해 오스카상 사회를 맡겨야 한다는 소리를 들었고, 70대에도 영광은 찾아온다는 메시지를 전하며 고령화로 향해 가는 세계에 큰 희망을 주기도 했다. 대중음악계에서는 방탄소년단이 MTV 비디오 뮤직 어워드에서 올해의 그룹 등 3관왕, 빌보드 어워드에서 톱 듀오/그룹 등 4개 부문을 수상했고,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에는 아티스트 오브 더 이어 등 3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세대를 뛰어넘은 K-컬처가 황금 트로피를 가득 거머쥔 한 해였다.
현실의 공간으로 성큼 들어온 가상 세계
메타 월드. 지난 몇 년간 꾸준히 성장해 오던 가상 세계와 관련된 비즈니스, 엔터테인먼트가 팬데믹의 비접촉 시대를 만나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아무리 그래도 아날로그와 실물’을 외치던 사람들도 줌 회의를 넘어 아바타 회의를 경험하고 있고, 암호화폐, 메타버스, NFT가 눈앞에 성큼 다가왔음을 깨닫고 있다. 기업가 일론 머스크가 SNS와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내뱉은 한마디로 암호화폐의 가치를 춤추게 하더니, 미국과 중국 등에서 강력한 과세와 환경 오염을 위한 채굴 금지령을 내놓아 투자자들을 울상 짓게 했다. 서울시가 고성능 자체 플랫폼 ‘메타버스 서울’을 구축하기로 밝히는 등, 곳곳에서 가상 세계를 만들기 위한 착공식이 이어지기도 했다.
가상 아이돌. 상반기에는 가상의 캐릭터로 활동하는 아이돌 그룹 매드 몬스터가 스타들의 부캐 놀이를 새로운 단계로 옮겨 놓았다. 하반기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간 완전한 가상 아이돌의 세계가 현실화되고 있다. “진짜 사람 아니었어?” 싸이더스스튜디오가 개발한 버추얼 인플루언서 로지가 여러 광고를 휩쓸고 유튜브를 뒤흔들고 있다. 코로나의 위험에서 완전히 자유롭고, 인성과 사생활 논란도 완벽히 통제할 수 있는 새로운 아이돌의 원년으로 기록할 수 있을 것 같다. 중국에서도 온라인 플랫폼 샤오홍슈에서 지웬메이, 아야이(AYAYI) 등 가상 아이돌들이 각축을 벌이고 있는데 종래와는 다른 고급스러운 외모, 자연스러운 움직임, 세련된 스타일로 각광받고 있다. 국내에서도 펄스나인의 가상 아이돌 그룹 ‘이터니티’에 이어 카카오엔터테인먼트의 4인조 가상 걸그룹 프로젝트 ‘메이브(MAVE:)’가 등장할 예정이고, 음료회사에서도 사이버 아이돌을 만들며 ‘세계관 마케팅’에 나서고 있다. MZ 세대들의 영향력이 큰 유튜브에서는 이미 버츄어 유튜버들의 인기 경쟁이 뜨겁다.
세계인의 주목을 받은 올림픽과 문화 콘텐츠
다섯 개의 동그라미. 역사상 가장 걱정을 많이 끼쳤던 스포츠 이벤트가 한 해를 미룬 뒤에 펼쳐졌다. 불안정한 방역 상황, 깜깜이 정책, 빈약한 예산으로 인한 부실한 준비 등 갖가지 불안 속에 2020 도쿄올림픽이 열렸다. 가장 가까이 있는 한국에서는 더 큰 걱정으로 바라보았는데, 뜻밖에도 막상 경기가 벌어지자 “안 했으면 어쩔 뻔 했어.”라는 반응을 얻었다. 양궁에서 어린 선수들이 우렁찬 기합과 냉철한 심박수로 금메달을 쓸어 담았고, 여자 배구는 온갖 악조건 속에서도 4강을 이루었다. 어쩌면 IMF의 어려운 상황에서 박찬호, 박세리를 통해 얻었던 용기를 이번 올림픽의 태극 전사들로부터 다시 얻어냈던 것이 아닌가 싶다. 특히 어려운 때일수록 하나의 팀으로 힘을 모아야 한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달고나. 모두가 추억 속에서나 만나던 이 단어로 2021년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게 되었다. 게다가 우리만이 아니라 전 세계인을 그 파티에 동참시켰다. 시작은 팬데믹 기간에 집안에 박혀 있던 사람들이 오랫동안 믹스 커피를 저어 만든 ‘달고나 커피’였다. 국내에서 유행한 직후, 방탄소년단 등 여러 K-팝 스타들이 참여하자 세계의 SNS에서 따라하기 열풍이 이어졌다. 영국의 BBC와 미국의 여러 채널들이 앞다투어 레시피를 소개하기도 했다. 하반기엔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의 ‘달고나 뽑기’가 그 인기를 이어받았다. 역시 팬데믹으로 인해 OTT 이용자가 급증하는 가운데 <오징어 게임>이 넷플릭스 순위가 집계되는 83개국 모두에서 한 번씩 1위를 차지하는 신기록을 세우며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세계 동시다발의 인기를 얻었다. 현대의 극심한 경쟁 사회를 흥미진진한 게임으로 풍자했다는 평가 속에 할로윈 시즌에는 거대한 영희 인형과 드라마 속 체육복이 가장 인기 있는 코스튬 아이템이 되기도 했다. <뉴욕타임스>는 이제 한국을 두고 ‘문화계 거물(Cultural Juggernaut)’이라 부르고 있다.
이제 다시 카운트다운을 시작할 때다
카운트다운. 생활로서는 아픔이 많았지만 문화적으로는 어느 때보다 벅찬 감격을 많이 얻었던 한 해였다. 그리고 뜻밖의 장면이 모두의 가슴에 큰 희망의 불길을 만들어 냈다. 지난 10월 21일 한국형 우주발사체 누리호(KSLV-Ⅱ)가 거대한 화염을 내뿜으며 우주로 비상했던 것이다. 최종 단계인 궤도 안착까지 완전히 성공시키지는 못했지만 열악한 예산 규모 속에서 12년의 노력 끝에 얻어낸 결실이었고 ‘실패를 통해 더 많이 배우는 시험 비행’으로서는 성공의 박수를 받기에 충분했다. 내년 2호기의 발사, 그리고 2030년 달 탐사 착륙선과 한국형 GPS인 KPS, 소행성 탐사 등 여러 우주 프로그램에 대한 기대는 더욱 커졌다.
이제 우리도 2021년의 마지막 날짜들을 카운트다운해야 할 때다. ‘무야호’의 순박한 환호와 ‘롤린’의 눈물 나는 역주행을 지나, 서로를 위로할 ‘깐부’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닫게 된 한 해였다. 소중한 사람들과 모여 각자의 지난날을 돌아보며, 올해의 기억으로 남길 만한 단어들을 찾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