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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달에
생각나는 명화
writing. 박혜성 (화가, 작가)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다르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이다. 그의 명언을 명화에서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이중섭 <낙원의 가족>, 1950년대, 뉴욕현대미술관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다르다.”라는 톨스토이의 명언을 명화에 적용해 보면 흥미롭게도 상당히 일치한다. 행복한 가정을 이끌었던 화가 혹은 그렇지 못한 화가 누구든 화가들은 그림을 그릴 때 자신의 가정을 반영한다. 특히 가족초상화를 그릴 때는 그 점이 더욱 잘 드러난다. 세상을 아름답고 감미롭게 표현한 르누아르(Auguste Renoir, 1841~1919)의 가족초상화는 행복한 가정의 표상이다. 르누아르는 인생 자체가 우울한 것이기에 그림이라도 밝아야 한다며 화사한 색채로 행복한 그림을 그렸다. 어릴 적 가난했던 르누아르는 화가로 성공했으며 18세 연하의 아내와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는데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따뜻한 가족초상화를 많이 남겼다.
한편 아름다운 발레 그림으로 유명한 드가(Edgar Degas, 1834~1917)의 가족초상화는 뜻밖에 냉소적인 분위기가 흐른다. 드가는 은행가 아버지 밑에서 부유하게 자랐지만, 어린 시절 어머니의 불륜으로 여성 혐오증이 있었고 강한 자의식에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드가의 이런 성향은 그림 곳곳에서 엿볼 수 있다. 반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화가 이중섭(1916~1956)의 가족초상화는 가족 간의 사랑은 환경이 아닌 마음으로 하는 것임을 확인시켜 준다. 톨스토이가 말한 행복한 가정은 어떤 모습일까?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명화 속에 담긴 행복한 가정을 찾아보자.
르누아르 <샤르팡티에 부인과 자녀들> ,1878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가족초상화에 담긴 사랑의 온도
르누아르가 1879년 살롱전에 선보인 <샤르팡티에 부인과 자녀들>을 보자. 이 작품은 출판업자 샤르팡티에가 르누아르의 <물랑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를 본 후 주문한 가족초상화이다. 예술을 사랑한 샤르팡티에와 그의 아내 마르게리트는 가난한 화가들의 그림을 구매하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따뜻한 마음을 가진 부부였다. 돈이 없어 쩔쩔매던 르누아르도 이 부부의 도움을 받아 힘든 시기를 잘 이겨 내었고 이에 보답하듯 샤르팡티에 가족초상화에 감사의 마음을 담아 그림을 완성했다.
흑백의 드레스를 입은 부인은 부드러운 눈길로 두 자녀와 반려견을 보고 있다. 푸른 원피스를 입은 아이들은 부부의 6살 딸과 3살 아들이다. 원피스를 입은 작은 아이는 남아인데 당시는 남아에게 원피스를 입히는 것이 유행이었다. 여아를 등에 앉힌 반려견은 부인의 드레스와 동색인 흑백으로 표현되어 가족과의 친밀감이 드러난다. 배경의 대나무 의자와 도자기, 앉아 있는 소파로 보아 부유한 가정임을 알 수 있으며 벽과 카펫의 따뜻한 색은 이 가정의 온기를 말하고 있다.
르누아르 <모성> 1886년, 오르세 미술관
행복한 가정을 이끌었던 르누아르
르누아르는 1841년 가난한 노동자의 집에서 일곱 자녀 중 여섯 번째로 태어났다. 13세에 도자기 공장에 들어가 생계를 위해 도자기에 그림을 그렸던 그는 임금으로 미술 수업을 받으며, 1862년 에꼴 데 보자르에 입학한다. 르누아르는 “내게 그림이란 소중하고 즐겁고 예쁜 것. 그렇지 예뻐야 해.”라며 감미로운 색채와 아름다운 표현이 그림을 그리는 이유라고 말했다.
