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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에 담긴
화가의 속마음
자화상은 화가가 자신을 모델로 그리는 초상화이다. 화가의 삶이 직접 투영된 자화상을 보며 그 안에 담긴 화가의 속마음을 읽어 보자.
writing. 박혜성 (화가, 작가)
2020년 영화 ‘기생충’은 아카데미 4관왕을 수상하며 세상을 놀라게 했다. 감독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은 영화 공부를 할 때,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이다’라는 말을 항상 가슴에 새겼다고 말했다. 그의 수상 소감은 창작 활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그림 세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특히 자기 고백의 작품일 경우 더 깊이 공감하고 빠져들기 마련이다. 자기 고백의 대표적인 그림은 자화상이다. 자화상은 화가의 독백이며 자기 성찰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돌아보고 마음을 다잡는 데는 자화상만 한 것이 없다.
멕시코 여성 화가 프리다 칼로(Frida Kahlo de Rivera, 1907~1954)는 선천적 장애와 교통사고, 평탄치 않은 결혼 생활로 위기가 있을 때마다 자화상을 그리며 스스로 위로하며 용기를 얻었다. 이탈리아 천재 화가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1~1610)는 특출한 화가였지만 과격한 성격으로 살인을 저질러 도망자 신세가 되었는데, 죽음 직전 스스로를 단죄하는 자화상을 그리며 참회했다. 그리고 80여 점에 달하는 자화상을 남긴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1669)는 시기에 따라 변하는 자신의 모습을 자서전처럼 남겼다.
이처럼 자화상에는 화가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담긴다. 그럼에도 분명 대중이 공감할 수있는 요소가 있다. 아픔을 토해 내는 자화상,속죄하는 자화상, 자부심이 보이는 자화상등 화가의 일기 같은 자화상을 통해 그들의진정한 내면을 파헤쳐 보자.
Frida Kahlo
de Rivera
1907~1954
프리다 칼로 <벨벳 드레스를 입은 자화상>, 1926년, 개인 소장
가장 개인적인 것을 가장 창의적으로 그린 화가
개인사를 그린 화가 중에 가장 독보적인 존재는 프리다 칼로가 아닐까? 나는 프리다 칼로의 작품을 처음 보았을 때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도대체 어떤 화가이기에 이토록 아픈 삶을 살았을까?
프리다는 1907년 멕시코에서 헝가리계 유대인 아버지와 인디오, 스페인 어머니 사이에서 혼혈아로 태어났다. 6살 때 소아마비로 다리에 장애가 생겼지만, 낙천적인 그녀에게 이는 문제가 아니었다. 총명한 프리다는 의사가 되는 국립예비학교에 입학하여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중, 날벼락 같은 전차 교통사고를 당한다. 17살이었던 프리다는 이 사고로 처참히 부서졌으며 운명적으로 화가의 길을 가게 된다. 입원 중 처음 붓을 들었고 자신이 화가가 될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첫 자화상 <벨벳 드레스를 입은 자화상>을 그렸다. 그러고는 멕시코를 대표하는 화가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 1886~1957)를 찾아갔다. 디에고는 프리다를 보는 순간 사랑에 빠졌다. 디에고는 두 번의 결혼 경력과 4명의 자녀가 있었으나 프리다는 결혼을 강행한다. 사생활이 문란한 42세 디에고와 21세 프리다의 결혼 생활은 예상대로 순탄치 않았다.
1940년, 뉴욕 현대 미술관
‘우리 이혼했어요’
자화상에 담긴 그녀의 결심
디에고는 결혼 후 멕시코 공산당 총서기, 산 카를로스 학교 교장, 벽화 제작 등의 왕성한 활동과 더불어 잦은 외도와 국외 활동 등으로 가정을 돌보지 않아 프리다는 무척 고통을 받았다. 남편의 사회생활이 바쁠수록 프리다는 외로웠고, 세 번의 유산과 사고 후유증은 그녀를 황폐하게 했다. 프리다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그림밖에 없었고 그림을 그리며 현실의 고통을 이겨 내었다.
