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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컬러밴드’ 하태임 작가

    지우고 지나간 자리,
    그립고 그리운
    마음 곁에 피어난 꽃망울

    • 권주희
    • 사진 김범기
  • 캔버스 가득 다채로운 색띠가 펼쳐진다. 붉고도 푸른, 잔잔하고 유연한 컬러가 화면을 채운다. 하태임 작가는 오랜 시간 일관되게 ‘컬러밴드(Color band)’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그의 작품을 마주하면 곡선의 색들이 마음의 빗장을 열고 성큼 다가오는 듯하다. 봄날의 햇살을 맞으며 그와 함께 가벼운 산책을 떠난다.
가나아트 나인원 개인전1 인간이 색을 구분하고 식별할 수 있는 것은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수년간 다채로운 색띠를 화면에 유영시켰다. 흐르는 물고기와 같이, 때로는 우주에 일정한 궤도를 그리는 별과 같이, 몸을 축으로 쭉 뻗는 팔 끝으로 색실을 줄줄 뽑아냈다. 어떤 색 위로 다른 색을 중첩시켰을 때 만들어지는 또 다른 ‘색공간’에 온 신경을 주목하고 색과 색의 만남과 중첩을 끊임없이 반복했다. 전혀 다른 존재인 색과 색이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진다. 때론 긴장되고, 어느 지점에서는 행복하고 그리고 어느 순간에는 애절하기도 하다.
– ‘가나아트 나인원 개인전’ 작가의 말 중에서
가나아트 나인원 개인전2
이 세계의 끝,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하태임 작가의 작업은 일견 단순한 듯 보이지만 수없이 많은 반복과 기다림으로 완성된다. 캔버스에 배경색을 입히고 그 위에 여러 가지 색의 띠를 그리는데, 수십번의 붓질을 반복하고 온전히 마르기를 기다리며 끊임없이 계속한다. 더구나 이 색들의 띠를 그리는 과정 역시 순탄치 않다. 자신의 몸통을 캠퍼스의 축처럼 고정하고 팔을 쭉 뻗어 선을 그린다. 이 ‘만곡의 띠’를 고집하기에 자신을 버리고 오직 색과 형태에 집중한다. “자연스러운 곡선을 그리는 일은 저를 지우는 일 같아요. 나를 지우며 색과 형태를 오롯이 드러나게 하는 거죠. 몸의 중심을 잘 잡고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선을 긋는데요, 저에겐 이 일이 명상이고 수행인 것 같아요.”
누군가는 다른 방식의 작업을 권하기도 하지만 그는 이 세계의 끝까지 도달할 참이다. 지난 2007년부터 해왔지만 아직도 작업이 무르익어가는 중이라고. 하태임 작가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동안 무심히 지나쳤던 생각을 다시 붙들게 되고, 별로였던 것이 특별해지곤 한단다. 지난해 여름, 가나아트 나인원에서 열린 개인전 <Un Passage>에서 ‘핑크와 블루’를 새롭게 인식한 것도 이 집요한 작업 끝에 맞이한 새로운 세계였다.
“색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곤 하죠. 레드는 열정, 옐로우는 질투처럼요. 그런데 또 색은 지극히 개인적인 역사가 담겨 있기도 해요. 저에게 블루는 그리움이에요. 고독이기도 하고요. 또 핑크는 유치하다며 나이가 들면서 외면하잖아요. 그런데 인생의 여러 경험들이 쌓이면서 이 두 컬러를 다시 느끼게 되었어요. 희망과 화해, 용기와 위로를 주었죠. 그래서 블루와 핑크가 만나면 어떤 에너지가 펼쳐지는지 시도해 보고 싶었어요.” 하태임 작가는 ‘소통’에 대해 일관되게 말하고 있다. 프랑스 유학시절 그는 언어의 장벽과 향수병으로 지독한 외로움을 겼었다. 그런 경험들은 1995년 첫 개인전에서 자화상 ‘구토’와 같이 어둡고 우울한 추상화로 표현되었고, 1998년부터는 알파벳과 라틴어 등 문자와 기호로 언어와 문화에 대한 고민을 담기도 했다. 그런데 진정한 소통은 비언어적인 것에서, 관계 속에서 비롯된다는 깨달음을 통해 비우고 덜어내기에 이르렀고, 이렇게 지워진 자리에 치유와 성장이 자리하게 되었다.

하태임 작가
계절이 바뀌듯, 겨울 지나 봄은 오고

하태임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아버지 고(故) 하인두 화백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하인두 화백은 ‘혼불’, ‘만다라’ 등 전통 오방색을 통해 독창적인 세계를 구축한 한국 추상미술 1세대로 꼽힌다. 또한 어머니 류민자 화백은 동양화가로, 동생 하태범 작가는 조각가이자 설치미술가로 활발히 활동 중이다.
“어릴 땐 아버지의 이름이 돌덩어리처럼 느껴지기도 했어요. 나 자신이 아닌 누군가의 딸로 평가받는 것 같아 끔찍하게 싫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저의 정신적인 유산이 아버지로부터, 가족으로부터 왔다는 걸 받아들이게 되고 한결 가벼워졌어요.”
올해 그는 굵직한 전시를 앞두고 있다. 가나아트 부산에서 열리는 개인전과 아버지와 함께하는 2인전을 준비 중이다. 특히 아버지와의 2인전은 그에게 무겁지만 설레는 전시다. 하인두 화백의 블루를 하태임 작가의 세계로 해석해 오마주 하는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그는 아버지의 세계를 지나 자신의 세계로 묵직한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이곳으로 온 건 2019년이에요. 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동네인데요, 여기서 비로소 전업작가로서 자리를 잡은 것 같아요. 그전엔 집과 작업실을 따로 두고, 생계를 위해서 24시간을 쪼개 바쁘게 살았어요. 지금은 오롯이 작업에 빠져 살아요. 2, 3층은 생활공간이고 1층은 작업공간인데요, 일상과 작업을 조화롭게 하고 있어요.”
그의 2층 창밖으로 아버지의 산소가 한눈에 들어온다. 완연한 봄에 접어들면서 산소 주변의 벚나무들이 꽃망울을 하나 둘 터뜨리고 있다. 이제 곧 흩날리듯 꽃비가 쏟아질 터. 잠깐 한눈을 팔고 나면 사라져 버리고 마는 그 짧고도 아름다운 순간을 그는 기다리고 있다. 피고 지는 꽃을 보며 자연의 이치와 인생의 순리를 깨닫는다.
“얼마 전에 어머니를 모시고 섬진강에 갔어요. 골짜기마다 가득한 매화향을 맡으며 왜 그토록 많은 작가들이 매화를 그렸는지 이제야 알게 되었어요. 거친 줄기 사이 흐드러지게 핀 꽃들이 무척 동양적인 느낌이었어요.”
꽃과 색이 전하는 아름다움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 하태임 작가는 이 당연한 아름다움을 관통해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입힌다. 깊고도 찬란하게 화폭을 채우며 이 봄을 맞이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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