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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을에 떠나면 좋은
    문학기행 1번지, 남원

    • 송일봉(여행작가)
  •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자 ‘등화가친(燈火可親)’의 계절이다. 여름 내내 가까이하지 못했던 책을 읽으며 잠시나마 평온한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시기이다. 이 계절에 딱 어울리는 여행지 가운데 하나가 전라북도 남원이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남원은 지리산과 섬진강을 품은 멋과 풍류의 고장이다. 그래서 남원의 어딜 가나 정겨운 우리 가락이 들려오고, 발길 닿는 곳마다 우리 조상들의 해학과 지혜를 엿볼 수 있다. 남원 곳곳에는 문학과 관련된 명소도 많다. 그 대표적인 곳으로 혼불문학관, 광한루원, 김병종미술관, 동편제마을 등이 있다.
  • 지리산에서 내려다 본 남원의 가을
  • 소설 <혼불>의 한 장면을 표현한 디오라마
혼불문학관, 대하소설 <혼불>의 발상지

최명희 작가의 대표적인 소설 <혼불>은 월간 신동아에 8년 동안 연재했던 글들을 모아서 1996년에 10권짜리 책으로 펴낸 대하소설이다. 200자 원고지로 따지면 무려 1만 2,000매에 달하는 막대한 분량이다. <혼불>은 잔잔한 재미보다는 깊은 감명을 주는 소설이다. 그래서 읽을수록 소설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혼불>의 시대적인 배경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다. 최명희 작가는 소설에서 매안 이씨 집안의 3대에 걸친 종부들의 이야기를 통해 일제강점기 당시 민초들의 생활상을 실감나게 표현했다. 게다가 일반적인 소설과는 달리 우리의 세시풍속과 관혼상제 등을 꼼꼼하게 서술하고 있어서 일종의 백과사전과도 같은 느낌을 준다. 실제로 최명희 작가는 <혼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 두 달 넘게 중국의 동북 지방에서 지내기도 했다. <혼불>의 주 무대는 남원시 사매면에 있는 노봉마을이다. 현재 이 마을에는 최명희 작가의 문학정신을 기리는 혼불문학관이 세워져 있다. 지난 2004년에 개관한 혼불문학관에는 최명희 작가의 육필원고와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소설 속에 등장하는 효원의 혼례식, 강모와 강실의 소꿉놀이, 액막이 연날리기, 청암 부인 장례식 등을 디오라마(축소모형)로 재현해 놓았다.
혼불문학관 주변에서는 <혼불>에 등장하는 명소들도 찾아볼 수 있다. 문학관 뒤에는 노적봉이 있고, 문학관 옆에는 청호저수지가 있다. 그리고 혼불문학관 근처의 사매면 서도리에는 <혼불>에 등장하는 ‘옛 서도역’이 있다. 비록 승객이 타고 내리는 기차역은 아니지만 지금도 영화나 드라마 촬영지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 1998년에 세상을 떠난 최명희 작가의 묘소는 현재 전라북도 덕진구 덕진동에 있다.

빛으로 수놓인 아름다운 광한루
광한루원, 소설 <춘향전>의 무대

광한루원은 소설 <춘향전>의 무대로 잘 알려져 있는 명소다. 성춘향과 이몽룡이 처음 만난 장소로 광한루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소설 속의 성춘향은 남원 기생의 딸이고, 이몽룡은 남원사또의 아들이다. 그리고 <춘향전>을 바탕으로 구성된 춘향가는 판소리 다섯 마당(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흥부가, 적벽가) 가운데 작품성이 가장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원을 대표하는 관광명소인 광한루원은 누각인 광한루를 비롯해서 연못, 세 개의 섬, 오작교 등으로 이뤄져 있다. 광한루원의 연못은 은하수를 상징하고 세 개의 섬은 신선이 사는 삼신산(三神山)을 의미하고 있다.
광한루원의 중심 건물인 광한루는 조선시대 초기에 처음 지어졌다. 당시 이름은 광통루였다. 이후 전라도관찰사 정인지가 “마치 달나라 궁궐인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처럼 아름답다”라고 감탄한 이후로 ‘광한루’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현재의 광한루는 조선 인조 때인 1626년에 새로 지어졌다.
광한루원 안에는 ‘월매의 집’도 조성되어 있다. ‘월매’는 성춘향의 어머니다. ‘월매의 집’ 앞마당에는 연못이 있고, 그 안에 조그만 항아리가 하나 있다. 이 항아리 안에다 동전을 던져 넣으면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라는 춘향가의 한 대목이 들린다.
광한루원에서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명소는 돌다리인 ‘오작교’다. 이 ‘오작교’는 판소리 춘향가에 “광한루도 좋거니와 오작교가 더욱 좋다. 오작교가 분명하면 견우직녀 없을소냐”라는 대목으로 등장하는 명물이다.