그러던 중 디에고의 부도덕함이 극에 달하는 사건이 생긴다. 디에고가 프리다의 여동생 크리스티나와 외도를 한 것이다. 프리다는 두 사람에게 깊은 배신감을 느끼고 이혼을 결심한다. 그러고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버리고 남자 양복을 입은 후 자화상을 그렸다. 이혼 후 그린 <머리카락을 자른 자화상>은 그녀의 55점 자화상 중 가장 중성적인 자화상이다. 전혀 아름답지 않으며 자신을 미화시키지 않았다. 더는 남자에게 의존하는 삶을 살지 않겠다는 결심이다.
그녀는 교통사고, 결혼, 유산, 남편의 외도, 이혼, 재결합 등 신변의 큰 변화가 있을 때마다 자화상을 그렸다.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은 가장 독창적이고 개성 있는 프리다 화풍으로 피어났다. 멕시코에 남아 있는 프리다의 작품은 1984년 멕시코 국보로 지정되었다.
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1~1610
카라바조 <병든 바쿠스 신>, 1593~1594년, 보르게세 미술관부랑자에서 메디치가 인재가 된 카라바조
르네상스 천재 화가 미켈란젤로와 동명인 미켈란젤로 카라바조는 미술사에 손꼽히는 뛰어난 화가이다. 카라바조는 1571년에 이탈리아 북부 밀라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미켈란젤로처럼 위대한 예술가가 되기를 바라며 이름을 지었으나 후에 미켈란젤로와 구별 짓기 위해 고향인 ‘카라바조’로 이름을 바꾼다.
카라바조는 평범한 중산층에서 태어났지만, 밀라노를 휩쓴 전염병으로 6살 때 조부, 아버지, 삼촌을 한꺼번에 여의고 고향 카라바조에서 초등교육을 마친 후 13세에 밀라노에서 그림 기초를 닦는다. 19세에 어머니마저 사망하자 20살의 카라바조는 로마로 이주한다. 그는 로마 뒷골목을 헤매며 그림을 그렸는데 델 몬테 추기경의 눈에 띄면서 삶의 빛이 들기 시작했다. 카라바조가 20대 초반에그린 <병든 바쿠스 신>을 보면 당시 그의 삶이 얼마나 처참했는지 알 수 있다.
손톱에 낀 때와 혈색 없는 얼굴, 위축된 표정이 안쓰럽기까지 하다. 카라바조를 후원한델 몬테 추기경은 메디치가의 정치적 대변인이었으며 예술품을 매입하며 관리한 인물이었다. 추기경은 길거리 부랑자와 다름없었던 카라바조를 자신의 저택에 살게 하고 작업장을 내주고 그의 보호자가 되어 주었다.
1610년, 보르게세 미술관
살인자의 마지막 고백
든든한 후원자 밑에서 창작 의욕에 불탄 카라바조는 불후의 명작 <메두사>를 탄생시키며 이탈리아 전역과 유럽 화단의 돌풍을 일으키며 스타가 되었다. 그 후 성과 속을 구별 짓지 않는 종교화를 생산하며 카라바조의 시대를 연다. 카라바조는 자신이 늘 만났던 거지, 부랑자, 창녀를 성스럽게 둔갑시켜 종교화에 끌어들였다. 또한 어둠의 방식이라는 ‘테네브리즘(Tenebrism)’을 창시하여 강렬한 빛과 어둠의 대비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카라바조는 난폭하고 참을성 없는 성격으로 끓임없이 사건 사고를 일으켰다. 1606년 카라바조는 사소한 시비로 끔찍한 살인을 저질러 범죄자가 되었다. 카라바조는 로마에서 도망 나와 나폴리, 말타섬, 시칠리아섬에서 도피 생활을 하는데, 역설적이게도 가는 곳마다 종교화 주문을 받으며 환대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극도의 불안감과 공포심으로 점점 더 광포해지고 계속 문제를 일으키며 도망을 다닌다.
