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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 스며들자
몰랐던
나를 만났다- 글 이명석(문화비평가)
- 번잡한 일들이 머리를 어지럽힐 때 우리는 잠시 달아날 방법을 찾는다. 창을 열고 저무는 달을 보거나, 메신저로 친구에게 푸념을 하거나, 사진첩을 열어 여행의 추억을 되새긴다. 그런데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전혀 다른 세상으로 재빨리 옮겨 가 마음속 뭉친 감정들을 풀어낼 방법이 없을까? 예술이 있다.
예술과 맞닿아 있는 우리
“범 내려온다. 범이 내려온다.…몸은 얼승덜승 꼬리는 잔뜩 한 발이 넘고…왕모래 좌르르르르르르 흩이고” 빨간 갓에 요상한 옷차림의 사람들이 나타나 별난 노래와 춤으로 우리의 마음을 흔들었다. “저게 무슨 노래예요?” “명창이자 재주꾼인 이날치의 후예를 자처하는 이날치 밴드의 판소리입니다.” “저 사람들이 추는 춤은 뭐예요?” “앰비규어스 댄스컴퍼니가 추는 현대무용이랍니다.” “우와 예술이네요.” “그런 셈이죠.” “그런데 왜 좋죠? 나는 예술 무지렁이인데?”
이 사람은 예술을 오해하고 있을까? 아니, 자신을 오해하고 있다. 예술은 예전만큼 멀리 있지 않다. 예술가들이 우리 가까이 오려고 노력해서이기도 하지만 우리도 알게 모르게 예술을 자주 접하며 눈과 귀를 연 덕분이다. ‘범 내려온다’가 20년 전에 나왔다면 이만큼 큰 사랑을 받았을까? 그저 ‘국악과 현대무용의 협업’이라며 “열심히 하세요”라는 격려가 전부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즐기고 있다.그럼에도 우리는 나뉜다. ‘앰비규어스가 예술의전당에서 공연한다니!’ 하며 당장 표를 구하려는 사람과 ‘공연장에서 무용을 본 적은 없는데’ 하며 주저하는 사람으로. 또 황금연휴에 뮤지컬을 세 편씩 보는 사람과 그 시간에 배달 음식을 먹고 유튜브를 보는 게 낫다는 사람으로, 그리고 피카소나 고흐 정도는 되어야 전시장을 찾는 사람과 SNS에서 눈여겨본 작가가 첫 개인전을 열자 곧바로 달려가는 사람으로도 나뉜다.
슬며시 일상에 예술이 들어오다
한 번의 경험! 보통 그것이 우리를 바꾼다. “내가 연뮤덕(연극 뮤지컬 덕후)이 될 거라곤 상상도 못했어요.” 전주 인근에서 교사로 근무하는 A씨는 한 달에 두 번은 서울 대학로를 찾아간다. 친구가 생일선물로 보여 준 뮤지컬 <위키드>에 완전히 넋이 나간 이후의 일이다. TV나 영화와는 전혀 다른 현장감에 음악과 춤과 연기가 하나가 되는 화려한 장면들… 그렇게 열심히 공연장을 찾다 보니 자신의 취향도 알게 되었다. 요즘은 작은 공연장을 다니며 앞으로 20년 이상 쫓아다닐 연기자나 극작가를 찾고 있다.
“부끄럽네요. 저의 시작은 물욕이었죠.” 은행원인 B씨는 아트 컬렉션이 돈이 된다는 말을 듣고, 비교적 싼값에 살 수 있는 판화 전시회에 갔다. 딱 하나 남은 그림을 사 와서 벽에 걸어 놓았는데, 퇴근 후에 들여다보면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 같더란다. 그 뒤에 작품 보는 눈을 높이려고 전시장을 자주 찾아갔고, 재료나 기법이 궁금해져 작가의 스튜디오도 방문했고, 그들과 대화하다 보니 예술가의 파트너가 될 수 있다는 자부심도 생겼다. 아직 미래의 가치는 잘 모른다. 하지만 젊은 작가의 작품들을 하나둘 모으는 재미에 빠져 있다. 보고 듣고 감상하다 보니, 나도 해 보고 싶다. 그것 역시 예술에 빠지는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마음이다.
