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의 흔적을 포장하는
책 수선가, 재영- 글 임산하
- 사진 한유리
- 재영책수선을 운영하는 재영 씨는 망가진 책을 고치는 책 수선가다. 긴 시간을 지나왔기에 망가질 수밖에 없던 책은 그의 손을 거쳐 튼튼해지고, 다시 새로운 시간을 걸어간다. 걸어가는 길에 쌓이는 흔적은 책과 의뢰인 모두에게 또 다른 선물이 된다. * <with IBK> 10월호에 관련된 모든 촬영은 코로나 19 방역수칙을 준수하여 진행하였습니다.
책의 물성과 흔적을 사랑하는 책 수선가
애석하게도 시간은 물건을 삭게 한다. 그 어떤 것도 시간을 거부할 수 없다. 책도 예외는 아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바래고, 닳고, 낡는 흔적으로 책은 자신의 세월을 받아들인다. 다만 시간은 허투루 쌓이지 않는다. 책이 바랠수록 ‘나’에게는 더 진한 감정을 남기고, 닳을수록 더 깊은 추억을 남기고, 낡을수록 더 짙은 기억을 남긴다. 책과 ‘나’는 시간 속에서 애틋해진다. 하지만 책은 그 마음을 모르는지 눈치 없이 점점 삭아갈 뿐이다. 그런 면에서 시간은 잔인하다.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면, 책과의 다정한 관계는 쌓이지 않았을 테니까.
그리고 여기, 책이 있었기에 나눌 수 있었던 끈끈한 마음에 따뜻하게 귀 기울이는 이가 있다. 그는 ‘책 수선가’ 재영 씨다. 재영 씨가 ‘재영책수선’이라는 이름의 작업실을 연 건 2018년 2월의 일이다. 그는 책을 고치기도 하고 책을 만들기도 한다. 대학원에서 북아트와 페이퍼 메이킹을 전공하며 교내 도서관 연구실에서 책 수선 기술을 배운 것이 이 길의 시작이었다. 책의 안팎을 다루다 보니 말 그대로 드러나지 않는 곳인 책의 내면을 보게 된 그는 자연스레 책의 구조와 형태에 매료되었다. 여유 있게 책을 만들지 못하던 시절에는 백지 대신 이면지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는데, 종이로 사용된 신문이나 연애편지 속에서 당대의 흔적을 발견하는 것에 마음을 뺏기게 되었다.
물론 그가 공부한 미국에서는 책 수선가가 그리 생소한 직업이 아니었다. 미국의 주요 대학들은 책 수선 시설을 구비해 둔 곳이 많아 보다 안정적인 인프라가 갖춰져 있다. 재영 씨는 ‘책 수선’을 배우기 전까지 해당 직업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며 웃어 보이지만, 책의 물성을 좋아하고 책이 품은 흔적을 아끼는 자세를 보면 그의 떡잎은 이미 책 수선가가 아니었나 싶다.
책에 담긴 무형의 기억을 듣다
우리는 흔히 좋아하는 일은 직업으로 삼으면 안 된다며 삶의 절대적인 진리인 양 말한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나 그렇다고 옳은 말도 아니다. 책의 물성에 사로잡힌 재영 씨는 자연히 책 수선가의 길을 걷게 되었고, 그는 개인 작업실을 열면서 이 일에 흠뻑 빠지게 되었다.
연구실에서 책 수선을 배울 때는 기능적으로 고치거나 혹은 단지 희귀 서적이기 때문에 조심히 매만지던 일상이 ‘재영책수선’에서는 전혀 달라진 것이다.
“책 수선 의뢰인들은 책으로 간직한 무형의 기억을 함께 들고 오십니다. 책에 담긴 개인의 사연과 추억은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기에 책 수선에 앞서 그분들의 마음에 이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이는 재영 씨의 시선을 확장시키는 동시에 이 일을 더욱 사랑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실수하면 안 된다는 부담감에 무거운 책임을 느끼기도 하지만, 해냈을 때의 만족감은 그 어떤 때보다 특별하게 물든다. 의뢰인들이 진중히 전하고 간 마음을 알기에 긴장과 기대 속에서 수선 업무를 진행하는 그. 그래서 그는 사전 미팅을 중요시한다. 책을 고치는 방향이 오직 한 가지만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의뢰인과의 꼼꼼한 대화는 책을 수선하는 방향을 잡아준다.