자연친화적으로 지어져 있는 김병종미술관 전경
김병종미술관, 북카페가 있는 남원의 ‘핫 플레이스’

남원시에서 운영을 하는 김병종미술관(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은 전망이 좋은 한적한 숲속에 자리 잡고 있다. 단순히 미술작품을 감상하는 것에서 벗어나 자연의 아름다움과 인공이 주는 편안함을 모두 느낄 수 있도록 꾸며진 미술관이다. 따라서 이 미술관에 오면 먼 산이 보이는 테라스에 앉아서 휴식을 취할 수 있고,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북카페에서는 모처럼의 독서 시간도 가질 수 있다.
지난 2018년 3월 2일에 문을 연 김병종미술관은 빠른 시간에 남원의 ‘핫 플레이스’로 떠오른 문화명소다. 문화체육관광부에 의해 ‘2021~2022 시즌 한국관광 100선’에 선정된 명소이기도 하다. 김병종미술관은 남원 출신의 화가인 김병종 화백이 기증한 작품들 위주로 전시를 하고 있다. 기획전을 통해서 다른 작가들의 회화, 조각, 사진 등도 전시하고 있다. 김병종미술관은 미술작품을 감상하고, 편하게 앉아서 자연경관을 감상할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1층의 ‘갤러리1’은 김병종 화백의 다양한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이곳에는 대작인 ‘지리산과 섬진강’을 비롯해 ‘생명의 노래’ 연작, ‘화홍산수’, ‘춤추는 최승희’, ‘바보 예수’ 등이 전시되어 있다. 주기적으로 교체전시를 하기 때문에 주제에 따라 김병종 화백의 다른 작품들을 전시하는 경우도 있다.
김병종미술관 1층 한 켠에는 북카페인 ‘화첩기행’이 있다. 이 북카페에는 미술뿐만 아니라 문학이나 인문학과 관련된 도서 2,000여 권이 전시되어 있다. 차를 마시면서 편안하게 책을 읽을 수 있어서 좋은 공간이다. 김병종미술관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이곳이 치밀하게 계획된 자연친화형(전원형) 미술관이라는 점이다. 주변에 다른 건물이 없다는 점이 그렇고, 독특한 형태의 깔끔한 미술관 건물이 자연과 잘 어울린다는 점이 그렇다. 스코프(Scope)를 닮은 미술관 2층의 대형 유리창도 눈길을 끈다. 이 창을 통해서는 매번 다른 그림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림의 제목은 따로 없다. 날씨에 따라, 계절에 따라, 그리고 바람의 세기에 따라 창밖 풍경이 시시각각 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한참을 앉아서 책을 읽어도 좋은 공간으로 인기가 많다.

동편제 마을 동편제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는 조형물
동편제마을, 테마가 있는 자연마을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에 있는 동편제마을은 ‘동편제 판소리’와 깊은 관련이 있다. 조선 말기에 크게 이름을 떨친 판소리 명창 송흥록이 태어난 마을이기 때문이다. 송흥록은 ‘동편제 판소리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특히 “쑥대머리 귀신형용”으로 시작되는 춘향가의 ‘옥중가’ 대목을 실감나게 표현한 명창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체험휴양마을인 동편제마을은 화수리의 전촌마을에 있다. 해발 470m 지점에 있는 동편제마을은 전라북도에서 추진하는 ‘2020년 테마가 있는 자연마을’로 선정된 곳이다. 현재 이 마을에는 방문객들을 위한 자연친화형 숙소와 식당도 잘 마련되어 있다.
동편제마을 근처의 둘러볼 만한 문화유적지로는 황산대첩비가 있다. 황산대첩비는 고려 우왕 때인 1380년 이성계 장군이 왜구를 크게 물리친 ‘황산대첩’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전승비다. 황산대첩비는 조선 선조 때인 1577년에 운봉현감 박광옥이 처음 세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본래의 황산대첩비는 일제강점기 때 파괴되었다. 현재 황산대첩비지(사적 제104호)에 있는 황산대첩비는 1957년에 복원한 것이다. 일제에 의해 파괴된 비석 조각들은 황산대첩비 근처에 있는 파비각에 보관되어 있다. 파괴되기 이전의 비문은 국립전주박물관 역사자료실에서 탑본(搨本)으로 소장하고 있다.
황산대첩비지 서쪽의 작은 석벽 위에는 ‘어휘각’이라 불리는 작은 전각이 세워져 있다. 이성계 장군의 대장부다운 ‘겸손함’을 엿볼 수 있는 유적이다. 이성계 장군은 황산대첩이 일어난 이듬해인 1381년, 석벽에다 자신의 이름과 함께 원수 8명과 종사관 4명의 이름을 새기게 했다. 황산대첩의 승리에는 자신을 도와 치열한 전투를 벌인 부하 장수들의 공이 컸다는 것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석벽에 새겨진 글씨 역시 일제에 의해 대부분 훼손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