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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행도 배달이 되나요?
    요즘, 경주

    • 글. 사진 유승혜(여행작가)
  •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인생에 최소 한 번의 경주가 있다. 첫 번째 경주는 아마도 수학여행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불국사와 첨성대, 그리고 거대한 고분들 사이를 걸었다. 그때의 추억은 천년의 세월 안에 스민 듯 아스라하고, 경주는 다만 오래되고 낡은 도시로 각인되었다. 봄의 길목에서 문득 경주를 떠올린다. 불국사와 첨성대로 상징되는 천년고도 경주가 아니라 고택과 개울, 항구와 해변 사이를 나릿하게 걷는 쉼표 경주다. 처음인 듯 처음이 아닌 두 번째 경주. 다시 만난 봄처럼 새롭다.
감은사지 삼층석탑
마음이 엉킬 때마다 찾는 마을

경주가 있고 안강이 있다. 안강은 경주시에 속하는 읍 단위 행정구역이지만 안강 사람들은 다른 지역에 가서도 경주보다 “안강에서 왔다.”고 말한다. 경주 사람이 아니라 안강 사람이다. 유난한 애향심이 아니라 대대손손 이어져온 자부심이다. 안강은 경북 남동부에서 제일 큰 평야를 품고 있다. 포항 바다를 앞두고 세를 불린 형산강변의 비옥한 땅 덕에 곡식이 풍요롭고, 울멍줄멍 낮은 산들이 울타리를 둘러 사철 아늑한 소읍이다.
하여 이름도 편안할 안(安), 편안할 강(康)을 쓴다. 풍수에 능한 조선 양반들이 일찍이 이곳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그들의 후손이 ‘안강 사람’들이다. 고분들이 모여 있는 경주 원도심이 풍화되어 아득한 전설 같은 땅이라면 안강은 구체적으로 생동하는 땅이다. 마음이 엉킬 때마다 안강 세심마을을 찾았다. 이름처럼 세심하게 마음을 어루만져 줄 것 같았다. 세심마을은 안강에서도 변두리 깊숙이 자리한, 온 사위가 산으로 둘러싸인 골짜기 마을이다. 순일한 산촌마을들은 때로 폐쇄적인 분위기가 감돌지만 세심마을은 이방인에게 살갑다. 마을 어귀에 옥산서원, 중심부에 독락당, 끄트머리에 정혜사지13층석탑이 있는 덕분이다. 이들은 동네의 뿌리와도 같은 존재이며 제각기 독보적인 가치를 지닌 국가 보물이다. 동네 산책은 서원에서부터 시작한다.

세심마을
자연에 귀를 적시고 마음을 씻는다

1573년 창건된 옥산서원은 지난 201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조선 중기 성리학의 엄격함을 반영한 정형화된 구조의 건물로 최우선의 쓰임은 유생들의 학문 정진이었다. 서원의 중심 건물인 구인당의 양쪽 방에는 공부에 집중하라는 의미로 창문조차 내지 않았다. 그러나 시야를 가려도 열린 귀를 닫진 못한다. 옥산서원만큼 물소리, 새소리가 가깝고 맑게 들리는 건축물은 드물다. 전국의 서원 중 가장 책을 많이 소장한 까닭을 알 것도 같다. 자연의 소리는 최상의 백색소음이 아닐까. 구인당 대청에 앉으면 책을 읽고 싶어진다.
서원 곁을 흐르는 자계천을 따라 조금만 걸어 오르면 탁 트인 너럭바위와 부러 깎은 듯 반듯한 고랑창으로 세차게 흐르는 물길이 등장한다. 절리처럼 판판한 암반은 책을 쌓아둔 것 같은 형태다. 시선은 그중 한 바위에 새긴 한자, ‘洗心臺(세심대)’에 머문다. 마음을 씻는 곳이라는 뜻이다. 세심마을의 이름이 이곳에서 기원했다. 세심(細心)한 마을인 줄 진즉에 알았지만 세심(洗心)할 곳을 내어줄지는 몰랐다. 돌바닥에 앉아 가만히 눈을 감는다. 귓속으로 흘러든 맑은 물이 메마른 마음 구석구석을 적신다.

