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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생각

경계의 확장
자원의 순환
벼룩시장이 만드는 미래

벼룩시장을 비롯한 중고 거래는 환경을 생각한 경제적 소비라는 타이틀을 넘어서,
도시가 가진 소통과 교류의 기능을 재건하고 경직된 사회 속 개인의 능동적 역할을 확대한다.

writing. 박현선 (<핀란드 사람들은 왜 중고가게에 갈까?> 저자)

벼룩시장이 아닌 벼룩시장과의 첫 만남

처음으로 벼룩시장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온 것은 중학생 시절 매일 타고 통학하던 시내버스 안에 비치된 신문에서였다. 당시 벼룩시장이 무엇인지 몰랐던 나는 신문 이름을 참 괴상하게 지었다고 생각했다. 시간이흘러 벼룩시장이 오래된 물건을 파는 장터를 일컫는 말임을 깨달았는데, 그런 시장이실제 존재하는지 있다면 어디서 열리는지알 길이 없었다. 대학생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벼룩시장에 가 볼 수 있게 되었다. 유흥가로 유명한 학교 앞, 번쩍이는 간판들 사이에 어색하게 자리를 지키는 공공놀이터에서정기적으로 벼룩시장이 열린다는 소문을 들었다. 쉼 없이 밀려오고 빠져나가는 젊은이들의 발길을 붙잡는 지역의 상징과도 같은행사로 알려졌으나, 막상 가 보니 어디서나볼 수 있는 유행 소품과 반짝반짝한 액세서리를 파는 가판대가 대부분이었고, 나는 이에 큰 인상을 받지 못했다. 그 이후로도 나에게 벼룩시장은 그저 신문의 이름에 지나지 않았다.

헬싱키 벼룩시장에서 발견한 다채로움

핀란드 헬싱키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한 지얼마 지나지 않아 벼룩시장에 가 볼 기회가 다시금 찾아왔다. 겨울이 짙은 어느 일요일 아침, 친구들이 벼룩시장 구경을 간다기에 따라나섰다. 내리는 눈을 헤치고 도착한장소는 원래의 쓰임새를 다한 옛 기차정비소 단지였다. 오래된 벽돌 건물의 황량한 외형과는 대조적으로, 내부는 수많은 사람들이 뿜는 활기로 가득했다. 새로운 공간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현장에서 판매되는 모든 물건들이 타인의 손을 적어도 한 번 이상거친 중고 물건들임을 알 수 있었다. 플리마켓(Flea Market)이라고도 불리는 벼룩시장은‘벼룩이 나올 만큼 오래된 물건을 파는 시장’이란 뜻의 프랑스어 marché aux puces(마르셰 오 뿌쎄)에서 그 명칭의 유래를 찾는다고 한다. 아무리 낡고 오래된 물건에도 여전히 나름의 가치는 존재하며, 그 가치에 동의하고 필요성을 느끼는 사람이 물건을 구매한다. 한참을 둘러보니 벼룩시장에는 온갖 장소와 시간이 뒤죽박죽 섞여 있음을 알게 됐다. 제작된 지 50년도 더 된 조명과 가구를 들고나온 중년 부부, 옛 도자기를 판매하는 할아버지, 옷과 신발을 집에서 잔뜩 가져온 젊은이들, 어릴 적 읽던 책과 장난감을 진열한 아이와 부모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갖가지 생활용품을 판매하고 있었다. 유행이 존재하지 않는 공간에서 서로 다른 물건들이 발산하는 다채로움에 이내 빠져들었다.
그 후로 머지않아 핀란드의 여름은 벼룩시장의 계절임을 알게 되었다. 길고 어두운 터널 같은 겨울이 지나고, 지지 않는 여름 해를 좇느라 좀처럼 집 안으로 들어갈 줄 모르는 사람들을 따라 벼룩시장도 야외로 나온다. 동네 공원에서 열리는 벼룩시장에는 전문 상인을 제외한 시민 누구나 판매자로 참여할 수 있기 때문에 느긋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가족이나 친구들이 합심해 집에서 사용하지 않는 식기, 책, 옷 등 갖가지 생활용품을 들고나와 돗자리 위에 진열하여 공원을 형형색색 모자이크로 만든다. 이들 중에는 선베드나 해먹에 누워 일광욕을 하고, 도시락을 먹거나 보드게임을 하며 자신만의 시간에 더 열중한 듯 보이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을 보며 벼룩시장에 판매자로 참여하는 것이 경제적 이윤을 남기는 활동을 넘어서 아름다운 핀란드의 여름을 만끽하는 건강한 방법으로 활용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우리 일상 속 중고 거래,
환경을 위한 선택