1610년 39세의 카라바조는 마지막 희망인 쉬피오네 보르네세 추기경의 사면을 기대하며 그림을 품에 안고 로마로 향했다. 하지만 검문에 걸려 그림을 빼앗기고 결국 말라리아에 걸려 죽게 된다. 카라바조의 마지막 작품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은 스스로를 단죄하는 그림이다. 다윗은 죄를 짓기 전 청년 카라바조이며 골리앗은 살인을 저지른 후의 자화상이다. 목이 잘린 골리앗은 스스로를 처단하는 참회의 자화상이다.
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1669
렘브란트 <자화상>, 1659년,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그림으로 표현한 자서전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자화상을 많이 그린 렘브란트는 80여 점의 자화상을 남겼는데, 옷차림이 군인, 화가, 거지, 신사 등각양각색이다. 다양한 옷차림과 달리 얼굴묘사는 한결같이 빛과 그림자를 대비시키며내면의 감정을 진솔하게 드러내고 있다. 렘브란트의 자화상을 보노라면 사색에 잠긴화가와 대면하는 느낌이다. 렘브란트처럼 시대에 따라 변하는 얼굴을 그린 화가는 없기에 그의 자화상은 그림으로 표현한 자서전이라 할 수 있다.
1606년 네덜란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렘브란트는 부모로부터 상당한 재산을 상속받았다. 그의 부모는 아들이 대학에 가기를 바랐지만, 그림에 관심을 둔 렘브란트는 몇 년의 도제 생활을 한 후 독자적인 화가가 되었다. 20대부터 초상화가로 명성이 난 렘브란트에게는 사업가, 고위 공직자, 성직자의 초상화 주문이 이어졌다. 생동감과 우아함이 적절히 어우러진 그의 초상화는 인기가 있었다. 당시는 사진이 발명되기 전이었기에 초상화는 누군가를 기억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렘브란트가 남긴 수많은 인사의 초상화는 이를 방증한다.
이야기가 담긴 자화상
승승장구하던 렘브란트에게 시련이 닥친 것은 뜻밖에도 단체 초상화 때문이었다. <야경>으로 불리는 이 작품은 반닝 코크 대장이 이끄는 시민군 단체 초상화인데, 그들 대다수가 부자였기에 최고의 초상화가인 렘브란트에게 주문하였다. 그런데 이 단체 초상화의인물들은 서로 겹치고 때론 그림자에 가려서 누가 누구인지 구별이 안 되었다. <야경>에 쏟아진 호된 비평과 불만은 렘브란트를추락시켰다. <야경>은 비록 단체 초상화의관례를 벗어났지만, 이제는 초상화와 이야기를 결합한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렘브란트가 남긴 시기별 자화상 역시 자화상과 이야기가 결합한 작품이다. 불안했던청년기, 자신감에 충만했던 중년기, 외롭고고독했던 마지막 10년 등 그는 당시의 상황과 감정을 충실히 표현했다.
뛰어난 예술성으로 초기와 중기에는 존경받으며 부와 명예를 누렸으나 후기에 명성은 추락하고 경제난까지 겹치면서 몰락했던 램브란트. 초·중기 자화상도 훌륭하지만, 그의 후기 자화상에 담긴 고독감과 인간적인 고뇌는 오히려 더 높은 평가를 받는다.
후기 대표작 <두 개의 원이 있는 자화상>에는 허름한 작업복을 입은 노화가가 화면을 응시한다. 주름진 이마, 꼭 다문 입술, 두껍게 칠해진 흰 모자 등은 화가의 근엄한 모습인 동시에 진지한 삶의 현장을 보여 준다. 내면의 깊은 성찰이 담긴 렘브란트의 자화상은 우리를 사색에 잠기게 한다.
1663~1665년, 캔우드 하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