스페인에서 온 플라멩코 연주자에 반해 낙원상가에 기타를 사러 간다. 발레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교습소를 찾고, 무용이라는 게 정말 엄청난 근력 운동이라는 걸 깨닫는다. 씽씽밴드를 통해 소리꾼 이희문의 팬이 되어 민요도 배우고 공연장에서 ‘떼창’도 한다. 예술은 참 신기하다. 우리가 험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만들어 놓은 단단한 껍질 속으로 스리슬쩍 들어와 스며든다. 그리고 우리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든다.
오감을 집중하고, 상상을 펼치는 경험
“모두가 예술에 푹 빠질 수는 없잖아요. 그냥 유튜브가 추천하는 음악을 이어폰으로 잠깐 들으면 안 되나요? SNS에 나오는 짧은 시 구절을 읽어도 문학을 즐기는 거잖아요. 저도 인스타에서 일러스트레이터 계정을 팔로우하고 예쁜 그림이 올라올 때마다 ‘좋아요’를 눌러요.” 물론 그것도 예술을 즐기는 방법이다. 그런데 조금 더 빠진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다.
“더 큰 문을 열고 들어간 뒤, 그 문을 닫아 보세요.” 자, 한 번 상상해 보자.
공연장의 좌석에 앉아 스마트폰을 끄고 나의 오감을 온전히 무대 위에 집중시킨다. 친구와 함께 갤러리에 들어가 곧 그와의 대화를 멈추고 작품이 전하는 이야기에만 귀를 기울인다. 조금은 두꺼워 보이는 소설책을 손에 들고 카페에 앉는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나는 이제 두 시간 정도 완전히 다른 세계로 떠날 겁니다. 방해하지 말아 주세요.” 그러면 정말 다른 세상이 펼쳐지고, 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자유를 만끽하게 된다.
도로시는 토네이도를 타고 오즈의 나라로 날아가고, 앨리스는 토끼를 따라 나섰다가 이상한 나라로 떨어진다. 거기에선 무엇이든 일어날 수 있다. 예술적 체험은 그와 같다. 그런데 우리는 영원히 그 속에서 머물 수 없다. 그리고 돌아오는 방법은 간단하다. 공연장의 커튼콜이 끝나면, 소설책을 다시 덮으면, 갤러리의 문을 열고 나오면 우리는 원래의 현실로 돌아온다. 마치 도로시가 구두 뒷굽을 톡톡 치고 주문을 외워 집으로 돌아간 것과 같다. 그러나 돌아온 우리는 떠나기 전의 우리와는 사뭇 달라져 있다.
우리에게 맑은 눈을 선물하는 예술
운동 후에 흘린 땀이 내 몸의 노폐물을 뽑아내듯이, 예술은 우리 마음속의 어두운 찌꺼기들을 토해 내게 한다. 위대한 주인공의 마음속에 들어갔다 오면, 나를 괴롭히는 잔소리나 잡다한 걱정들이 별것 아닌 듯이 여겨진다. 그러면 새로운 용기와 열정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고 맑은 눈으로 뜻밖의 해결책을 찾아내기도 한다. 반대로 예술이 축약한 현실을 통해 내가 처한 모습을 좀 더 생생하게 들여다보게도 된다. “오늘 본 연극의 저 어리석은 조연, 내가 딱 저 모습이네. 왜 저걸 몰랐지?”
하나의 예술을 만끽하면 다른 예술에도 귀를 기울이게 된다. 어제까지는 별것 아닌 듯 흘려보냈던 소식들이 또렷하게 들린다. “한남동 리움미술관이 재개관 했대. 공간 자체가 완전히 바뀌었다는데?” “쇼팽 콩쿠르가 6년 만에 열리는데 이번에 한국인 연주자가 7명 본선에 올라갔다네. 과연 조성진의 뒤를 이을 우승자는 누구일까?” “마영신이라는 만화가 알아? <엄마들>이라는 작품이 미국 만화계의 오스카상이라 불리는 하비상을 수상했대.” 내가 관심을 보이면 그쪽에선 갑자기 신이 나서 ‘자기 장르’를 영업하기 시작한다. 그 마음, 예술에 빠진 사람은 곧바로 이해한다.
“그까짓 것 없어도 돼.” 거기 나오는 ‘그까짓 것’의 대명사가 바로 예술이다. “이 좋은 걸 왜 안 보지?” 여기 나오는 ‘이 좋은 것’의 대명사 역시 예술이다. “그렇게 좋다 하니, 그까짓 것 내가 한번 감상해 주지.” 이런 마음을 품어 보면 또 어떤가? 스산한 바람 속에 무언가 허전해지는 시간, 그 좋은 걸 즐기기에 적절한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