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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것이 집,
    핀란드에 반할지도

    • 글. 사진 북유럽 반할지도(최상희·최민, 해변에서 랄랄라, 2019)
  •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 세계에서 가장 깨끗한 공기를 가진 나라, 수천 개의 맑은 호수와 숲이 만들어내는 그림 같은 풍경. 화려하진 않지만, 집의 아늑함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그런 곳. 핀란드로의 여행을 시작해 보자.
Moi, Helsinki!

중앙역 앞에서 트램을 타고 잠시 달리자 창밖으로 쌍둥이 소녀 그림이 걸린 오렌지색 벽돌 건물이 보인다. 도착했다. 영화 <카모메 식당>에서 사치에 씨가 다니던 시장이다. 광장의 가판대에서 붉은 링콘베리와 황금빛 칸타렐라 버섯이 단정하게 진열되어 있다. 청량한 햇살과 신선한 공기가 주는 선물들. 노천카페에 앉은 사람들은 느긋이 커피와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이곳이 좋아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도시를 즐기는 방법이 있다. 우리의 헬싱키는 시장으로 시작한다. 하카니에미는 현지인들이 즐겨 찾는 재래시장으로, 소박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광장에서는 신선한 식재료와 꽃을 팔고 실내 마켓에는 식재료점과 반찬가게, 빵집, 수프가게 등이 빼곡하다. 이층에는 아담하지만 디스플레이가 근사한 마리메코숍과 잡다한 기념품숍, 귀여운 책방, 빈티지 그릇 등을 파는 아기자기한 가게들이 이어진다.

  • 하카니에미 광장
  • 핀란드에서 묵은 자작나무 방
고민 많은 시장

핀란드 사람들은 한번 쓴 물건을 함부로 버리지 않는다. 그래서 헬싱키에는 많은 플리마켓, 벼룩시장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곳은 바로 히에타라하티 마켓이다. 여름이면 매일 히에타라하티 광장에 빈티지 벼룩시장이 열린다. 8시부터 장이 서기 시작해 네다섯 시쯤 파장한다. 벼룩시장의 묘미는 가격이다. 아라비아의 오리지널 빈티지 그릇에 매겨져 있는 숫자가 아니라 내 마음 속에서 매겨지는 숫자에 의해 구매가 결정된다. 가격이란 그런 것이다. 지극히 애매하지만 반면 확고한 ‘뭔가’가 마음을 건드려야만 지갑을 열게 된다. ‘이 정도면 괜찮으려나’가 아니라 ‘이건 무슨 일이 있어서 사야만 돼’의 아우성이 들려야 한다. 그러니깐 그날은 ‘절 데려가세요’란 간절함을 듣지 못해 아무것도 사지 못했다는 이야기. 너무 매몰찼나 하는 아쉬움의 눈물을 찔끔 흘리며 발길을 돌린다. 광장에 있는 실내 마켓에는 맛있는 햄버거를 파는 로스룬드(Lihakauppa Roslund)라는 근사한 식당이 있다.

핀란드 숲과 호수의 맛

핀란드 음식은 단조롭고 심지어 요리랄 게 없다는 악평에 시달리는데 어찌된 일인지 우리는 헬싱키에서 내내 ‘와’, ‘맛있잖아’를 입에 달고 다녔다. 의외의 즐거움을 선사하는 미각의 도시, 우리에게는 그랬다. 유리(juuri)는 미슐랭도, 현지인도 추천하는 레스토랑. 핀란드의 숲과 호수, 바다에서 나는 재료를 다양한 방법으로 조리한 핀란드식 ‘사파스’가 유명하다. 우리는 쓰리 코스로 구성된 런치 메뉴를 먹었는데 접시가 나올 때마다 와아, 하는 작은 탄성을 질렀다. 플레이팅마저 아름다운 요리는 신선하고 풍부하며 놀라웠고 즐거웠다.