르누아르는 아름다운 알린과 결혼하여 세명의 아들을 두었다. 르누아르는 아내 알린의 초상화를 여러 점 남겼는데 그중에서 26세에 엄마가 된 알린이 장남 피에르에게 젖을 물리는 <모성>은 무척 인상적이다. 아이의 탄생에 세상 최고의 기쁨을 느꼈을 르누아르와 알린. 아이에게 모유를 먹이는 고귀한 모습에 그 마음이 전해진다. 르누아르는 화가로 성공했으며 사랑하는 아내와 세 명의 아들을 둔 행복한 가장이었다. 세 명의 아들 중 장남 피에로는 배우였으며 차남 장은 아카데미 공로상을 받은 세계적인 영화감독이며 레지옹 도뇌르 훈장도 받았다. 막내아들 클로드 역시 영화 관련 일을 하였다. 르누아르는 어려운 가정에서 힘든 과정을 거쳐 화가가 되었다. 젊은 시절 화구를 구입할 수 있기는커녕 끼니를 걸러야 할 만큼 궁핍했지만, 르누아르는 세상을 아름답게 표현했다. 그가 그린 사랑스러운 그림은 자신의 가정은 물론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
드가 <벨렐리 가족> 1858~1867년, 오르세 미술관
드가가 본 현실 부부
드가의 <벨렐리 가족>을 보자. <벨렐리 가족>은 드가가 이탈리아 피렌체에 머물 때 그곳에 사는 고모 가족을 그린 것이다. 로라 고모는 귀족 젠나로 벨렐리 남작과 결혼했으나 애석하게도 부부 사이는 원만치 않았다. 벨렐리 남작은 이탈리아 통일 전쟁과 관련된 일을 하다가 망명 중이었기에 직업이 없는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부부의 애정은 점차 식어 갔는데 드가는 이 관계를 포착하여 화폭에 담았다.
그림을 꼼꼼히 보면 이 가족의 온도가 느껴진다. 고모가 입은 검정 옷은 상복으로, 당시 최근에 사망한 그녀의 아버지를 애도하며 입은 것이다. 그런데 마치 자신의 경직된 결혼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허공을 보는 무표정한 고모와 뒷모습을 보이는 고모부 사이에는 냉기가 흐르고 중앙의 작은딸이 약간의 유대감을 유지하고 있다. 우측에 몸통만 살짝 보이는 개가 바로 이 가족의 상태를 보여 주는 장치다. 드가는 배경의 벽지를 차가운색으로 하여 이 가정의 온기가 식었음을 알려 준다. 언뜻 보면 평범한 가족초상화인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갈등의 골이 보인다.
드가 <마네와 마네 부인의 초상> 1868~1869년, 기타큐슈 시립미술관
냉소적인 아내의 모습에 화가 난 마네
드가는 1834년 부유한 파리 은행가의 장남으로 태어나 법률가의 길을 가려다 화가가 되었다. 1855년 에꼴 데 보자르에 들어갔으며, 1856년 친척들이 사는 이탈리아에서 3년간 머무르며 르네상스와 바로크 미술에 심취한다. 드가는 자신의 경제력과 지위를 활용하여 경마장과 발레 공연장을 드나들며 그림을 그렸다. 드가는 인물을 자르거나 뒷모습을 부각하거나, 화면 중앙을 비우는 등 전통적인 화풍에서는 볼 수 없는 실험적이고 파격적인 구도로 그림을 그렸다. 더불어 드가는 내면의 심리도 화폭에 담았다. 그의 냉철하고 예리한 시선은 친구 마네 부부 초상화에도 여실히 드러난다. 드가는 절친이었던 마네에게 부부 초상화를 선물했다. 그런데 그림을 본 마네는 아내 쉬잔의 냉소적인 모습에 화가 나서 그 부분을 잘라 버렸다. 드가는 자신의 작품이 훼손된 것에 크게 분노했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이해하고 화해했다고 한다. 흔히 드가를 가리켜 ‘무희의 화가’라고 부르지만, 그는 사회의 민낯을 가장 잘 포착한 화가이기도 하다. 세상에는 온기 가득한 가정도 많지만, 차갑게 식어 버린 가정도 꽤 많기 때문이다.
