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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생각

기억하는 자는 살고
망각하는 자는 사라진다
MEMORY

우리에게는 기억의 영역이 있다. 기억된 내용과 방식은 곧 우리 자신이라고 할 수 있는데,
비극적이게도 그 기억 속에는 고통이 담기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애도의 과정을 통해 올바로 떠올리는 것이 시작이다.

writing. 김현수 (명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성장학교 별 교장)

우리를 생존시키는 기억

인간은 기억하는 동물이다. 지금까지의 진화가 가능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작은 부피의 두뇌는 어떻게 자극되느냐, 활용되느냐, 연결되느냐에 따라 많은 정보, 경험, 그리고 다양한 몸의 사용과 기술에 대해 기억한다. 그렇게 기억된 내용과 방식은 곧 그 사람이자 그 사람의 정체성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기억하지 못하면 위험을 피할 수 없고, 실수를 다시 반복하게 된다. 반사회적 성격장애와 같은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결핍을 도덕성이 아니라 기억의 결핍, 기억에 기초한 학습이 일어나지 않는 비학습장애로 보는 전문가들도 있다. 기억한다는 것은 생존에서 일상의 잔소리를 예방하는 일로 인간의 전반적 행동을 지배한다.

기억의 다양한 종류

우리의 기억은 종류에 따라 다른 기능과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떠올려서 기억해 낼 수 있는 기억을 명시적 기억, 서술 기억이라고 부르며, 기억해 내는 절차가 더 복잡하고 배경으로서 기능하는 기억을 비명시적 기억, 암묵적 기억이라고 부른다.
“작년 여름휴가 기간 동안 가족들과 주로 나눈 대화가 생각나시나요?”, “학습을 위해 중요한 뇌의 부위가 어디인지 아시나요?”, “당신은 누군가요? 당신의 일생 중 성장기에 대해 말해 주세요”, “오랜 시간 자전거를 타지 않았는데, 자전거 타는 법이 기억에 남아 있을까요?”
모두 기억을 하고 있어야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 질문들은 각기 다른 종류의 기억들에 대한 것이다.

명시적 기억

첫 번째, ‘작년 여름의 대화를 기억하느냐’ 하는 것은 삽화 기억이라고 부른다. 이는 명시적 기억의 하나이다. 두 번째, ‘학습과 관련된 뇌 부위를 묻는 질문’ 에 대한 답은 뇌와 학습에 관해 공부를 한 사람만이 기억할 수 있는 것으로 지식 기억 혹은 의미 기억이라고 한다. 이또한 명시적으로 기억해 낼 수 있는 기억 중 하나다. 세 번째, ‘한 사람의 정체성과 과거의 삶을 설명해 달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자서전적 기억이라는 기억의 영역을 끄집어내야 한다. 이 세 가지 기억은 감각과 관련된 뇌 부위와 함께 해마, 편도체, 전두엽 등의 부위에 그 저장소가 있는 기억들이다.

비명시적 기억

‘자전거 타는 법’에 대한 기억은 실제 자전거를 타 봐야 알 수 있다. 흔히 몸에 익힘으로써 명시적으로 표현되거나 기술되지 않는 기억은, 한 번의 경험이 아닌 반복적 결과로 특정한 기술을 터득하면서 생기는 비명시적 기억 중 하나로 절차 기억이라고 부른다. 운전하는 법, 수영하는 법 모두 절차 기억들의 대표적 예다. 절차기억의 뇌 저장 부위는 명시 기억과 다른 것으로 밝혀져 있는데, 뇌의 기저핵, 소뇌 등과 관련되어 있다. 이 외에도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분위기로 느껴지면서 몸의 반응이 평상시와 다르게 나타나는 기억들, 소위 ‘왠지 모르는 선택’은 이 암묵적 기억과 관련되어 있다고 본다.