선물하기 위해 책을 수선하는 다정한 마음
책을 고치는 과정은 ‘점검과 수선’으로 진행된다. 일견 간단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진행의 사이사이에는 재영 씨의 남다른 꼼꼼함으로 채워진다. 점검은 책을 살펴보는 것으로, 이때 그는 의뢰인이 놓친 파손 부위가 있거나 혹은 해당 부분이 파손될 수밖에 없는 더 큰 이유가 다른 데서 밝혀질 수도 있기 때문에 한 장 한 장 자세히 들여다본다. 점검을 마친 뒤에는 파손 부분을 유형별로 나누어 수선을 진행한다.
그렇다면 책 수선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흔히 상상할 수 있는 찢어진 종이부터 도서 커버 교체, 케이스 제작, 클리닝까지. 게다가 지류의 일종인 사진, 액자, 박스도 가능하다. 이처럼 개인 의뢰로 다양한 영역을 진행하다 보니, 책 수선을 처음 배울 당시 ‘원본을 훼손하면 안 된다’는 원칙에서 조금 벗어나게 되었다. 그때는 책을 받들어야 했다면, 이제는 책과 손을 잡고 걸어가도 되는 것이다. 이는 개인 작업이 주는 기쁨이다. 물론 기쁨의 바탕에는 의뢰인이 있다. 의뢰인이 책과 공유했던 ‘진짜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다면 책의 남다른 변화를 만들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
“한 아버님께서 영문판 페이퍼백 <해리포터> 시리즈의 수선 의뢰를 하신 적이 있었어요. 아드님이 어렸을 때부터 좋아하던 책이라 함께 지내온 시간만큼 많이 해지게 됐죠. 그런데 생일을 기념하여 수선을 해서 다시 선물하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마음이 제게도 전해져 가슴 한 켠이 뭉클했던 기억이 나요.”
책 수선의 의뢰 비율을 살펴보면 소장용과 선물용은 거의 반반으로 나뉜다. 생각보다 선물하기 위해 책 수선을 하는 이들이 많다. 자신의 흔적을 상냥히 나누거나 타인의 흔적을 정갈히 보관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오래된 흔적에 새로운 흔적을 선사하는 재영책수선
책 수선가 재영 씨는 언제나 책에 담긴 타인의 흔적을 마주한다. 책에는 항상 과거가 담기기 마련인데, 그 시간을 느끼는 것이 그에게는 큰 즐거움이다.
“망가진 책에는 기억과 역사가 담깁니다. 겉모습은 더럽고 지저분할 수 있지만 책이 견뎌 온 시간과 누군가와 맺었을 애틋한 관계가 있었기에 변화한 것이죠.”
책이든 사람이든 혼자서는 변화할 수 없다. 그 관계의 깊이를 이해하기에 재영 씨는 일부러 파손된 책을 찾으러 다니기도 한다. 그는 흔적을 사랑한다. “손이 닿으면 망가질 수밖에 없겠죠.”라며 웃어 보이는 그 또한 책을 애지중지하기보다는 편하고 과감하게 다루며 읽는다.
“어린 시절 동화책을 보던 때를 떠올려 보면 책을 던지기도 하고, 책으로 탑을 쌓기도 하고, 과자를 먹으며 기름진 손으로 만지기도 했잖아요. 책을 읽을 때의 외적인 경험이 풍부한 기억을 만드는 것 같아요.”
그에게 망가진 것은 못 쓰게 됐다는 의미가 아니다. 세월의 때는 그만큼 돈독하게 시간을 쌓았다는 방증이다. 책 수선가 재영 씨와 재영책수선을 방문하는 의뢰인들 사이에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단 한 가지는, 때(時)가 있었기에 때(塵)가 생겼다는 사실을 이해한다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