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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음의 근손실,
    읽고 쓰기로
    막아 볼까요?

    • 이명석(문화비평가)
  • 이것 참 이상한 일이다. 퇴근 후의 왁자지껄한 회식이 없어지자 작은 책방에 들러 조용히 글을 만나는 재미를 얻었다. 숨차게 내달리면 몸이 즐거워지듯 생각의 근육을 움직이니 마음이 상쾌해졌다. 남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내 이야기도 쓰고 싶어졌다. 쓰다 보니 알게 되었다. 나도 꽤 괜찮은 사람이야.
애서가들이 책을 즐기는 다양한 방법

우리는 매일 읽고 쓰고 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20년 전의 사람들보다 더 자주 읽고 쓴다. 사람과 직접 만나거나 전화로 대화하기보다는 문자, 카톡, 이메일로 의사를 주고받는 경우가 훨씬 많아졌기 때문이다. 또한 SNS와 인터넷에 쏟아지는 온갖 뉴스와 정보들을 읽어야 하고, 거기에 댓글을 달거나 자신의 SNS나 블로그에 글을 올리기도 한다. 물론 책은 잘 읽지 않는다. 좋은 건 알지만 긴 글은 벅차다. 안 읽으니 점점 힘들어진다.
책 읽기는 운동과 비슷하다. 어린 시절부터 꾸준히 해 온 사람들은 재미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금방 숨이 차서 헐떡거린다. 이럴 때 함께 시작할 수 있는 친구들이 있다면 큰 도움이 된다. “아니, 그게 말이 돼요? 책은 혼자서 읽어야 하잖아요. 테니스, 사교댄스, 합창처럼 함께 즐길 수 있는 취미가 아니라고요.” 과연 그럴까? 책을 함께 읽는 다양한 방법들이 있다.
미국의 토크쇼 진행자 오프라 윈프리가 만든 ‘오프라 윈프리 북클럽’이 올해로 25주년을 맞았다. 오프라는 <백년 동안의 고독>, <안나 카레니나>, <에덴의 동쪽> 같은 고전 중심의 책 읽기 운동을 벌여 독서 시장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 방법은 ‘함께 달리기’처럼 기간을 정해 놓고 같은 책을 서로 응원하며 읽어 가는 것이다. 두꺼운 책을 읽을 때는 티셔츠를 맞춰 입고 마라톤하듯이 집단 독서를 하기도 한다. 이제는 그 흐름을 사라 제시카 파커의 ‘ALA 센트럴 북클럽’, 리즈 위더스푼의 ‘리즈 북클럽’ 엠마 왓슨의 ‘책장 공유’ 등 다음 세대의 유명인들이 이어받고 있다.

낯선 세계를 탐험하는 독서라는 놀이터

국내에서도 크고 작은 북클럽과 독서 살롱들이 애서가들의 놀이터가 되고 있다. 비슷한 취향의 사람들을 위한 모임이 많은데, 미스터리 전문 서점에 모여 추리 소설을 탐독하거나 문학 서점에서 시집을 함께 낭송한다. 이들은 단지 읽는 데 그치지 않고, 책을 매개로 다양한 생각을 나누며 또 다른 즐거움을 얻는다. 입으로 소리 내어 책을 읽는 낭독에 대한 관심도 늘어나고 있다. 저자나 전문 낭독자가 공연 형식으로 읽기도 하지만 일반 독자들이 조금씩 책을 나누어 읽기도 한다. 낭독은 오감을 활짝 열어 독서를 동적으로 만드는데, 비대면 시대에도 줌을 이용한 원거리 낭독 모임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옛날 여행 광고를 보면 누군가 기차역 벤치나 해변의 의자에 책을 들고 앉아 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출판과 여행은 낯선 세계를 탐험하는 방법이라 정서적으로 통하는 면이 많고, 산업적으로도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발전해 왔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오리엔트 특급 살인> 등 추리, 모험, 로맨스류의 장르 소설은 장거리 여행객들에게 긴 여행 동안의 즐길 거리를 제공해 주며 인기를 모았다. 세계적으로도 서점, 북카페, 도서관을 거점으로 삼아 여행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데, 최근에는 국내에서도 책방 순례 여행이 인기를 모으고 있다. 제주 종달리 바닷가의 ‘소심한책방’, 수원 화성행궁 옆의 ‘브로콜리숲’, 군산 월명동 고풍스러운 거리의 ‘마리서사’ 등 독특한 분위기의 작은 서점들이 여행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속초의 ‘완벽한 날들’, 괴산의 ‘숲속작은책방’, 통영의 ‘봄날의책방’ 등 책에 둘러싸여 하룻밤을 보낼 수 있는 북스테이들도 있다.