어느새 우리나라에도 중고 거래는 일상에 깊숙이 들어왔다. 가격대가 높은 자동차나 전자제품의 경우 이미 오래전에 시장이 형성되었는데, 이제는 다양한 생활용품도 온라인을 통해 어렵지 않게 중고로 사고팔 수 있다. 구매자는 필요한 물건을 저렴하게 살 수 있어 좋고, 판매자는 소정의 돈을 받고 물건을 처리할 수 있어 좋다는 중고 거래의 장점이 더 많은 이들의 공감을 사면서, 거래 과정에서 생기는 약간의 수고스러움은 기꺼이 감수할 수 있다는 긍정적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런 변화는 비단 중고 거래의 경제성뿐 아니라 대중의 환경의식 고취와도 연관이 있다. 기후변화는 단순한 온도 상승에서 멈추지 않고, 예측하지 못한 방향에서 우리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변화는 늘 있어 왔지만 그 속도가 빨라 대책을 마련하거나 적응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는 점도 큰 어려움이다. 경각심을 느끼는 사람들은 몸집 큰 정부나 기업이 대책을 마련하고 변화를 보이기에 앞서 스스로 플라스틱과 비닐 사용을 줄이거나 환경에 부담을 덜 주는 재료와 방식으로 제작된 제품을 고르는 등 의식적으로 행동하기도 한다. 요즘은 생산지가 멀어져 복잡한 제작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을 소비자가 알기 어렵거나 무시할 수 있기 때문에 의식적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관심이 필요하다. 결과물은 흔한 반소매 티셔츠 한 장이지만, 원재료인 면화 재배를 위해 해당 지역은 커다란 환경 파괴에 노출된다. 면화는 재배 시 상당량 물을 소비하고, 병충해에 약해 농약의 과한 사용이 필요하므로 물 부족과 토양, 수질오염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염색 공장이 들어선 지역의 상황도 심각하다. 게다가 물건의 포장재 역시 다양한 재료로 공들여 제작된다. 원료 추출, 생산, 유통, 사용, 폐기로 이어지는 티셔츠의 여정을 따라 환경이 오염되고 온실가스인 탄소가 배출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새 제품보다 이미 만들어진 중고 제품을 구매하는 것이 환경을 위한 선택임을 알 수 있다.

소통과 교류 재건으로 만드는
공동체 의식

다년간 핀란드의 벼룩시장을 경험하며 중고 거래의 또 다른 순기능을 발견할 수 있었다. 현대의 경제구조는 물건의 생산, 소비, 폐기에 이르기까지 일직선으로 이루어진 선형구조다. 폐기 이후 계획은 각본에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물건은 소비 후 곧장 폐기되는데, 구매와 동시에 폐기는 자연스레 소비자의 몫으로 남는다.
소비자가 중고 거래를 통한 재사용으로 자원의 순환을 만드는 주체가 되면, 경제구조 속에서 단순 소비자를 벗어나 능동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공원, 공터 등지에서 열리는 벼룩시장은 시민들이 도시를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활용하며 순환경제구조 속 새로운 역할을 경험하는 기회를 만든다. 동시에 도시가 가진 소통과 교류의 기능을 재건함으로써 사람들이 각종 사회 현상에 공감대를 형성하고 공동체 의식을 갖게끔 도울 수도 있다. 현대의 도시는 기술의 발달에 따라 발전해 왔지만, 도시의 획일화는 도시 공공공간의 감소, 아파트 단지의 폐쇄화, 소득격차, 관계의 디지털화 등의 부작용을 낳았다. 이로 인한 상호작용의 부족은 다양한 사회 문제로 이어진다.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벼룩시장에서 콘크리트 벽에 가려졌던 이웃을 만나 가치관을 공유하고 문제를 나누고 공감대를 형성한다면, 지금보다는 좀 더 다양한 삶의 모습을 품어 주는 도시로 거듭나지 않을까 기대도 하게 된다.

중고 거래 문화의 성숙도를
높이기 위한 노력

한국의 중고 거래는 스마트폰 앱의 편의성에 힘입어 이제 막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앱 이용자 수는 빠르게 증가하고, 이용 연령대 또한 다양해졌다. 사용하지 않는 물건을 단순히 폐기하지 않고 새 주인을 찾아 준다는 점에서 중고 거래의 대중화는 긍정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어떤 물건들이 얼마나 많이, 구매 후 얼마나 빠른 속도로 중고 시장에 유입되는지, 혹시 또 다른 소비를 위해 중고 시장이 거듭 이용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는 시간은 중고 시장의 건강한 지속과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 또한 벼룩시장이나 중고 가게 등 다양한 경로를 경험함으로써, 중고 물품에 대한 이해도와 중고 거래 문화의 성숙도를 높일 수 있을 것이다.
가까운 미래에는 중고 거래가 환경을 생각한 경제적 소비를 넘어서 스스로를 이해하고, 타인을 알고, 도시를 즐기며 공동체를 건강하게 지속하는 방법 중 하나로 적극 활용될 수 있기를 바란다.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벼룩시장에서 콘크리트 벽에 가려졌던 이웃을 만나
가치관을 공유하고 문제를 나누고 공감대를 형성한다면, 지금보다는 좀 더 다양한
삶의 모습을 품어 주는 도시로 거듭나지 않을까 기대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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