이중섭 <길 떠나는 가족> 1954년, 개인 소장
가족과 함께라면 그곳은 낙원
이중섭의 가족초상화를 보면 그의 가족 사랑이 절절히 느껴진다. 한국전쟁 중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보낸 후지만, 이중섭의 가족초상화에는 전쟁의 고통이 아닌 웃음꽃을 피우는 행복한 가정이 담겨 있다. 이는 화가가 바라는 이상적인 가정의 모습이자 가장이 부르는 희망의 노래였다. 이중섭은 소를 포함한 황토색 짙은 동물과 자연을 벗 삼아 노는 아이들을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그림 <물고기와 노는 아이들>, <그리운 제주도 풍경>, <봄의 어린이>, <서귀포의 환상> 등에 새, 물고기, 게와 노는 아이들은 화가가 자신의 아이들을 회상하며 그린 것이다.
평안남도가 고향인 이중섭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인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한국명: 이남덕)와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부산과 제주도에서 피난살이를 하였다. 1952년 궁핍했던 피난살이로 아내는 병을 얻는데, 장인어른의 사망 소식까지 전해 들은 이중섭은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보낸다. 이중섭은 가족 상봉을 위해 밤낮으로 일하고 그림을 그렸으나 세상은 녹록지 않았다. 가족과 생이별한 이중섭은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도 편지와 그림에 자신의 희망과 그리움을 담았다. 그 무렵 이중섭의 그림을 보면 전쟁의 고통은 보이지 않고 특유의 해학과 유머가 있다. 화가는 전쟁의 소용돌이로 극한의 시간을 보냈지만, 가족 사랑의 마음은 결코 식지 않았다.
이중섭 <구상네 가족> 1955년, 개인 소장
아름답고 슬픈 그림 ‘구상네 가족’
이중섭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 분카가쿠엔(文化學院)에서 유학을 하였고 그곳에서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를 만났다. 1945년 한국으로 건너온 마사코는 이중섭과 정식으로 결혼하고 한국 이름 이남덕으로 행복하게 사는 듯했으나, 한국전쟁이 터지고 고된 피난 시절을 보낸다. 화가로 생업이 막막했던 이중섭은 결국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보내며 떠돌이 생활을 한다. 홀로 남은 이중섭은 생활고를 겪으면서도 그림에 매진했다. 제대로 된 미술도구가 없어 군용 천막, 담뱃갑 은박지 등에 그림을 그렸는데, 후에 은지화(銀紙畵)는 현대적인 재료와 독특한 기법으로 한국인의 정서를 잘 담았다는 평가를 받으며 뉴욕현대미술관에 소장된다. 이중섭의 소망은 가족과 함께 사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온 힘을 다해 개인전을 준비하였고, 1955년 1월 미도파백화점 화랑에서 열린 개인전은 성공적이었다.
<소>, <봄의 아이들>, <길 떠나는 가족> 및 은지화 등 45점이 전시되었고 그중 26점의 판매가 예약되었다. 하지만 작품 값은 제대로 회수되지 않았다. 이중섭은 가족을 떠나보낸 고독감과 생활고로 음식을 거부하는 거식증을 앓으며 몸은 점점 쇠약해졌고 끝내 간염으로 40세에 홀로 세상을 떠났다. 이중섭이 그린 <구상네 가족>은 떠돌이 생활 중에 시인인 친구 구상 집에 머물며 그의 가족을 그린 것이다. 일본에 두고온 두 아들에게 자전거를 사가겠다고 약속한 이중섭은 미어지는 가슴으로 이 그림을 그렸다. 이중섭은 가족이 함께라면 그곳은 낙원이란 생각으로 그림에 소망을 담았다. 안타깝게도 그의 낙원은 현실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아름답고 슬픈 그림으로 우리 곁에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