기억 상실증은 왜 영화의 가장 흔한 소재가 되는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메멘토>부터 그 옛날의 애절한 영화 <마음의 행로>, 최근 드라마 <검은태양> 등 극에는 인물의 정체성을 숨기고, 반전의 스토리텔링을 담기 위하여 흔히 기억상실이라는 소재가 담긴다. 정신분석가의 입장에서 재탄생의 열망이 강렬할 때 기억상실의 소재는 선택하기 좋은 표현 방법이다. 기억이 지워지는 일은 정체성이 사라지는 일이다. 다시 태어나서 새롭게 살고 싶다는 사람들의 욕망을 실현하는 판타지 중 하나가 지금까지 나의 기억을 모두 지우는 것이다. 지난 기억을 모두 잃고 새로운 사람으로 새로운 곳에서 출발해 살아가는 해리성 기억상실도 빈번하게 쓰이는 소재다.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의문도 기억을 소재로 출발한다. 누군가 기억을 모두 잃고 새로운 사람이 되면, 그 사람의 깊은 본질에서 나오는 속성도 변할까? 한 영화에서는 결국 기억을 되찾으면서 옛 특징이 전부 회복되는 사람이 등장하기도 하고, 어떤 영화에서는 과거와는 다른 사람이 되어 이전과는 다른 행동을 하면서 재탄생과 변신의 욕망을 만족시켜 주는 인물이 나타나기도 한다.
동시에 고통스러운 기억과 행복한 기억에 대한 인간의 태도에 대해 무수히 묻는다. 고통스러운 기억은 오래 지속되는데, 행복한 기억은 왜 이리 짧은가를 한탄하곤 한다.

기억해야 하는가? 망각해야 하는가?

끔찍한 장면이 플래시백처럼 떠오르고, 머리를 뚫고 들어오듯 침투하면서 그때의 냄새까지 나는 고통스러운 기억이 계속되어 일상이 어려울 때 우리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는 진단을 받는다. 이때 뇌 상태는 충격적 외상에 압도되어 기억과 관련된 반응을 통제하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 뇌를 안정화하고 기억을 조절하고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을 함께 찾아가는 것이 치료의 과정이다. 환자와 동일한 수준은 아니지만 우리 모두는 고통스러운 기억을 조금씩 갖고 있다. 이 기억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기억하기에는 두렵고 망각은 쉽게 되지 않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현재 고통스러운 기억을 다루는 수많은 치료법이 소개되어 있다. 양측성 안구운동을 통해 기억을 재처리하는 법, 그 장면에 노출되어 보다 잘 대처하는 경험으로 기억에서 고통을 빼내는 방법, 생각의 고통을 줄이기 위하여 처리 과정을 바꾸는 방법, 그리고 생각과 감정뿐 아니라 우리 몸에도 기억이 깊이 남기에 몸을 안정화하고 몸의 감각을 변화시켜 주는 치료까지.
다만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치료법들이 가진 공통적 입장인데, 단지 망각하는 것으로는 기억의 상흔을 거두어 낼 수 없다는 것이다. 더 강해져서 새롭게 기억하기, 혹은 기억을 대할 때 다른 방식으로 대처하는 법 배우기, 기억이 나더라도 전보다 훨씬 덜 괴롭기와 같은 방법들을 제안하고 있다. 즉 고통을 다룰 수 있을 만큼 성장하거나, 고통이 작아 보이도록 우리가 커지거나, 혹은 고통을 이해할 만큼 깊어져서 고통을 다루게 될 줄 알게 되는 방법들, 고통을 애도의 과정으로 통과하는 법을 말한다. 망각은 회피나 대체, 전환의 방법들로 퍼져 나가 고통을 위장하고 변신시킬 뿐 고통을 줄이지 못한다는 것이 많은 고통 기억 담지자들의 중론이다.

기억하기, 가슴에 품기,
지지와 응원받기, 새롭게 연결되기의
과정이 잘 진행될 때 우리는
건강한 애도가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충분한 대화, 많은 눈물, 수용
그리고 사람들의 지지와 격려를
통해 우리는 고통스러운
기억을 잘 다루고 살 수 있게 된다.
애도, 고통스러운 기억을 다루는 법

미국의 정신분석가 수잔 캐벌러 애들러는 고통을 관통하면서 앞으로의 삶을 전진시키는 중요한 과정을 ‘애도’라고 했다. 여기서 애도는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그 기억은 애도 과정을 통해 속성이 변화한다. 그래서 고통을 가슴에 들여와 품을 수 있게 되고 고통스럽지 않은 방식으로 고통스러운 기억과 만날 수 있게 된다. 기억하기, 가슴에 품기, 지지와 응원받기, 새롭게 연결되기의 과정이 잘 진행될 때 우리는 건강한 애도가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충분한 대화, 많은 눈물, 수용 그리고 사람들의 지지와 격려를 통해 우리는 고통스러운 기억을 잘 다루고 살 수 있게 된다.
이 작업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주변의 사람들이다. 외로우면 애도가 충분히 일어나기 어렵다. 건강한 애도를 위해서는 당신의 옆자리가 비어 있지 않아야 한다. 어쩌면 구태의연할 수 있지만 고통을 줄이는 가장 강력한 방법 중 하나는 친구와 만나는 것이다. 무더운 여름이지만 당신이 많은 사람과 함께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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