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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 통화시장의 대변화
    화폐혁명의 변곡점에 서다

    • 글. 홍익희 전 세종대 교수
  • 세계 금융시장은 중앙은행디지털화폐를 중심으로 ‘분권화’와 ‘다양화’라는 변화의 길에 들어섰다. 이 거대한 변화의 흐름 속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들을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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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주도할 세 가지 통화시장

중앙은행디지털화폐 시대가 성큼 가시권으로 들어왔다. 내년 2월 북경 동계올림픽을 기점으로 중국이 중앙은행디지털화폐를 상용화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중앙은행디지털화폐 시대가 본격적으로 도래하면, 거래가 빨라지고, 저렴해지며, 투명해진다. 해외 송금에 중앙은행디지털화폐를 이용하면 송금수수료가 기존의 8~25%에서 5%로 저렴해지는 장점과 더불어 송금 시간도 대폭 단축할 수 있다. 하지만 약점도 있다. 투명해지는 거래는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할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중앙은행디지털화폐보다 더 빨리 치고 나오는 게 있다. 바로 민간 분야의 스테이블코인이다. JPM체이스은행이 만든 JPM코인은 기존 미국 정부 주도의 ‘국제은행 간 통신망(SWIFT)’ 시스템을 대체해 은행 간 송금시스템을 장악할 기세다. 환전이 필요 없는 스테이블코인의 송금수수료는 2%에 불과하며 송금 수취 사실을 즉시 확인할 수 있다. 돈이 어떤 통로를 타고 움직일지는 자명해진다. 게다가 마스터카드와 비자카드도 달러 등 법정통화와 연동된 스테이블코인을 결제통화로 사용하기로 했다. 제도금융권과 암호화폐 간의 칸막이가 벗겨지고 있다. 그런데 정작 스테이블코인이 많이 사용되는 곳은 암호화폐 시장이다. 최근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암호화폐 거래소의 거래 매개 통화가 스테이블코인이다. 또 제로금리 시대에 제법 큰 수익이 발생하는 매력적이고도 혁신적인 디파이(DeFi·탈중앙화금융) 시장과 NFT(Non-Fungible Token· 대체불가능 토큰) 시장에서도 스테이블코인이 필요하다. 돈은 수익이 나는 곳으로 몰리기 마련이다. 법정통화인 중앙은행디지털화폐의 대척점에 암호화폐가 있다면 그 중간 매개체가 스테이블코인이다.
중앙은행디지털화폐 시대가 도래하면, 모든 돈이 양지에 노출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불가피하게 지하경제에서 움직이며 노출을 꺼리는 돈들은 암호화폐 시장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중앙은행디지털화폐와 비례해서 암호화폐 시장도 일정 부분 커진다는 이야기이다. 중앙은행디지털화폐, 스테이블코인, 암호화폐가 펼쳐나갈 삼국지가 미래의 통화시장이다.

중국 중앙은행디지털화폐에 주목하다

이미 지난해에 4개 도시와 베이징올림픽촌에서 중앙은행디지털화폐의 1차 파일럿 테스트를 성공적으로 마친 중국은 올해 시험 지역을 상하이와 홍콩 등으로 넓혀 나갈 계획이다. 특히 홍콩은 역외시장이라는 측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올해 11월에는 미국 주도의 ‘국제은행 간 통신망(SWIFT)’에 맞서기 위해 만든 ‘위안화 국제결제시스템(CIPS)’에 중앙은행디지털화폐를 연동시킬 계획으로 알려졌다. 이어 내년 2월 베이징 동계올림픽 개막식 때 이를 공식적으로 세계시장에 선보이며 본격적인 상용화에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중국 중앙은행디지털화폐는 기본적으로 추적 가능한 화폐로 알리페이처럼 QR코드를 스캔해 돈을 지불하는 기능과 송금 기능이 있다. 또한 스마트폰 두 대를 서로 맞대는 ‘부딪치기’ 기능도 있는데 이는 인터넷 환경이 구축되지 않은 곳에서도 서로 돈을 주고받을 수 있게 한다. 이런 부딪치기 기능은 아직 인터넷이 접속되지 않는 빈곤 지역의 경제를 획기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는 화폐 시스템이 될 수 있다. 중국 중앙은행디지털화폐가 주목받는 이유는 중국이 세계 최대 무역국이기 때문이다. 향후 중국과 거래하는 나라들의 수출입 품목이 위안화 디지털화폐로 거래될 공산이 크다. 특히 중국이 대량으로 수입하는 석유 등 원자재 시장이 그렇다.

