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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IBK
피플

한국 홍보전문가 서경덕 교수
한국을 품고
세계로 뛰어들다

한국의 문화를 알리는 데 앞장서는 서경덕 교수.
세계에 한국을 뿌리내리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를 보며 중심을 지키고 선 이는 한순간도 흔들리지 않음을 배운다.
그리고 그 여정 속에서 우리는 그에게 의미 있는 순간을 선물 받는다.
*<with IBK> 12월호의 모든 촬영은 코로나19 방역 수칙을 준수하여 진행했습니다.

writing. 임산하 photograph. 김범기

한국을 알린 의미 있는 시작

우리가 있던 자리에는 언제나 흔적이 남는다. 자리가 물리적인 공간이라면 흔적은 그것의 은유이다. 그러므로 자리를 벗어나도 흔적은 지워지지 않는다. 인위적으로 바꿀 수 없기에 흔적은 솔직하다. 이는 우리가 손댈 수 없는 너머의 실재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의 가치는 ‘자리’가 아닌 ‘흔적’에 담기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여기, 자신의 흔적을 뜻있게 남기는 이가 있으니 바로 ‘한국 홍보전문가’로 불리는 서경덕 교수다. 한국 문화를 세계에 알리고자 <뉴욕타임스>, <월스트리트저널>, <워싱턴포스트> 등 세계적인 일간지에 독도, 동해, 일본군 ‘위안부’, 고구려 관련 광고를 낸 바 있으며,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현대미술관, 뉴욕 자연사박물관 등에 한국어 서비스를 유치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해 온 그. 그는 ‘한국 홍보전문가’라는 타이틀은 부끄럽다고 겸손하게 말하지만, 그가 남긴 자취는 이 타이틀이 부족할 정도다. 게다가 그는 이름을 알리기 이전부터 이미 ‘한국 홍보전문가’였다.
그가 스스로 한국 문화를 알리고 싶다는 의지를 다진 것은 첫 유럽 배낭여행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저는 우리나라에 대해 ‘세계 경제 대국’이라고 배웠어요. 얼마나 대단했으면 ‘大(대)’ 자를 붙일 정도였겠어요. 그런데 실제 유럽에 가 보니 다들 저를 중국인이나 일본인으로 알더라고요. 그들에게 한국이라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지요.”
우리에게 한국은 우수한 문화를 갖고 있는 생생한 삶의 현장인데, 누군가에게는 ‘없는 나라’라는 것이 그에게는 충격을 안겨 주었다. 이후 그가 제일 먼저 시작한 일은 한국과 관련한 영문 책자를 기증하는 일이었다.
“해외를 다니면서 의미 있는 일을 해 보자고 생각했어요. 해외 유명 대학교 도서관에 가면, 중국과 일본 관련 자료는 상당한데 한국은 7, 80년대 책 몇 권이 전부였지요. 그래서 기증을 했던 거예요. 조금이라도 한국에 대해 알리고 싶다는 마음이 컸기 때문이었죠.”
대학생 시절 그는 프랑스 파리 에펠탑 광장에서 ‘8·15광복절 행사’를 주최하기도 했다. 당시 배낭여행의 주요 경로는 히드로 공항(영국) 입국, 샤를드골 공항(프랑스) 출국이었을 만큼 파리에는 수많은 여행객이 있었다. 그는 8월 15일을 맞아 에펠탑 광장에서 광복절 행사를 한다고 알리기 시작했다. 그 소문은 꼬리를 물어 그의 귀에 다시 들어올 정도였다. 행사 당일, 광장에 모인 인원은 서경덕 교수의 상상을 초월했다. 30여 명을 예상한 그의 눈앞에 300여 명이 모인 것이다.
“우선 만세 삼창을 했는데, 거의 삼백창을 했던 것 같아요. 애국가도 1절이 아닌 4절까지 부를 정도로 당시 현장에 모인 이들의 열의는 대단했어요. 아시아 사람으로서 겪었을 무시와 차별을 같은 민족에게서 치유받는 순간이었을 것이라 생각해요.”
이 행사는 주변의 외국 관광객들과 하나가 되어 축제의 장이 되었다. 이는 꾸준히 그가 해외에 나가 한국의 문화를 알리는 힘을 주었다.