세심마을 전경
홀로 즐기는 집

세심대라는 이름은 조선 성리학의 기초를 다진 회재 이언적 선생이 지었다. 옥산서원도 독락당도 모두 그에 의해 지어졌다. 서원에서 마을길을 따라 15분 쯤 오르면 독락당(獨樂堂)이다. 이름 뜻을 풀면 홀로 즐기는 집이다. 회재 선생은 이곳에서 말년을 보냈다. 이 집의 백미는 천을 바라보고 지은 정자, 계정이다. 계정은 서원에서 가려졌던 시야가 보상되고도 남는, 근사한 계곡 전망을 가졌다. 정자의 사계절을 경험했을 회재 선생의 말년이 행복했노라, 마음대로 확신해본다. 그의 후손은 독락당 일부를 개방해 민박으로 운영하고 있다. 홀로 즐기는 자에게 고택의 하룻밤 또한 값지리라.
독락당에서 다시 산 방향으로 5분쯤 걸어 오르면 정혜사지13층석탑이다. 통일신라시대 때 세워진 천년의 석탑으로 국보 제40호로 지정됐다. 묵직한 1단의 석축 위로 13층의 탑신이 촘촘하게 올라간 개성 넘치는 탑이다. 탑을 가만히 바라보노라면 어느 결에 움츠렸던 어깨를 반듯이 피게 된다. 탑의 의연한 자태를 닮고 싶은 사람처럼. 이곳 세심마을에서 마음을 씻고 몸을 바로 세운다.
세심마을에서 동쪽으로 10km 떨어진 곳에 안강의 대표 명소 양동마을이 있다. 세심마을보다는 유명하지만 이곳 역시 문화·역사적 가치에 비하면 널리 알려진 편은 아니다. 500년 이상 된 국내 건축물 열 채 중 네 채가 있고 국가문화재로 지정된 고택이 국내에서 가장 많은 동네임에도 안동 하회마을보다 명성이 덜 한 이유는 ‘하필’ 경주에 속해서인지도 모르겠다.

  • 세심마을 벽화
  • 양동마을 전경
멀고도 가까운 감포 가는 길

경주에는 바다가 있다. 경주를 오가는 숱한 객들이 종종 이 사실을 잊는다. 유적이 모여 있는 경주 원도심에서 바다는 가깝고도 멀다. 그래봐야 경주라서 가깝고, 경주까지 와서 바다를 가야 하나 싶으면 멀다. 2014년 토함산을 관통하는 토함산로가 개통하고 실제로 바다는 전보다 가까워졌지만 경주의 바다는 여전히 한가롭다.
‘감포 가는 길’의 상징인 두 기의 감은사지 삼층석탑을 지나면 수평선이 보인다. 바다를 마주하고 왼편으로 가면 감포항, 오른편으로 가면 읍천항이다. 경주까지 와서 바다를 가야 할 이유는 두 곳의 항구면 넘치게 충분하다.
감포항은 보통 ‘항구’하면 떠오르는 왁자한 풍경이 아니다. 매일 고깃배가 오가고 닷새에 한 번 난전이 서지만 시종 차분하다. 항구에 자리한 횟집들은 30년 이상씩 운영해온 집들로 드나드는 손님들은 관광객보다 동네 단골이 더 많다. 그러나 감포항은 여행자를 위한 배려를 잊지 않았다. 마을길 바닥과 회색 담장에 화사한 해국을 그려 넣었고 100년 넘은 일본식 가옥들을 함부로 허물지 않았다. ‘해국길’을 따라 걷다 보면 그 끝에 송대말등대가 있다. 소나무로 우거진 등대 앞에 서면 감포항 일대가 한 눈에 들어온다. 항구는 호젓하지만 바다는 호쾌하다. 바람이 앗아간 체온은 근처 핸드드립 카페 아르볼에서 얻는다. 감포항의 귀한 카페여서 혹여나 주인이 문을 닫지는 않을까 걱정인데 다행히 아직까지 영업 중이다.

최초의 배달 음식 효종갱

읍천항은 ‘주상절리 파도소리길’ 덕분에 방문객이 많이 늘었다. 주상절리는 내내 그 자리에 있었지만 오랜 시간 군사지역으로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어왔었다. 이제는 그 주변에 데크길과 전망대가 생겼고 산책자들이 수시로 오간다. 용암이 냉각되어 만들어진 육각형 돌덩이인 주상절리가 부채꼴, 꽃술, 주름치마 등의 화려한 형태로 해안에 펼쳐져 있다. 그 위로 새하얀 포말이 피었다 사라지길 반복한다. 살아 움직이는 예술이다.
파도소리길은 주상절리와 검푸른 바다, 송림을 지나는 1.7km의 산책로다. 이 로맨틱한 바닷길은 혼자 걷기보다 함께 걷기가 어울린다. 해서 이제껏 혼자라면 감포항을, 함께라면 읍천항을 향했다. 읍천항에는 바다를 향한 카페와 대형 식당이 꽤 있다. 읍천항뿐만 아니라 경주에는 관광객의 이목을 끄는 맛집이 많은데, 특히 우리나라 최초의 배달음식 ‘효종갱’도 직접 맛볼 수 있다. ‘효종갱’은 우리나라 최초의 해장국으로 조선시대, 이를 항아리에 담은 뒤 밤새 달려, 경주에서 한양까지 배달을 했다. 효종갱은 새벽을 알리는 종소리와 같은 국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된장을 푼 물에 소갈비와 콩나물, 표고, 송이, 해삼, 전복을 푹 고아 만든 음식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불국사와 첨성대, 대릉원 일대에서 북적인다. 그들 대부분이 ‘첫 번째 경주’를 만나는 중일 것이다. 그러니 ‘두 번째 경주’를 만난 사람이 경주 바다를 귀히 여겨줄 수밖에.

최초의 배달 음식 효종갱
읍원항 일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