SWIFT에 대항하는 분권화 움직임

2021년 초 국제결제은행(BIS)은 65개 중앙은행 가운데 86%가 어떤 형태로든 중앙은행디지털화폐 관련 작업을 한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들의 합종연횡(合從連衡)이 곳곳에서 들려오고 있다. 전 영란은행 총재 마크 커니는 2019년 8월 “달러 환율 충격을 흡수하기 위해 글로벌 경제에 다수의 기축통화가 있어야 한다.”면서 유럽 주도의 ‘합성패권통화(Syn-thetic Hegemonic Currency)’를 제안했다. 각국 중앙은행디지털화폐를 네트워크로 연결해 일종의 ‘디지털 공동통화’를 만들어 달러에 대응하는 기축통화로 쓰자고 주장한 것이다.
러시아와 중국은 각각 2014년과 2015년에 미국 주도의 SWIFT에 대항하는 국제결제망 ‘SPFS’와 ‘CIPS’를 개발해 사용하고 있다. 이를 통해 중·러 간 무역에서 달러를 사용하는 비중이 90%에서 최근에는 40% 대로 줄어들었다. 여기에 인도도 가세했다. 2019년 중국과 러시아, 인도가 SWIFT 결제시스템을 거치지 않는 대항마를 만들기로 했다. 이는 세계 경제성장 기여도의 50% 정도를 차지하는, 인구 30억 명을 잇는 대안 결제시스템이 만들어짐을 의미한다. 이미 브릭스(BRICS·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공화국)는 무역거래에서 달러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2013년 ‘브릭스통화안정기금’ 발족과 2016년 ‘브릭스개발은행’을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미국 주도의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에 대한 도전이 시작된 것이다. 2018년 브릭스 정상회의에서 5개국이 블록체인 기술을 공동연구하기로 했다. 사우디아라비아를 중심으로 하는 이슬람권 디지털통화의 움직임도 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국가 비전으로 ‘아버 프로젝트’를 시작하여 1차로 아랍에미리트와 디지털 송금거래를 추진하고 있다.

개인 프라이버시 보호, 어떻게 이룰 것인가?

각국 중앙은행이 추진 중인 디지털화폐는 추적 가능한 중앙집권형 화폐이다. 그런데 국민들 입장에서 자신의 계좌가 추적당한다고 생각하면 반발이 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중앙은행들은 디지털화폐의 운영체계를 이원화하는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중앙은행에서 상업은행으로 디지털화폐를 보낼 때는 추적 가능한 디지털화폐를 보내지만, 상업은행과 개인 또는 기업 간 거래에는 추적 불가능한 익명성이 보장된 거래를 검토하고 있다.
중국의 경우 이원화 시스템을 사용하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중앙은행이 초당 30만 건 이상 거래되는 소매 시장까지 관여할 경우 통화관리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는 점이고, 또 다른 하나는 소액 거래에서 개인의 익명성을 최대한 보장해 주기 위함이다. 다만 이는 무제한의 익명성 보장이 아니라 ‘관리 가능한 익명성’ 보장을 의미한다. 곧 일정액 이상의 큰 금액의 거래는 실명 전자지갑을 통해 거래되어야 한다. 또 마약, 도박 등 불법거래 자금으로 의심될 경우 정부는 법원으로부터 영장을 발부받아 거래를 추적할 수 있다. 곧 정부가 국민들의 거래 익명성을 최대한 존중하지만 필요시에는 개인의 거래 내역을 추적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현재 6개국 중앙은행이 개인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해 암호화폐와 연동된 디지털화폐를 개발 중이다.

스테이블코인의 위세

올 초 미국 통화감독청은 금융권의 스테이블코인 사용을 전격 허가했다. 이에 앞서 통화감독청은 은행권의 암호화폐 수탁업무를 허용했고, 암호화폐 거래소도 주정부의 허가를 얻으면 은행 업무를 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기존 금융권과 암호화폐 거래소 간 칸막이의 일부를 열어 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현재 은행들의 물밑 작업도 치열하다. 암호화폐 수탁업무와 디지털자산 유동화 사업에 참여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금융권의 스테이블코인 거래 도입으로 외화송금시스템의 급속한 변화가 예상된다. 현행 은행 간 국제 외화 송금수수료는 금액에 따라 8~25%라는 고액의 수수료를 지불해야 한다. 이는 거치는 단계가 많기 때문이다. ‘환전수수료+송금수수료+전용망수수료+수신수수료+ 환전수수료+현금수수료’로 여섯 단계마다 수수료가 부가되다 보니 고율의 수수료가 부과되는 것이다. 이것을 중앙은행디지털화폐로 송금하면 ‘환전수수료+송금수수료+환전수수료’ 의 3단계로 축소되어 수수료는 5% 내외로 줄어든다. 그런데 스테이블코인의 경우는 환전할 필요가 없어 수수료가 2% 내외로 대폭 줄어든다. 게다가 즉시 수취 확인이 가능하다. 앞으로 소비자들이 어떤 통화를 송금용으로 선호할 것인지는 불 보듯 뻔하다.

공급자 중심에서 소비자 중심 시대로

세계는 중앙은행디지털화폐를 중심으로 ‘분권화’의 길에 들어서고 있다. 여기에 민간 분야의 스테이블코인과 암호화폐까지 가세하면서 통화의 종류가 ‘다양화’ 되고 있다. 곧 분권화와 다양화가 미래 통화시장의 모습이다. 게다가 앞으로는 클릭 한 번으로 외국 디지털화폐를 사고파는 시대가 온다. 패권국가들이 기축통화를 공급하던 공급자 중심 통화시대에서 시민들이 선호하는 통화를 직접 선택하는 소비자 중심 통화시대로 바뀌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화폐혁명의 변곡점에 서 있다. 변화의 흐름에 수동적으로 끌려가지 않으려면 변화를 앞장서서 주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