문화의 힘을 보여 준 독도 광고

서경덕. 그 이름을 들은 이들은 하나같이 외친다. “독도!” 마치 자동완성단어처럼 그와 독도는 이제 한 몸처럼 붙어 다닌다. 그리고 그 시작은 20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일본의 시마네현 의회는 매년 2월 22일을 ‘다케시마의 날’ 로 정하는 조례안을 가결했다. 그보다 앞서 일본 고이즈미 총리가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주장했던 것에 더해져 한국 여론은 들끓었다. 그런데 세계인의 눈에는 한국인이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것으로 비쳐졌다. 서경덕 교수는 이 오해의 끈을 풀기 위해 <뉴욕타임스>에 광고를 게재하기로 한다.
“글로벌 시대에 맞게끔 세련되게 일본 정부의 부당함을 알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세계 각국의 정부와 글로벌 기업, 주요 언론사에서 주목하는 <뉴욕타임스>를 선택했죠.”
누군가의 눈에는 무모해 보였을지 몰라도 그는 차근차근 계단을 밟아 가듯 광고를 준비했다. 의견 광고를 혼자 내는 서경덕 교수의 모습에 의아했던 광고국 직원은 대체 독도가 무엇인지를 묻기도 했는데, 그 질문은 서경덕 교수의 열의에 불을 지피기에 충분했다.
“단 한 번만이라도 <뉴욕타임스>에 독도 관련 기사가 나왔더라도 설명하기 쉬웠을 테죠. 그런데 ‘Dokdo’라고 검색해도 나오는 자료는 없었어요. 독도 광고를 제작하겠다는 의지가 더욱 불타오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감정이었지요.”
아이디어부터 시안을 만들기까지 무려 5개월의 시간 동안 광고 제작에만 몰두했던 그는 끝내 최종 시안을 만들어 냈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에 발생한다. 광고를 게재하기 위해서는 광고주의 이름, 전화번호, 이메일 주소가 들어가야 한다는 것. 이때 서경덕 교수는 독도 광고에 자신의 이름을 싣고 싶지 않다고 피력했다.
“저 자신을 위한 광고가 아니었기 때문에 저를 밝히고 싶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하는 그에게서 올곧은 진심이 느껴진다. 그러나 연락처가 없으면 문의 전화가 광고국으로 와 업무에 지장을 줄 수 있다는 말에, 당시 서경덕 교수는 고심 끝에 웹사이트를 만들었고 해당 사이트에서 이메일과 연락처를 볼 수 있도록 제공할 것을 약속했다. 그때 만든 웹사이트가 ‘다음 세대를 위해(www.ForTheNextGeneration.com)’다.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다음 세대에 부끄럽지 않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름을 지었다는 서경덕 교수. 그 성심이 담겼기 때문일까, 독도 광고는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것 이상의 일을 해냈다. 바로 국민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결집시킨 것. 이후 네티즌들은 ‘독도 광고비 모금 운동’ 캠페인을 열었는데, 이는 일주일에 1억 원이 모이고 약 11만 명이 참여한 그야말로 역사적인 캠페인이되었다.

“지금까지 한국을 홍보하는 과정에서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고마운 분들은 일면식도 없는데 모금 운동에 참여해 주시고, 마음을 보내 주신 분들이에요.”
당시 모금액은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등에 전면 광고를 싣는 데 도움을 주었다. 특히 <뉴욕타임스>에 실었던 ‘뉴욕타임스의 실수(Error in NYT)’라는 주제의 광고는 일본해(Sea of Japan)가 아닌 동해(East Sea)가 옳은 표기라는 것을 지적한 내용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서경덕 교수는 계속해서 다양한 독도 광고를 기획하고 제작하면서, 세계의 여론을 움직이고 일본 정부의 잘못을 날카롭게 지적해 왔다. “정치적으로 풀지 못하는 문제는 문화적으로 풀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문화의 힘이다.

열정과 하나 된 책임감

첫 독도 광고는 그의 삶에 의미 있는 획을 그었다. 사실 그는 처음 광고를 게재했을 때 한숨도 자지 못했다. 그것은 설렘이 아닌 긴장 때문이었다.
“국가적인 중요한 광고인데, 혹여 오타라도 났을까 봐 걱정을 했어요. 수십 번을 검토했지만 직접 보기 전까지는 안심할 수 없었죠. 새벽에 가판대에 꽂힌 신문을 바로 구매했고, 실물을 확인하고 난 뒤에야 안도했어요.”
그는 당시의 모습이 여전히 생생하다고 말한다. 그가 느꼈을 무게감이 어느 정도였을지는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다. 언제나 확고한 자세로 달려가는 그의 열정 이면에는 이를 지탱하는 책임감이 단단히 둘러져 있었을 것이다.
독도 광고에 이어 뉴욕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한국어 음성 서비스를 유치했던 때가 기억에 남는다는 그는, ‘KOREAN’이라는 단어를 현장에서 직접 봤을 때의 뭉클함을 이루 설명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그 덕분에 우리는 헤드폰을 끼고 타국에서 자국어로 작품 설명을 듣는 혜택을 누리게 된 것이다. 뉴욕현대미술관, 미국 자연사박물관 등에도 한국어 서비스를 도입하면서 우리는 더욱더 완벽하게 작품 속에 빠져들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다음에 일어난다. 서경덕 교수의 손이 닿지 않은 곳임에도 타국의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한국어 서비스가 이미 적용돼 있는 것이 아닌가.
“나비효과라고 하죠. 다른 곳에서 한국어 서비스가 이용되는 것을 보고 자연스럽게 안내 책자나 오디오 서비스를 시작하게 된 거예요.”
물리적으로 그의 손이 닿지는 않았지만, 결국 이 모든 것은 그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서경덕 교수는 최근 세계김치연구소 글로벌 홍보대사에 위촉되면서 김치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는 캠페인을 지속하고 있다. 더불어 그는 지금 진행 중인 카타르 월드컵에서 ‘욱일기 퇴치 캠페인’도 벌이고 있다. 그래서 그의 SNS는 응원과 테러가 늘 뒤섞여 있다. 하지만 서경덕 교수는 그저 웃어 보인다. 아무런 논리 없이 비난에만 몰입하는 이들은 결코 그를 이길 수 없다. 그럴수록 무너지는 것은 그쪽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서경덕 교수만을 보지만, 서경덕 교수는 그들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시선은 그 반대편, 더 넓은 세계에 있다. 그리고 그 세계 속에 한국 문화가 자연스럽게 스미도록 하는 것이 그의 목표다.

“어린 시절 우리가 익숙하게 카레를 먹었듯이, 세계 어딘가 고즈넉한 시골 마을의 아이들이 비빔밥을 먹는 것. 이것이 진정으로 대한민국의 문화를 생활 속에서 즐기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이를 이룰 수 있도록 여력이 닿는 데까지 기여하고 싶습니다.”
매 순간 한국의 가치를 알리며 우리에게 의미 있는 순간을 선물하는 그. 그의 흔적이 아름다운 까닭은 어느 자리에서든 너머를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시선에는 언제나 한국이 있고, 이곳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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