잠깐 빌려 쓴 따뜻한 집 히에타라하티 마켓 푸 발릴라에서의 아침 산책
잠깐 빌려 쓴 따뜻한 공간

헬싱키에서 우리는 동네 산책만으로도 즐거운 곳에 며칠을 살았다. 우리가 뭘 했냐면, 아침이면 잠시 집 주변을 걷다 맛있는 커피를 한 잔 사서 과일과 빵으로 간소하지만 든든한 아침을 차려 먹고, 외출했다 돌아와 시장에서 사 온 수프를 데우거나 파스타를 삶아 저녁을 준비했다. 작은 양초를 켠 테이블에 앉아 맥주나 차를 마시며 오늘 찍었던 사진을 함께 보며 킥킥대다 내일은 또 어디 가볼까, 하고 두런두런 나누는 대화들.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은 편안한 밤이 깊어갔다. 아라비아와 이딸라 그릇과 무민 컵이 선반 가득 가지런하고 핀레이손의 패브릭으로 꾸며져 있던 이 볕 잘 드는 하얀 집에서 가장 많이 한 것은, 창가에 앉아 멍하니 거리를 내다보는 것. 그게 참, 좋았다.

증기와 열기의 밤

핀란드는 사우나 문화가 대표적이다. 핀란드까지 왔는데 사우나는 한 번 해야지, 하는 야무진 계획 같은 건 없었다. 계획에도 없던 일이라 몇 가지 준비를 해야 했다. 우선 욕실에서 수건 한 장씩을 챙겨 슬리퍼를 끌고 안마당을 열 걸음인가 걸었다. 안마당만 건너면 바로 사우나가 있었다. 그것도 이름만 대면 헬싱키 사람들은 다 아는 유명한 사우나가. 사우나 밖에서 가운 차림의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후후 입김을 내뿜으며 이야기를 나누던 아저씨들이 “웰컴, 웰컴”하며 문을 열어주었다. “왓!” 긴장했지만 이후로는 우리나라 목욕탕 시스템과 똑같았다. 샤워를 간단히 하고 사우나실로 들어가자 안은 수증기로 자욱했다. 희미하게 나무 냄새가 났다. 화덕에 물을 뿌려도 되냐고 물으며 증기 천국을 만들어놓은, 캐나다에서 왔다는 여행자는 십 초 만에 항복 선언을 하고 도망치듯 사우나실에서 나갔고 남은 건 동네 주민 두 명과 우리뿐. 자, 우리도 찜질방에서 맥반석 계란 좀 까본 사람이에요. 차가웠던 몸이 구석구석 따뜻해지고 노곤노곤해진다. 핀란드 사우나에 빠져들 것만 같다. 하지만 사우나의 나라 사람들은 역시 당해낼 수 없더군요. 대신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맥주를 만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사우나 후에 바로 마시는 맥주.

그것이, 집

여느 때보다 아침 일찍 숙소에서 나섰다. 오늘은 헬싱키 여행 중 가장 고대하던 날로, 알바 알토의 집에 찾아가는 길이다. 알바 알토는 핀란드의 대표 건축가로 파이미오의 사나토리움으로 설계대회 수석을 차지했다. 핀란드 특산 목재를 사용해 마이레아장(莊)을 설계했으며, 파리 만국박람회 핀란드관을 설계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1936년 알토가 설계하고 아내인 아이노가 내부를 꾸민 알토 하우스는 2002년부터 공개되어 정해진 시각에 가이드와 함께 돌아볼 수 있다. 알토의 집은 건축가의 집답지 않게 소박하다. 아니, 알토의 건물은 대개 그렇다. 기교나 허세 같은 건 전혀 없다. 잠시 둘러본 이 햇살 잘 드는 집에서 살던 사람의 기척이 느껴진다. 알토가 설계도를 그리다 잠시 내다봤을 창밖의 풍경, 아내의 화장대를 비추는 아름다운 조명, 추운 날 온 가족이 둘러앉았던 난롯가. 무언지 모를 따스한 기분이 든다. 그것은 아마도 숨어들고 싶은 작은 공간을 둘 줄 아는, 일상생활에 대한 세심한 배려 때문이 아닐까. 기능적이면서도 건축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와 유머와 몽상과 꿈이 반영된 공간, 주위 풍경이나 지형과 자연스럽고도 아름답게 어우러지는 공간, 기후와 풍토를 고려한 슬기로운 아이디어가 방안 구석구석까지 미쳐 있지만 조금도 그것을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러운 공간. 해가 지면 돌아가고 싶고 피곤한 몸을 누이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 곳, 그 안에서 꿈과 미래를 그려보는 공간을 우리는 집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나는 서재에 잠시 머물렀다. 그러니깐 당신은 진짜 대가였군요. 조용히 말하자 벽 뒤에서 알토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