한 번쯤 재고할 필요가 있는 우리의 문해력

꼭 종이책일 필요는 없다. 이제는 태블릿 PC, 전자책을 독서의 도구로 쓰는 사람도 적지 않고 스마트폰으로도 다양한 잡지를 읽을 수 있다. 인터넷에도 양질의 글들이 적지 않아, 국내외 온라인 신문 잡지의 우수한 칼럼을 꾸준히 읽는 것이 엉터리 책을 읽는 것보다 나을 수 있다. 그럼에도 책을 손에 들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우리 사회가 커다란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가 들린다.
올해 3월 EBS에서 방영한 <당신의 문해력>은 다소 충격적인 현실을 보여 주었다. 초등학교 1학년을 대상으로 ‘초기 문해력’ 진단평가를 했더니 10명 중 2명 이상이 ‘기초 미달’ 수준이었다. 중학교 3학년 대상의 ‘어휘력 진단평가’에서는 혼자 교과서를 섬세하게 읽고 공부할 수 있는 학생이 9%에 불과했다. 또한 문제 맞히기식의 교육이 누적되다 보니 대학을 졸업하고 기업에 취업해도 이메일 하나 제대로 이해 못하고, 보고서 한 장 제대로 쓰기 어려운 상황에까지 이른다.
최근의 세대들은 오랜 수험 생활과 인터넷 검색으로 정보와 지식을 취득하는 실력은 늘어났지만, 정작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글쓰기엔 서툰 경우가 많다. 그런데 예전 세대에 비해 이메일과 문자 메시지 등 글을 통해 업무를 진행하는 경우는 더 늘어났다. 그러다 보니 맞춤법 실수, 중언부언, 부정확한 표현 등의 허점이 또렷이 드러난다. 글쓰기는 작가의 전유물이 아니다.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남에게 전하는 데 사용하는 실용 기술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발견하는 읽고 쓰는 재미

최근 직장인들의 퇴근 후 글쓰기, 시니어들의 자서전 쓰기 등이 붐을 이루고, 글쓰기에 관련된 책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끼어들고 있다. 이들 중에는 뜻밖의 기회를 통해 직업적인 작가로 성공을 거두는 경우들도 있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는 독립 출판물로 나온 에세이가 입소문을 탄 뒤 정식 출판되어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여성 경찰 김승혜의 <혼자를 지키는 삶>, 배윤슬의 <청년 도배사 이야기> 등 자신의 직업적 경험과 거기에 얽힌 여러 생각을 에세이로 써서 출간하는 사람들도 부쩍 늘어났다.정통 문학 시장은 열세를 이어가고 있지만, 드라마, 영화와 연계되는 스토리텔링 시장은 급성장을 하고 있다. 그 기초가 되는 웹소설 시장에서도 신진 작가들의 도전이 거세다. 지난 7월 발표된 웹소설 플랫폼 ‘문피아’의 공모전에는 4천 명의 작가가 도전했는데, 이 중 신인이 절반에 이르고 작년보다 5백 명이나 늘었다고 한다. 전문 작가만이 아니라 의사, 회사원, 프로그래머 등 다양한 직업군들이 ‘퇴근 후 작가’를 꿈꾸는 일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엄마 말이 맞았어. 아무 것도 남은 게 없다면, 실크 속옷을 입고 프루스트를 읽어야 해.”
에르메스 ‘버킨 백’에 자신의 이름을 붙인 배우 제인 버킨의 말이다. 비대면이 강요된 지난 시간 동안 우리는 정말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답답함에 빠져 있었다. 어쩌면 이 시간이 읽고 쓰는 재미를 발견하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그러기 위해 일단 서점에 가서 마음에 드는 책 한 권을 사자. 가능하면 직접 책을 넘겨보고 그 맛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